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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챕터 '불구덩이', 배우 임선우만의 DNA

ACTOR'S CHAIR #1 배우 임선우

프로필 by BAZAAR 2023.11.09
오버사이즈 재킷은 Bluemarine, 스웨이드 원피스는 Salvatore Santoro.

오버사이즈 재킷은 Bluemarine, 스웨이드 원피스는 Salvatore Santoro.

첫 장편 주연작 <세기말의 사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왔는데 어땠어요?
불구덩이에 있다 돌아온 느낌이에요(웃음).
어떤 의미죠?
거기 있을 땐 몰랐는데 나와 보니 그 안이 엄청 뜨거웠다는 걸 깨달았어요. 열이 끓었어요.
영화제는 어떤 특정한 에너지가 집결된 시공간 같아요.
맞아요. 게다가 <세기말의 사랑>을 거기서 처음 봤거든요. 떨리고 걱정되고 불안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 내내 긴장을 하고 있었죠. 겉으론 다들 표를 안 내지만 속으로는 다들 내 영화 어떻게 봤을까, 하고 있었을 거예요.
처음 영화를 보니 어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첫 번째 볼 때는 내가 어떻게 연기했나 확인하는 정도였는데, 두 번째 때는 내 연기 외의 것도 조금은 보였어요. 나를 본다는 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한 일인 것 같아요.  
그건 괴로운 일인가요? 어떤 분들은 그 자체를 즐기기도 하던데요.
저는 그렇게 즐겁지 않아요. 봐야지 그 다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 보는 거죠. 내가 시도한 것들이 화면에 어느 정도 구현됐는지, 다른 배우들과 조화는 괜찮은지.
그건 직업인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이긴 하죠. 그래서 확인해보니 본인의 연기가 어땠나요?
파고드시네요.(웃음) 제가 맡은 역할은 근육병을 앓고 있고, 얼굴 표정 외에는 신체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큰 제약이 있어요. 그래서 언어를 통해서 대사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했어요. 평소 말로 어떤 의도를 드러내는 방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게 필요했죠.
자신하는데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임선우라는 배우를 확실히 각인하게 될 거예요.
그럴까요? 제게도 의미가 커요. 첫 장편 주연작이기도 하고, 작품 촬영이 중반부쯤 넘어갈 때 그동안 제가 해온 것들의 총화가 여기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금까지의 나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 좀 이상한 기분이 들더군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어떤 시기인가 보다.
작은 챕터 하나가 끝난 것 같은 만족감도 느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뭔가를 할 때 매번 명확한 목적성을 갖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것들이 내 안에서 일종의 저력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 나 괜찮게 오고 있었구나, 안심하게 되니까요.
그런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 안에서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거든요. 기다림이 많기도 하고. 기대를 품고 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 내 모습을 보게 될 때도 있고요. 게다가 실패조차도 모두에게 공개가 되는 일이잖아요.
그럴 때의 감정이 어때요?
처음에는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창피하고 무너지는 감정도 들고 복합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그 실패가 다음 일에 영향을 줄 테니까 불안함과도 연결되고. 이제 어떻게 다음으로 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내 마음을 정리하면서 그런 감정에 익숙해져야 된다는 점이 어려웠죠.
마침 ‘취약성’에 관한 데이비드 와이트의 글을 읽었는데, 취약성은 약점이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가지고 갈 근본적인 저류 같은 것이라 하더라고요.
보통 그걸 보고 싶지 않고 덮기 위해 우리가 뭔가를 마구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그 취약성을 직면할 수밖에 없잖아요. 배우라면 그런 경우가 더 잦고요. 그래서 강해져야 된다는 생각을 자주 한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7년 정도 걸어왔는데, 사람 임선우로서도 변화한 것 같나요?
네, 더 솔직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 가지고 있던 기질들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너무 반갑겠어요.
좋죠. 학교나 조직 생활을 하면서,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많은 걸 감추고 살잖아요. 일종의 외교적인 태도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생기는데, 연기하다 보니 어딘가에 묻어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기질 같은 게 나오는 느낌이 들어요.
예를 들면요?
낙천성이라고 할까요. 근심이 줄어드는. 나이를 먹으면서 아주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 그러니까 가족한테조차 솔직하기 힘든 성격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조금은 더 투명해진 듯 해요. 아직 낯선 사람들한테까지 그렇게 대하지 못하지만.
낯선 이들한테까지 그렇게 대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요. 투명해졌다는 건 자신을 드러낼 용기가 생겼다는 건데, 어쩌면 배우 임선우는 자유롭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걸까요.
그럴지도요. 연기할 때만큼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럴 때 안전하다고 느껴요.
 
가죽 장갑은 The Row.

가죽 장갑은 The Row.

