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 일 봄 석 달 동안 짜내나니 나의 시름 그 누가 녹음 드리우는 초여름이 꽃 피는 봄보다 좋다고 하던가
- 이수대엽(二數大葉) ‘버들은’ 현대어 풀이
강서경은 마치 실을 짜듯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풍경의 직조로 읽어내던 선인들의 비유를 이번 개인전의 제목 «버들 북 꾀꼬리»로 추출했다.
“이번 전시의 성취는 관객을 풍경의 일부로 초대했다는 겁니다. 로비에 들어서면 관객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죠. 좌대 위에 올라가 전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작가의 의도대로 산수화의 일부가 되어 과거와 현재 어느 사이에서 방랑하다가 문득 <정井 ‐ 버들 #22-01>의 차경을 통해 한 여인의 삶의 조각을 마주했다. 격자틀 너머에 구월삼춘, 홀로 남은 여인이 시름을 베틀로 짜내고 있다. 얼굴도 이름도 사는 곳도 시대도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면에서 여인은 작가 자신이었다.
2018년 아트바젤 발루아즈 예술상을 수상하고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 개인전,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 등으로 해외 활동에 박차를 가하던 작가는 불현듯 찾아온 출산과 암 투병이라는 삶의 진한 궤적을 통해 자신의 불안을 마주하고 연대의 풍경을 모색했다. 2018년 «검은 자리 꾀꼬리»에서 선보인 동명의 검은 자리 작업이 98×78cm 사이즈로 한 사람이 오롯이 서서 풍경을 바라보는 상태에 대한 서사였다면, 이번 전시는 ‘자리’의 경계가 확장되어 모두 함께 어우러진 산수 풍경에 대한 작가적 상상의 발로다.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자연의 요소와 그 속에서 함께 자리하고 관계하는 개인들의 이야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거대하지만 섬세한 풍경이야말로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구현하고픈 ‘진경(眞景)’이다.
“수천, 수만 마리의 꾀꼬리가 드넓은 산이 펼쳐진 풍경 속을 함께 또 각자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봅니다.” 어느 날 문득 거대한 산이 작가의 몸 안으로 들어앉았듯, 그가 창조한 산수화를 거닐다 불현듯 삶의 덩어리가 우리 각자의 예술로 안착하는 경험. 전통/나 사이의 슬래시(/)는 그렇게 사라진다. 이제 기꺼이 풍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버들 북 꾀꼬리>, 2021-2023, 15분 20초, 3채널 비디오, 컬러, 소리. © 강서경 스튜디오
개인적으론 이번 전시가 <그랜드마더 타워>를 실견했다는 점에서 뭉클했습니다. 저에겐 할머니보다 다리가 조금 불편하신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그걸 떠나서 이 작품이 세상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향한 경배로 느껴지기 때문이겠지요. 비틀거리면서 쓰러지지 않는 탑은 필연적으로 언젠가 잘 쓰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쓰러지더라도 거기엔 ‘검은 자리’가 있고, 저 멀리 ‘산’도 겸허하게 거기 그대로 있을 테니까요. 2018년 발루아즈 예술상 수상과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로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이후 급작스러운 출산과 투병으로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틀거리는 시간이었나요?
저는 미술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미술이 좋고 미술 작업이 좋아서 거기에 집중하며 살아오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죠. 늦은 나이에 기적 같은 출산도 하고 갑자기 병을 발견해서 암 수술도 두 번이나 했어요. 그러면서 저도 새삼 <그랜드마더 타워>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저 스스로의 불안도 있지만 타인의 불안을 응시하면서 그걸 안전하게 채워주고 싶어졌어요. 저는 2018년 미국 필라델피아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의 제목을 «검은 자리 꾀꼬리»라고 명명했어요. 동명의 검은 자리 작업은 98×78cm 사이즈로 그것은 제 회화의 크기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한 명이 서서 세상을 응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기도 했죠. 저도, 기자님도, <그랜드마더 타워>도 그 위에 서 있으면 안심할 수 있었죠. 지난 몇 년간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저 자신을 극도의 불안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점점 자리에 위태로움을 느끼면서 <좁은 초원>이나 <둥근 유랑> <엷은 방랑>처럼 유머와 위트를 간직한 채 불안하게 서있는 개인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경험들은 타인에 대한 고마움과 시대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나의 할머니와 그 모든 과거의 기록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귀결되더라고요. 지난 전시가 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 곳에 서서 바라보는 가까운 풍경과 상태에 대한 서사였다면 이번 «버들 북 꾀꼬리»는 풍경의 개념을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꾀꼬리는 한 명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수만 마리의 개인들이 모여있는 장면이기도 해요. 저에게 꾀꼬리는 작업과 관객이고요. 버들은 사시사철 푸르죠. 그 안에서 서로의 불안을 연대하면서 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이번에 처음 선보인 <산> 연작은 거대한 산의 풍경을 신체 크기를 반영해 친근하고 가까운 크기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기자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추상이라는 게 어떤 걸 지칭한다기보다는 추출해나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산> 연작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선보이게 되었는데요. 출산과 암 투병 같은 제 사적인 삶에서의 사건들과 겹치면서 어느 순간 커다란 산이 제 바로 옆에 작게, 소중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저한테는 거대한 추상의 덩어리처럼 느껴졌던 산이라는 것이 제 옆에 살포시 다가와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정말 그랬어요. 아주 커다랗고 추상적인 삶의 덩어리가 제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랄까요. 그래서 산을 제 신체 크기에 맞게 작게 만들었어요. <산>은 항상 제가 꿈꾸던 작업이었어요. 저는 산을 잘 그리기 위한 기법보다는 산을 그린 사람들의 생각과 당시의 풍경에 주목했습니다. 문인들이 그림을 그리던 시대잖아요. 그 사람들은 대체 왜 산을 그렸을까요? 산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다가 밥은 무얼 먹었을까요?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요? <산> 연작은 산이라는 추상적인 대상 안에 나를 이입하는 시도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할머니를 모티프로 작업한 <그랜드마더 타워>와 작가 그리고 작가의 딸이 함께 한 모습.
