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가브리엘 샤넬과 하퍼스 바자와의 인연
많은 구속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기 위해 패션의 세계를 재구성한 그녀의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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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파리에 있는 리츠호텔 스위트룸에서 포토그래퍼 프랑수아 콜라가 <하퍼스 바자>를 위해 촬영한 가브리엘 샤넬의 모습.
빅토리아 앨버트(이하 V&A) 뮤지엄에서 열린 전시 ≪가브리엘 샤넬. 패션 매니페스토(Gabrielle Chanel. Fashion Manifesto)≫는 샤넬의 업적에 헌정하는 영국 최초의 전시이자 그녀의 예술적인 천재성에 대한 증거다. 샤넬의 경력 전체를 아우르는 이번 전시는 전설적인 리틀 블랙 드레스, 부드러운 트위드 재킷, 1916년의 세일러 칼라가 달린 실크 저지 블라우스를 포함해 약 2백여 벌의 의상을 선보였다.
나에게 있어 이번 전시는 자신을 가장 힘 있고 창의적인 인물로 바꾼 역사적 디자이너의 전기에 대한 새로운 버전을 생각하게끔 했다. 전시 큐레이터 오리올 컬렌과의 대화가 결정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라는 나의 경력도 영향을 미쳤다. 샤넬이 의상의 자유와 독립을 정의하게 된 방식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바자>가 가진 기록은 물론 과거 <바자> 에디터들과의 관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샤넬이 여성을 향한 시선에 있어 주요 예시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때문이다. 모더니즘 디자인의 선두로 샤넬이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한 지 한 세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오늘날 그녀가 가진 특별한 지위는 여전하다.
샤넬을 연구하기 시작한 지 무려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를 놀라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1883년 행상인의 사생아로 태어난 까닭에 가난 속에서 자랐고, 1971년까지 이어진 긴 삶 속에서 그녀는 상징적인 패션 아이콘이 되었으며, 여러 번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녀를 한마디로 규정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모호함과 더불어 매번 놀라움을 주는 무한한 능력은 샤넬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요소이다.
최근 연구 중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하퍼스 바자> 1937년 11월호에 처음으로 등장한 프랑수아 콜라가 찍은 샤넬의 초상이다. 파리 리츠호텔의 스위트룸 벽난로 옆에 선 그녀는 긴 기장의 검정색 레이스 가운과 거대한 주얼 장식 펜던트를 착용했으며, 뒤로는 커다란 거울과 앤티크 코로만델 병풍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매혹적이고 우아하면서 세련된 스타일 그 자체였다. 당시 샤넬은 54세로(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입은 룩은 지금 입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멋스럽다. 그런데 그 사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내가 놀랐던 이유는 벽난로 위에 있던 남자의 흉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그것이 에드워드 8세 왕이자 1936년 12월 퇴위 전 짧은 통치기간 동안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샤넬이 이 사진을 승인했고 실제 샤넬 ‘넘버 5’의 광고 이미지로도 사용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는 향수를 홍보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사진이 우리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단서를 주는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면 결코 나만의 공상일까? 그녀의 오른쪽 팔은 벽난로 위 선반에 놓여있고, 손은 왕의 머리를 향해 뻗어 있으며, 손가락은 보다시피 그를 가리키고 있다. 이 자세는 25년간 축적된 나의 리서치와 인터뷰 노트 파일을 다시금 보게 했고, 에드워드 8세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왕실 아카이브를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여기서 알게 된 사실은 1924년 초 그가 웨일스 공이었을 때 샤넬은 그를 처음 만났고 그때는 제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인 그의 친구 벤더가 그녀를 끈질기게 쫓아다녔을 때였다는 것이다. 웨일스 공은 샤넬에게 구애를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에 방문해 칵테일을 마시고 밖으로 나가 저녁식사 데이트를 했으며,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춤을 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샤넬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파리로 도망쳐온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황제 니콜라스 2세의 조카)과 여전히 연인 관계였다. 1924년 봄, 그녀는 그를 떠나 벤더에게 갔지만 그렇다고 다른 영국 구혼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웨일스 공, 러시아 드미트리, 웨스트민스터 공작 중에서 나를 가장 보호해준 사람을 택한 거야.” 그녀는 친구에게 고백했다. 허나 결론적으로는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남았다. 바로 여기서 전설로 남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공작부인은 많지만 코코 샤넬은 단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샤넬과 웨스트민스터 공작과의 오랜 관계는 그녀로 하여금 자주 영국을 오가게 했다. 그녀는 런던 체셔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렀다. 그를 통해 그녀는 1920년대 윈스턴 처칠과 친구가 되었고 영국 귀족 여성들의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었다. 1923년 웨일스 공의 동생인 앨버트 왕자(1937년 조지 6세로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와 결혼한 쾌활한 성격의 엘리자베스 보스-라이언도 샤넬의 고객 중 하나였다. 인기 있는 쿠튀리에면서도 웨스트민스터가의 여자로서 샤넬의 명성은 영국 사회에서 점차 커져갔지만 그녀의 의상 원칙은 여전히 단호했다. 그것은 바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즉 무심한 듯 편안하고 자신감 넘치게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5년 <하퍼스 바자> 8월호에 그녀는 스코틀랜드 고원에서 특유의 침착한 어투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자기 자신을 ‘강물에 집중해 연어를 잡는 사람’으로 묘사했다.(그녀는 당시 벤더와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재봉가위 못지않게 낚싯대를 다루는 것도 능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들에게 전하는 그녀의 패션 철학은 간결했다. “나의 스타일은 오늘날과 같은 삶의 결과다. 실용적이고 단순하지만 우아하다.”
