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난 독립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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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난 독립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 어설픈 우월감, 알 수 없는 불안감, 미묘한 서운함, 낯선 외로움에 진통하던 스물. 그 시절 우리는 서로에게 몇 점짜리 친구였을까? <성적표의 김민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품을 공동 연출한 이재은, 임지선 감독을 만났다.

BAZAAR BY BAZAAR 2022.11.05
 
너가 한국인에 대해서 얘기했던 게 생각나. 남의 눈치를 보고, 안정된 삶을 쫓는 사람들? 바쁜 일상. 좁은 땅. 인맥. 가식과 형식. 알 수 없는 불안. 기다림. 두려움. 막연한 기대. 너가 나에 대해서 얘기했던 게 맞을 수도 있어.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한 기다림? 음… 그래도. 앞으로 뭘 하든 그때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 너는 한국인이 아니라 혼혈이었으면 해. 그런 의미에서 F를 줄게. - 한국인의 삶 F
 
고교 시절을 함께 보낸 단짝 친구 정희, 민영, 수산나는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자신들의 소모임을 잠정 중단하기로 한다. 민영이 결연한 의지로 카메라 앞에서 ‘삼행시 클럽’의 해체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이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임지선: 우리 영화가 기숙사 생활 하며 고등학교 내내 붙어 있던, 평생 잘 맞을 것 같던 친구들이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가며 멀어지는 이야기이지 않나. 첫 장면에서 일종의 전조증상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이건 백프로 흑역사 생성이다”라는 대사도 나오는데 이후 펼쳐질 상황을 암시한달까. 마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문 낭독하듯 이 친구들에게는 세상 진지하고 경건한 의식처럼 보이고 싶었다.
‘삼행시 클럽’이라는 설정이 독특하다. 문학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소소하고, 놀이로 치부하기엔 사뭇 진지하달까. 학창 시절엔 이런 스트레스 해소용 창구 하나쯤은 다들 있었던 것 같고. 이를테면 내 짝꿍은 국어 교과서 표지에 대단한 일러스트를 그렸다. 왜 하필 ‘삼행시’였나?
이재은: 내가 낯을 가리고 내성적인 성격이다. 살다 보면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건배사를 해야 하거나 뜬금없이 삼행시를 요청 당하는 경우가…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 있다. 그런 날은 우물쭈물하다가 집에 가서 잠을 못 잔다. 내게는 괴로운 경험이었고 ‘아, 그럼 동아리를 만들어서 연구하면 순발력과 재치가 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었다. 실제로 대학 친구들에게 해보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다.(웃음)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삼행시 클럽’은 내 로망이었던 것 같다. “왜 이상한 말만 해?” 하지 않고 그 이상한 말을 즐겁게 받아치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신의 기말고사 성적 정정에 정신이 팔린 민영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 정희를 소홀하게 대하고, 서운함을 느낀 정희는 민영을 향한 자신만의 성적표를 남긴다. 이재은 감독이 실제로 친구에게 느낀 서운한 감정에서 출발한 들롯이라고 들었다.
이재은: 비슷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늘 정희와 비슷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삶에서 친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고, 그렇기 때문에 서운한 감정도 더 자주 느꼈다. 임지선: 영화가 개봉하고 흥미로웠던 게, 정희든 민영이든 수산나든 각자 어느 한쪽에 자신을 대입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쪽도 아닌 것 같지만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동안 나에게는 민영이 같은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당장의 목표에 너무 집중하는 나머지 친구를 살피지 못했달까.  이재은: 정희와 민영이 대사를 잘 주고받는 게 중요했다 보니 우리 둘이 각자의 입장에서 상황극을 했다. 서로에게 가장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던지고 반격하고. 일종의 임상실험이었달까. 이를테면 정희가 민영에게 “4차원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라고 한다. 임지선 감독에게 그 대사를 듣는 순간 내 얼굴이 새빨개졌다.(웃음) 영화 속 정희가 하는 상상은 평소에 내가 하던 것들이었으니까. 임지선: 인간관계가 화두인 작품이다 보니 결국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에서 만난 정희와 민영이들을 재조합하는 과정이었다.
스무 살의 우정을 섬세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20년 전 작품 〈고양이를 부탁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작업하면서 의식한 지점이 있나?
임지선: 〈고양이를 부탁해〉는 당연히 우리 둘 다 무척 좋아하는 영화다. 그 영화를 의식했다기보다는 첫 장편인 만큼 우리가 아는 걸 쓰자, 라는 생각이 컸다. 인물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한 건 그런 이유였다. 이재은: 오히려 참고할 부분은 참고했다. 실제로 정희 캐릭터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흩어진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 구심점인 태희(배두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왜 스무 살의 감정에 집중했다고 생각하나?
이재은: 영화에서 정희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처음’이다. 스무 살이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 나 역시 실제 대학생이었고 아까 말한 대로 친구에게 ‘서운함’을 느낀 일은 내 인생에서 대단히 큰 사건이었다. 나이가 들고 이런 관계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 보면 감정에 무뎌지고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서운함도 없다. 나도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옛날의 감정이 순식간에 옅어지더라. 그렇기 때문에 스무 살 그때 처음 느낀 그 감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거인〉의 김태용 감독이 “그때의 스무 살이 생존을 고민하기에 벅찼다면 〈성적표의 김민영〉에 나오는 소녀들은 자존과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한 것에 공감했다. 2001년의 스무 살과 2020년의 스무 살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임지선: 지금의 우리가 그 나이는 아니니까 아마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에게 익숙한,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실 이 영화의 배경은 ‘현재’인데 어떤 분들은 “요즘 스무 살의 패션이 아니다”라고도 하시더라. 돌이켜보니 영화를 만들면서 의식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때 애들은 이렇고 요즘 애들은 저렇고’의 접근을 한 적은 없다.
정희가 남긴 성적표로 두 사람의 삐걱대는 관계가 개선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왜 이 영화의 결말이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이재은: 열린 결말이지만 나도 어딘가 해소된 느낌을 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정희가 자기 마음을 성적표라는 형식으로 아낌없이 전달했기 때문인 것 같다. 대부분의 관계는 나 혼자 감정을 느끼고 증폭하고 결론짓고 떠나고 그렇게 끝난다. 결국에는 서운함이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촉발하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희는 자신이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얼마나 상대방을 좋아했는지 모든 걸 꺼내놓는다. 이 점이 용기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서운할지언정 친구의 외로움까지 껴안고 떠나는구나 그런 생각에 감동적이었고. 임지선: 정희라는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은 우리가 보고 싶은 친구의 면면을 추가하는 작업이었다. 어떤 점에서 정희는 판타지 같은 캐릭터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많지만 그 시절의 ‘너’와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그 점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민영이거나 정희였던 우리들에게 들려주고픈 대사가 있다면?
이재은: “(네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을 때가 있어.” 단순한 말이지만 이 대사가 좋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싶고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영화 속에서 민영이가 책상에서 한쪽 팔을 베고 엎드려 있는 장면에서 이 대사가 깔리는데 힘없이 누워 있는 친구에게 링거가 되어주는 말로 느껴졌다. 임지선: 역시 ‘한국인의 삶’이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각본집 작업을 하면서 다시 읽어보니까 “밖이 아닌 안에서 나를 봐주고 있다”는 대사가 새삼 와닿더라.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하나를 꼽는다면 결국 정희가 민영을 혹은 누군가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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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사진/ 이우정
    헤어&메이크업/ 이인선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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