거대한 추상의 덩어리가 다가오는 순간의 기분을 ‘쾌감’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작가가 아닌 저는 그저 짐작할 따름입니다. ‘쌓이고 중첩되던’ 상이 비로소 ‘추출되어’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건가요? 혹시 그 기분이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의 그것과 비슷한가요?
작업을 쌓고 해체하는 과정이 반복될 뿐, 한 번에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죠. 산수화 능선의 일부를 제 드로잉과 겹쳐보기도 하고 높낮이를 바꾸며 그려보기도 해요. 골조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때론 거기에서 실패하죠. 산은 깎을 수 없으니까요. 무수한 고민 끝에 나온 산인데 ‘이 산이 아닌가벼’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 경계를 뚫고 지나오면서 얻는 쾌감이란 게 있어요. <자리> 연작도 그래요. 수많은 쾌감이 포개어져 완성되죠. 현문우답일 수도 있는데, 영국에서 공부할 때 선생님이 언제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학생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데 그때 제가 “‘다 됐다’고 느낄 땐 뱃속이 편안할 때”라고 대답했어요. 작업실에서도 선 하나 더 그어놓고 집에 가서 밤새 신경쓰거든요. 다음 날 아침에 잘 말라 있으면 속이 참 편해요.
9월 5일 진행된 전시 오프닝 나이트에서 강서경은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공간적 서사와 사회 속 개인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한 ‘액티베이션(Activation)’을 선보였다. <버들 북 꾀꼬리 — 움직임>, 18개 안무 제작 : 강서경, 조형준. Copyright @ Studio Suki Seokyeong Kang 2023. Photo: Jungwook Mok
<산> 연작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2 1층 벽쪽에 병풍처럼 설치된 작업들, 딱딱하고 부드럽고 채움과 비움이 공존하는 사계절 연작, 초현실적 우주 공간을 연상하는 아워스 연작으로요. 이 세 개의 묶음은 각각 어떻게 연결되나요?
그러려면 일단 로비에서 만나는 <아워스‐이>부터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보통 번개 맞은 나무는 세로로 잘라서 보관해요. 세로로 잘렸을 때 가로 폭이 그 나무의 나이인 거죠. 저는 거기에 맞추어 최대치의 동그라미를 그렸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아워스‐이>가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든 시간을 환영해요. 그리고 <아워스‐이> 사이로 슬몃 보이는 벽에 <산>이 설치되어 있어요. 그곳은 리움미술관의 고미술품실로 향하는 길목이에요. 과거와 현재 두 시간대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하고 전통 회화를 연구했던 저의 배경과도 연결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활용했어요. <아워스‐이>를 통해 M2 전시실로 들어서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따라 다른 모양과 질감을 가진 네 개의 산이 있고 거기서 다시 1층으로 올라가면 알루미늄 소재의 추상적인 덩어리가 허공에 매달려 있어요. 알루미늄 조각의 겉면을 자세히 보면 인왕산의 표피를 재현한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균형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강서경에게 균형이란 ‘어떤 뜻이나 현상이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러니까 ‘방향’의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리움미술관과의 인터뷰에서 “균형의 지점이라는 것은 제가 살고자 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나가는 방식을 어떠한 방향을 통해서 제시를 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궁금증인 것 같아요”라고 하셨습니다. 2019년 <바자>와의 인터뷰에서는 “회화라는 게 저에게는 방향을 설정해주는 나침반 같은 건데요. 매일이 숙제 같고 매일이 어떤 난제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이것을 미술이라는 언어와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작가이고 싶어요”라고도 하셨고요. 본인을 서있게 하는 ‘균형’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하세요?