감독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는 편인가요? 이번 영화의 경우를 이야기해볼까요?
임선애 감독님과 소통을 많이 했어요. 한 신 한 신 같이 만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시나리오상의 표현을 넘어 이 인물이 이런 말을 할 것 같고, 여기서 더 나아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감독님은 배우의 목소리에 열려있는 분이었고요. 저는 배우가 눈치 보는 게 정말 안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나치게 시나리오 눈치 보는 것도 안 좋고. 배우는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배우가 가진 창작의 영역이고요. 활자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 방법은 이 세계를 만든 감독님에게 자꾸 내 생각을 던지는 거고.
그런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성향의 감독이나 작품도 있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죠?  
안 받아들여져도 말은 하는 게 좋아요. 작품을 망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니까요. 모르긴 해도 아마 많은 감독님들이 그런 태도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바뀔 수 없는 부분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여요. 시도조차 안 하는 태도는 별로죠.  
직장을 다니다가 삼십대에 배우로 전향한 거잖아요. 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연기를 하고 싶었고 연극을 해야겠다 싶어서 대학원에 가게 됐죠. 한예종 연극원 예술경영학과 입시를 쳤어요.
연기과에 가지 그랬어요?
알아봤는데 연기과는 다 낮에 수업이 있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없었군요.  
네, 너무 무섭잖아요. 갑자기 내가 배우가 된다는 게 너무 이상했어요. 삶에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고. 그리고 제가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아주 열심히 살았거든요. 취업하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가 이미 서른 살이 훌쩍 넘었는데 이걸 그만둔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올인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용케 관련 포트폴리오 없이 합격했네요?
제가 나중에 물어봤거든요. 저를 왜 합격시켰냐고. 마침 그해, 교수님들이 그동안 계속 공연하던 학생들만 뽑다가 좀 특이한 DNA를 뽑아보자고 해서 그렇게 된 거래요.
운명적이네요.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은 다 힘 빼고 했을 때 잘됐던 것 같아요. 내가 정말 될 거라고 생각하고 한 도전이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연극 무대에도 서고 학교에서 단편영화 작업도 하게 됐죠. 직장인이 아닌 배우의 자의식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 같아요?
돈 받고 단편영화를 찍게 되면서부터요. 그때부터 하던 아르바이트도 다 접었어요.
그러면 직장은요?
중간에 관뒀어요. 코피 날 만큼 힘들었거든요. 사실 배우의 길을 접을까 말까 하는 갈등의 시기가 있었는데, 나한테 시간을 줘야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연기에 진심이라면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렸던 이유는 뭐예요?
연기를 좋아하는 건 분명히 맞는데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좋아한다고 해서 잘되리라는 법도 없고. 또 너무 늦은 거 아닌가. 무엇보다 가족을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어요.  
회사를 관둘 때의 심정은 어땠어요?
눈 감고 기차에서 딱 뛰어내리는 느낌이었는데 막상 뛰어내리니까 아주 재밌더라고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들을 배웠어요. 작업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에게 정말 많이 배웠죠.
그래서 돈을 받고 영화 촬영을 하면서부터는 자세가 어떻게 바뀐 것 같아요?
에너지를 분산하지 말자. 제가 느낄 때 이 일은 모 아니면 도예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꼭 올인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안 그러면 계속 어중간할 것 같아서요. 작은 단편영화 하나라도 나한텐 이것밖에 없었어요. 이 작품을 보고 또 누군가 연락을 주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에너지를 여기에 쏟고 싶다.
그렇게 올인한 후 돌아온 세상의 응답은 어땠나요?
실제로 일이 잘 풀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어요. 밤에 자다가 숨이 꼴딱꼴딱 넘어갈 때도 있었고요.(웃음) 그러다 <연애 빠진 로맨스>를 찍으면서 상업 영역으로 넘어왔고 커리어가 조금씩 확장되어가는 느낌을 받았죠.
 
튜브 톱 원피스, 스커트, 가죽 장갑은 모두 The Row.

튜브 톱 원피스, 스커트, 가죽 장갑은 모두 The Row.

요즘은 어떤가요? 지금도 잠들 때 간혹 불안이 찾아오나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가야 할까, 생각해요.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런 생각에 더 많이 빠지는 것 같아요. 내가 뭘 잘못했나, 태도가 별로였나 별별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 답을 알 수가 없잖아요.
그런 생각에 빠져들면 힘드니까 거기서 벗어나는 자기만의 스위치가 있지 않은가요?
저에겐 그게 일상 루틴이에요. 사소한 것들을 잘 지키자. 요즘엔 크라브 마가라는 특공 무술을 배우고 있어요. 상대와 호흡하면서 하는 운동이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인데 나의 기질과 반대라서 재밌어요.
배우 일을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가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요. 나답게 있는 게 생각보다 아주 어렵더라고요.
나답게 있을 때 따라오는 효용과 가치는 뭔가요?
후회가 적어요.
후회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게 중요하군요. 후회하지 않는 것. 그러면 삶이 후회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어지럽죠. 다만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조금씩 더 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어요.
 

Credit

  • 프리랜스 에디터/ 김현민
  • 사진/ 김영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스타일리스트/ 김경선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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