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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감독이 만든 여성 서사, 김혜영 인터뷰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추출한 반짝거리는 이야기들. 우리에게 여전히 영화가 필요한 이유

프로필 by BAZAAR 2023.11.12
서로를 물들이는 우리들의 이야기,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김혜영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에서 30대 초반 여성들의 일과 사랑, 변화하는 삶을 그렸던 김혜영 감독은 ‘착한 영화’를 장편 데뷔작으로 선택했다. 영화는 상실을 겪은 인영(이레)이 꿋꿋하게 버티며 자신의 여러 가능성을 고민하는 성장극이다. 동시에 애어른 인영과 선생님 설아(진서연)가 마음을 열고 친구이자 가족이 되는 이야기다. 감독의 섬세한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관계에서 서로가 영향을 미칠 때의 침투와 물들임”을 포착한 영화다. 어떤 장르를 만나든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길 원하는 감독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영화를 꿈꾸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현장을 오가며 작업을 즐기는 그에겐 사람 이야기가 체질이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경우 이병헌 감독과의 역할 분담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B팀이었는데 처음 목표는 한 사람이 찍은 것처럼 보이는 거였죠. 연출한다고 욕심을 부려서 모든 걸 하면 드라마 전체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게 제 역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보다 작품의 조화가 중요했죠. 어느 정도 촬영한 후에 이 감독님이 “네가 알아서 해봐”라고 하면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감독님께 자주 묻다가 나중에는 질문하지 않고 이 감정이 맞을 거라고 스스로를 믿으면서 작업했어요. 원래 코미디는 이 감독님, 감정 부분은 제가 하는 식으로 계획을 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방식이 무너졌죠. 그래서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다고 말하긴 어렵네요. 드라마에 인물이 많이 나오는데 인물별로 나눠 찍지 않고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전부 찍었습니다. 극 중 인물 모두와 호흡을 맞춰봤어요. 열정이 뿜뿜 넘쳐서 제가 더 찍고 싶다고 조른 적은 있죠. 드라마 현장치고는 감정이나 심리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괜찮아’가 세 번 나오는 제목입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번 작품은 착하고 따뜻한, 맑고 바른 이야기라서 제가 연출한 드라마와는 색깔이 다르죠. 제목은 고민이 많았어요. 스태프들에게 공모도 했고 답이 잘 나오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무렵 최종 결정을 했습니다. 여러모로 후반 작업이 길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편집을 많이 했습니다. 작업이 오래 걸리다 보니 좀 지쳐서 한편으로 제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이야기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버틴 것도 있어요. ‘괜찮아’를 세 번 한 이유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 모두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는 겁니다. 열 번 할 수 없어서 세 번으로 갔어요.
매운맛 없는 착한 영화입니다. 어린 시절 보던 만화 <달려라 하니>의 느낌도 있어요.
맞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달린다는데 어떻게 안 보겠어요?(웃음) 사실 제가 이렇게 착한 영화를 할지 몰랐어요. 요즘 사회는 자극적인 게 많죠. 감정을 소소하게 심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조차 너무 자극적으로 갑니다. 영화의 극중 인물들은 자기 안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죠. 악착같이 사는데 나름의 이유와 고충이 있어요. 인물들이 상실과 결핍이 있고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외롭고 쓸쓸하죠. 그런데 아닌 척, 센 척하고 그러죠. 저도 성격이 츤데레라서 틱틱거리지만 알고 보면 살가운 면이 있어요. 인물들의 사는 방식이 저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물들어가면서 감정이 쌓이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극 중에서 대단한 빌런(악역)이 없어도 그런 캐릭터들이 서로 변화하고 융화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죠. 말하자면 금쪽이(<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겁니다. 그런 변화의 감정을 쌓아가는 것, 서로 조금씩 다가가는 것에 대해 흥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가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이레는 해피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배우입니다.
운이 좋아서 캐스팅은 ‘원샷 원킬’이었죠. 이레 배우한테 처음 하자고 제안했는데 바로 하겠다고 대답이 왔어요. 이레 배우는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착실하고 작품을 선택하는 게 과감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어렸지만 용감한 아역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똑똑하게 연기를 잘하죠. 이레가 말하면 왠지 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 하면 그대로 해야 할 것 같은 이미지를 가졌잖아요? 밉지 않게 그런 말을 잘합니다. 단순히 순수보다는 밝은 아이라서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은 힘이 느껴졌어요. 나이에 비해 현장에서 너무 당찼어요. 프리 프로덕션 진행하면서 대화해봤더니 천생 배우였습니다.