저에게 미술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걸어가는 길에 보이는 나무들을 따라가는 과정이에요. 그렇게 가다 보면 숲이 나오겠죠. 햇빛도 만나고 비바람도 만나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미술에서 완벽한 균형을 정의할 순 없을 거예요. 이 색과 이 색이 만나면 혹은 이 색과 이 재료가 만나면 촉각적 온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왜 그 시대 사람들은 그림 안에 글씨를 담았을까? 이렇게 미완성인 채로 매일 매일의 균형을 찾아가는 게 작가로서 저의 방향이고 원동력입니다.
9월 5일 진행된 전시 오프닝 나이트에서 강서경은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공간적 서사와 사회 속 개인의 영역에 대한 탐구를 시각화한 ‘액티베이션(Activation)’을 선보였다. <버들 북 꾀꼬리 — 움직임>, 18개 안무 제작 : 강서경, 조형준. Copyright @ Studio Suki Seokyeong Kang 2023. Photo: Jungwook Mok
이번 전시는 초기 대표작에서 발전된 작업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 신작에 이르기까지 총 1백30여 점이 출품됐습니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전시라서 더욱 선택과 집중에 고심하셨을 것 같습니다. 작품 선정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시간’입니다. 작가로서 기록을 해독하는 일, 나무라는 재료가 지닌 시간의 흔적, 커다란 스크린 안에서 구현된 무중력 상태 모두 마찬가지죠. 시간의 흐름 가운데 변화하는 자연의 요소와 그 속에서 함께 자리하고 관계하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녹여내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거대하지만 섬세한 풍경을 제시하고자 했어요. 관람객의 동선을 제가 정할 순 없지만 ‘시간’의 흐름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인지하고 감상하면 더 좋겠지요.
‘모라(Mora)’란 언어학에서 음절 한 마디보다 짧은 단위로, 아, 어, 오 같은 찰나의 웅얼거림이죠. 강서경의 작업에서는 시간을 담고 서사를 쌓아 올리는 단위이자 작품을 지칭합니다. 모라가 쌓이면 어떤 문장이 될까요?
모르겠어요. 이토록 다채로운 현대미술 속에서 저는 회화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영원히,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문장처럼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동양화 수업 첫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사각’이란, ‘전통’이란, ‘한국화’란 무엇인가. 이는 평생 가지고 갈 고민이다. ‘전통/너의 이야기’, 이 두 가지를 양손에 쥐고 ‘내가 하고 있는 얘기가 뭐지?’라고 저울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통’과 ‘너의 이야기’ 사이 슬래시(/)가 사라지는 순간, 그게 무엇인지 반드시 붙잡아라”라고 말씀하신다죠. 문득 미술학도였던 본인에게 그런 순간은 언제였을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슬래시(/)는 실패입니다. 학생들에게 제가 이상한 작업 만들고 실패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거든요? 타임머신을 타지 않는 이상 전통과 지금의 제 이야기가 만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르죠. 작업을 통해 만날 듯 말 듯하다가 결국 어긋나는 일도 많아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실험이 있었습니다. 어느 때는 저만의 작은 무대를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호호 할머니가 됐을 때나 공개할 법한 비디오 작업도 찍어보았어요. 저 혼자 간직하고 있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이상한 시도를 계속하면서 여기에 내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까 처절한 고민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한 «버들 북 꾀꼬리» 설치 전경. Photo: Jungwook Mok
누군가에겐 이번 전시가 ‘전통’과 ‘나’ 사이의 슬래시(/)가 사라지는 순간일 텐데요.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희망은 미래의 감각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액티베이션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세대를 초대해서 자기 자리에 대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방향을 안무로 선보였습니다. 스웨덴에서는 그 지역 사회의 노인들, 영국에선 은퇴한 댄서들, 이탈리아에선 학생들, 홍콩에선 초등학생들과 협업했죠. 이번 <버들 북 꾀꼬리 ‐ 움직임>을 통해서도 단단한 현재와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간 근거리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리드 안에서 이뤄진 느린 움직임은 각자의 공간이 서서히 확장되고 공유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들 각자의 미래로 뻗어나갑니다. 과거와 현재가 끊이지 않는 시간 위에 이어져 있고 나아가고 있다는 걸, 제 작업을 통해 해독해주기를 바랍니다.
※ «강서경: 버들 북 꾀꼬리»는 12월 31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손안나는 <바자>의 피처 디렉터다. ‘전통’과 ‘나’ 사이의 슬래시가 사라지는 순간을 꿈꾸며 동양화 취미반에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