이러한 접근은 오늘날의 <하퍼스 바자>를 만든 두 명의 여성, 편집장 카멜 스노와 패션 에디터 다이애나 브릴랜드에게 개인적으로도 커리어적으로도, 그리고 1930년대 이후 확장된 패션 산업에 있어서도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들은 <바자>에서 일하기 전인 1920년대부터 샤넬을 입기 시작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샤넬에 빠졌는데, 그녀의 옷이 주는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어요.” 스노는 1926년 파리에서 샤넬의 리틀 블랙 드레스를 처음 구입했다고 한다. 당시 그것은 이미 시크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었다.
다이애나 브릴랜드는 샤넬의 선구적인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남성의 영역에 머물렀던 냉정한 마음의 평정 같은 것을 심어주었다. “1920~30년대 샤넬을 입은 여성은 존엄성과 권위 같은 것을 갖고 있었어요.” 그녀는 회상했다. 브릴랜드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 샤넬의 전후 수트(Postwar Suit)에 존경을 표했고 1970년대와 1980년대 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연구소에서 일할 때에도 그녀의 작업을 지지했다. “재단, 선, 어깨, 겨드랑이, 재킷은 너무 짧지도 않았고 여성들이 앉을 때 바보로 만들지도 않았죠. 심지어 지금도 충분히 입을 수 있어요.”
1936년 스노가 브릴랜드를 영입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녀가 샤넬을 입고 있었던 건 결과적으로 큰 일조가 되었다. 스노가 샤넬의 화이트 레이스 드레스에 검은 머리칼에는 장미를 꼽고 뉴욕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고 있는 브릴랜드를 발견하자마자 그녀의 영입을 염두에 두었다는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있다. “제가 갖고 있던 샤넬 옷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회상하는 엄마처럼 그것들을 표현했다. 가장 좋아했던 의상 중 하나는 반짝이는 실버 라메로 만든 스커트에 그녀의 말처럼 ‘가장 아름다운 리넨 레이스 셔츠’, ‘진주로 꿴 볼레로’를 매치한 룩이다. 1937~38년에 걸친 글래머러스한 블랙 시퀸 팬츠수트와 아이보리 시폰 블라우스는 이번 전시에도 디스플레이될 예정이다. 큐레이터 오리올은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가브리엘 샤넬의 디자인이 어떻게 패션의 순간을 초월하고 그녀의 철학을 완벽하게 대변하는지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모던함과 움직임, 편안함을 바탕에 둔, 시간을 초월한 접근법이죠.”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스노와 브릴랜드는 파리를 떠난 마지막 <바자> 멤버들이었다. 스노는 <바자>의 10월호 이슈를 위해 남았고, 브릴랜드는 샤넬 드레스의 마지막 피팅을 앞두고 있었다. “샤넬과 유럽을 떠난다는 사실에 너무 우울했어요.” 브릴랜드가 말했다.

1965년 파리 리츠 아파트에 있는 샤넬의 모습.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녀는 전쟁 동안 문을 닫을 샤넬의 쿠튀르 아틀리에에서 자신을 위해 막 완성된 리틀 블랙 드레스에 그녀의 말처럼 ‘아이의 장갑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슬리퍼’를 신고 샹젤리제까지 걸었다.
브릴랜드는 샤넬의 디자이너 능력 못지않게 성격적인 면에도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샤넬은 정말 특별했어요. 여성으로서의 그 빈틈없는 매력! 당신도 그녀와 사랑에 빠질걸요. 매혹적이고 독특하고 놀랍고, 재치있었죠…. 샤넬과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없어요.”