부모 없는 인영과 선생님 설아는 우여곡절 끝에 한 집에서 살게 됩니다.
설아는 차갑고 센 척하지만 따뜻하게 살아갈 줄 모르죠. 부족하고 빈틈 보여도 된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무조건 완벽하게 살아야 해서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캐릭터입니다. 설아가 선생님, 인영이 고등학생인데, 오히려 어른과 애가 바뀐 느낌이죠. 어른이 애한테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살면서 이래도 된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 스스로에게 관대해도 된다는 걸 애한테 배웁니다. 촬영할 때 인영이 아니라 설아가 오히려 금쪽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영화에는 여러 명의 금쪽이들이 등장하죠. 큰 금쪽이가 설아! 성인들이 볼 때 감정이입이 잘 되는 인물입니다. 이 영화를 금쪽이들의 성장 드라마라고 한다면 인영이는 외롭고 힘든 것을 이겨내는, 밝음으로 무장하려는 금쪽이죠. 반면 설아는 티 내지 못하고 센 척하는 금쪽이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영리하게 살지 못하는 제 세대나 윗세대가 금쪽이처럼 느껴졌어요.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나이대가 아닐까요? 사회에서 바라볼 때 30~40대가 목표도 있고 길을 잡고 간다고 생각하기 쉽죠. 외부에서 보면 완벽해 보이고 성공하고 인정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길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세대입니다.
갈 곳이 없어진 인영이 설아 집에 가서 함께 동거하는 과정이 인상적입니다. 설아의 집, 그만의 영역 안에 들어갑니다.
외딴 섬 같은 설아의 집. 그곳에 파장을 일으키는 게 인영이죠. 보기에 따라 외부 인물들은 파장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설아와 인영은 누가 애고 어른인지 모르게 서로가 영향을 끼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고 벽이 무너지는지,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로를 물들이는 개념이죠! 인영이 침입해 물들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술단의 연습실에 잠입한 인영이 자신의 물건을 배치한 것처럼 설아의 집에 간 인영은 자신의 물건을 그 집에 놓으면서 장악하고 변화를 주기 시작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식으로 물들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조금씩 퍼져서 물들이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 점층적인 것이 없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물들일 때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둘씩 받아들이면서 열리는 거죠. 설아의 삶과 생활에 침투하는 인영을 이레 배우가 귀엽게 표현했습니다. 그런 걸 눈치챘을 때 피식거리게 됩니다. 그런 감정이 귀엽다고 생각했죠. 누군가가 나한테 다가오려고 노력하는데 대놓고 다가오면 ‘뭐야?’ 하면서 벽이 생깁니다. 하지만 슬쩍 귀엽게 발 하나씩 들어오면 관계가 호전되는 느낌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한 단계 올라가는 느낌이죠.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나요?
감정을 쌓아간다는 개념, 감정이 변화한다는 의미의 성장 드라마를 좋아해요. 마음 깊은 곳에선 장르 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죠. 강한 남성들이 나오는 센 것도 욕심이 나고요. 지금은 섬세한 것 위주로 요청이 들어오고 있으니까 향후 어떤 작품을 할지 정리할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판타지도 좋아해서 극 중 판타지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어요. 상상에 동화적인 장면을 넣으면서 신이 나서 준비도 했었죠. 아무래도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는 재미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 작품 제안이 들어왔을 때 선택 기준은, 조금 부족해도 약점을 이기는 매력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 매력이 있으면 제가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이렇게 저렇게 고쳐서 나가자는 식이죠. 클리셰가 많거나 평범한 소재라도 뭔가 느껴지는 이점 하나만 발견하면 그 작품을 선택하는 것 같아요. 이건 대학 시절부터 했던 생각인데, 아주 평범한 소재라도 울림 있게 전달하는 작품을 보면 레벨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중에 제가 나이가 많이 들면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갖고 울림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2005)를 좋아하는데, 보다가 깜짝 놀랐죠. 아이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건 세상과 사람을 잘 알아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정말 열심히 하고 싶어요. 제 연출이 무르익었을 때 그런 이야기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어떤 감독님, 어떤 작가님이든 사람과 주변 상황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끼죠. 궁극적으로 사람한테 관심 갖는 작품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는 재미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저한테 작품 제안이 들어왔을 때 선택 기준은, 조금 부족해도 약점을 이기는 매력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 매력이 있으면 제가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전종혁
  • 사진/ 이우정(인물),ⓒ 부산국제영화제(영화 스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