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만든 주술적 무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만든 주술적 무대

데님 위로 춤추는 성스러운 불꽃

BAZAAR BY BAZAAR 2023.01.25
 
〈The only thing that survives〉, 2022, Acrylic polymer on blue foil on bleached denim on inkjet print on canvas, 218.4x162.6cm. Photo: Thapphawut Parinyapariwat

〈The only thing that survives〉, 2022, Acrylic polymer on blue foil on bleached denim on inkjet print on canvas, 218.4x162.6cm. Photo: Thapphawut Parinyapariwat

태국의 민주화운동, 도시를 메운 불교사원, 할아버지의 죽음과 추모 의식. 다양한 풍경을 콜라주해 자신만의 영상 서사시를 써내려온 태국 태생의 젊은 예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 그는 뮤즈인 동료들과 함께 태국 전통 신 ‘나가’를 재현하거나 드론에 서식하는 유령 ‘샹트리’ 같은 캐릭터를 창조하며 실험적 퍼포먼스의 영역까지 예술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오직 회화 10점으로 채운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장에 들어서자, 영상에서 느낄 수 있는 신비롭고 주술적인 공기가 더욱 강렬하게 전해졌다. 창밖은 눈발이 날리는데 전시장 내부는 화염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바닥을 뒤덮은 검은 흙바닥에는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가 직접 쓴 기도문이 새겨져 있고, 기도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개인전이 열리는 국제갤러리 3관 전경.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개인전이 열리는 국제갤러리 3관 전경.

표백한 데님을 캔버스로 삼는 〈역사 회화〉 연작은 당신이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해온 작업이다. 이번 전시에서 변화한 점은 무엇인가?
〈역사 회화〉 시리즈는 데님을 일종의 ‘피부’라 여기는 작업이다. 나는 표백한 데님을 불을 붙일 수 있는 세트장이나 무대라 생각한다. 불이 붙는 즉시 화염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무대를 천천히 돌며 의식처럼 움직인다. 사실 데님은 종이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탄다. 그래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다음 디테일을 더한다. 마치 수술하는 의사처럼, 다림질을 하고, 불타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쌓아 붙이는 식으로 노동이 필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우는 행위 자체보다 ‘시간성’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더욱 반영하려 한다. 데님을 마치 땅이라 생각하고 그 위를 거닐거나 실제 낙엽을 쌓기도 하고, 보디 페인팅 퍼포먼스를 협업하기도 한다. 또, 최근 몇 해 동안 〈헝거 게임〉 속 ‘불사조’에 사로잡힌 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태국의 군사정권과 민주화운동에 대해 떠올리면서, 불사조에 대한 상징을 발전시켜왔다. 불사조는 재에서 태어났다가 불타 사라진 뒤 그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다. 삶과 죽음, 환생 이런 순환의 고리에 대해 생각하며 회화를 만들고 있다.
상징들을 콜라주해 채운 연작과 달리 신작 〈빈 공간(Void Painting)〉은 작품 제목처럼 여백이 존재한다.
컴퓨터 블루스크린을 떠올리며 작업한 것이다. 이미지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투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실제 의류에 사용하는 메탈릭 레더를 활용한 시도를 더했는데, 데님 위에 광택 있는 소재를 열처리해 밀착시킨다. 이때 반짝이는 것들은 태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황금 사원을 은유한다.
데님이나 금박 등을 재료로 삼는 이유에는 패션에 대한 관심도 반영된 것인가?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은 맞지만(웃음), 그보다 ‘정통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물음을 던지고 싶었다. 나는 태국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겪어왔다. 때문에 ‘정통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에 계속 천착하게 된다. 데님이나 포일은 의류 산업에서 흔히 대량 생산되는 소재다. 각각의 소재가 지닌 의미 또한 다층적이다. 데님은 모두에게 평등한 것 같지만 실은 가장 미국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있고, 태국 불교사원 속 금박 장식은 관광산업의 주요 수단이다. 모두 순수한 문화적, 종교적 산물이 아니라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빈 공간〉 앞에 선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빈 공간〉 앞에 선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영상 속 내레이션을 시몬 베유 같은 작가들의 글에서 영감받는 등 당신의 작업에서 텍스트의 역할 또한 중요해 보인다. 종말하는 세계에서 증언자를 찾는(Who will testify to the time when the world was ablaze?) 등 이번 전시의 작품들 제목 역시 의미심장하다.
나의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고, 그래서 나는 영문학과 서양식 영어 교육에 더 가까운 환경에서 자라왔다. 그것에서 도피하고 싶어 예술 세계에 더 빠졌는지 모른다. (웃음) 하지만 언어는 의식을 지배하지 않나. 나는 비디오를 만들거나 전시를 준비하며 주로 글을 쓴다. 글을 쓸 때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하는 편이고, 여전히 불확실성과 질문 속에서 답을 구하기 위해 쓴다. 10여 년 전, 처음 〈역사 회화〉 연작을 시작할 때는 각 작품마다 이름을 명명하기가 두려웠다. 불탄 자국을 보며 관람객에게 자유롭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작업을 지속하며, 전시가 열린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고 싶어 이번 전시에서는 여러 자료에서 문장을 따왔다. 예를 들어 〈Dreams are more powerful than history〉는 칼 융의 말에서 ‘메모리’를 ‘히스토리’로 바꾼 것이고, 다른 제목들 역시 칸예의 노래 가사나 내 영상작품의 내레이션 문장 등을 변형한 것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성스러운 순간을 유도하는 것”이라 말한 적 있다. 최근 당신이 경험한 ‘성스러운 순간(sacred moment)’은 언제였나?
내가 공동 설립자로 주최하는 방콕의 예술 축제 ‘고스트’ 기간 동안 감상한 퍼포먼스에서 몹시 성스러운 순간을 여러 번 느꼈다. 그리고 3개월 전, 로살리아의 콘서트장에서도. 그녀가 공연하는 모든 방식에 크게 영감받았다. 흔히 종교적인 경험이라 느낄 수 있지만, 내 생각에 ‘성스럽다’는 관념은 좋고 나쁨의 가치 판단이 아닌, 자신에게 ‘더 나은 길’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게 예술은 일종의 성스러움을 찾는 길이다.
 
※ «이미지, 상징, 기도»전은 국제갤러리에서 1월 29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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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안서경
    사진/ ⓒ 국제갤러리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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