스노는 샤넬의 스타일을 존경하지만, 파리에 있던 독일 외교부관 한스 귄터 폰 딘클라게와의 악명 높은 연인 관계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이어진 그녀의 활동들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슈파츠’란 이름으로 불리며 정중하고 그럴듯한 매력을 가진 그는 이전에 몇몇 똑똑하고 부유한 파리지엔 여성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로이센 남작과 영국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잘생긴 아들이었던 그는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고 전쟁 이전에 이미 런던에서 샤넬과 첫 만남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스노는 전쟁 동안 혹은 그 이후, <바자>에서 그들의 관계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녀가 1945년 초 파리로 돌아갔을 당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샤넬은 혼자 살며 사람을 만나지 않고 리츠호텔에서 매장이 있는 아파트를 왔다갔다하기만 했어요. 전쟁이 시작되기 몇 년 동안 그녀의 독일어는 독일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고 영어는 완벽하게 구사했으며 스파이 1인자였죠. 분명 코코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어요. 그랬다면 그녀는 감옥에 있었겠죠.”
실제로 샤넬은 1944년 8월 독립 이후 FFI(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프랑스 계열로 프랑스 국내에서 독일 점령군에 무장투쟁을 벌인 군사 조직. 프랑스 해방 후 정규 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에 심문을 당했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잠재적 혐의에 대응하기 위해, 그녀에 대한 지지를 확신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편지를 만들어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물론 처칠과의 우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샤넬은 사실 레지스탕스에게도 여러 차례 주요한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의 리비에라 빌라, ‘라 파우사(La Pausa)’에는 레지스탕스 그룹이 송신기를 통해 은밀한 메시지를 보내고, 프랑스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유대인 난민을 숨겨주는 용도로 사용한 큰 지하실이 있었다. 1929년 라 파우사를 디자인할 때 샤넬과 알고 지내던 젊은 건축가 로버트 스트레이츠는 레지스탕스에서의 전쟁 활동을 위해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최근 공식 프랑스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자료에서 샤넬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등재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이름은 동맹국에 기밀 정보를 제공한 에릭(ERIC)으로 알려진 비밀 네트워크와 관련된 파일에 등장한다. 또한 샤넬의 전 연인이자 전쟁 중에도 그녀와 가깝게 지내고 적극적인 레지스탕스였던 시인 피에르 레베르디(1960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들의 우정은 지속되었다)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샤넬이 지속된 향수 판매 수익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어서 전쟁 후 쿠튀르 하우스를 재개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카멜 스노는 샤넬이 다시 돌아올 결정을 내릴 당시 재빨리 격려와 지원을 했던 인물이었다. “컬렉션이 언제쯤 준비될까요?” 그녀는 1953년 9월 24일 뉴욕에서 파리에 있는 샤넬에게 전보를 쳤다.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기쁠 거예요.”
샤넬은 답신에서 여름 내내 일하러 돌아가면 즐거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일은 자신의 삶의 전부라고 설명했다. 1954년 2월 5일 컴백을 알리는 컬렉션을 론칭했을 때 프랑스 미디어는 적대적이었지만, 스노와 브릴랜드는 그녀에게 신임을 보내며 그녀의 시그너처인 트위드와 편안한 저지 수트의 자유로운 매력을 옹호했다. 스노는 <바자>에 샤넬에 관한 찬사 기사를 기획하고 그들의 친구인 장 콕토가 삽화를 그리는 등 그녀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계속했다. 이에 독자는 물론 전 세계의 바이어들이 호응하기 시작했고 샤넬의 유연한 테일러링을 원하는 사람들의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쟁 후 코르셋의 재도입에 반대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환영받는 일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대의 추종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비단 옷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 71살의 나이에도 화이트 실크 셔츠에 빛나는 진주 액세서리 그리고 그로그랭 리본으로 트리밍된 크림색 트위드 재킷을 입은 샤넬은 그녀 자신이 샤넬의 광고 그 자체임을 보여주었다. “유행은 지나가지만 스타일은 남는다”는 말을 남긴 샤넬. 자신에게 진실되었던 코코 샤넬은 일견 시대의 무드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한 발 앞서 나가는 여성이었다. V&A의 이번 전시가 티켓 판매에서 압도적으로 인기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샤넬의 영원한 매력은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으니까 말이다.
※ ≪가브리엘 샤넬. 패션 매니페스토≫ 전시는 9월 16일부터 내년 2월 25일까지 V&A 뮤지엄에서 열린다.(www.vam.ac.uk) 저스틴 피카디의 새로운 샤넬 전기 <코코 샤넬: 전설과 삶>(하퍼 콜린스)도 함께 발간됐다.
Credit
- 글/ Justine Picardie
- 번역/ 이민경
- 사진/ ⓒ Chanel, Getty Images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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