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9일부터 2022년 1월 22일까지 갤러리 기체에서 열린 개인전 «Hourglass»에 선보인 작품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권현빈 작가.
권현빈 Hyunbhin Kwon
멀지 않은 곳에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시 탄현면. 싱크대 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한 널찍한 공간에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조각을 만드는 부모님과 작업실을 공유하는 권현빈 작가는 통창 너머로 자연을 바라보며 시간을 느끼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이렇게 창밖을 보고 있으니까 많은 아티스트가 영원한 영감은 자연이라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 다닐 때 이런 작업을 했다. 친구들, 그러니까 관람객에게 쪽지를 나눠준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오렌지 색면화 감상을 위한 안내서. 일, 맑은 날 밖으로 나가 선다. 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감는다. 삼, 눈을 감은 채로 하늘을 응시한다. 그러면 모두가 아는 오렌지 색면화를 볼 수 있다.
여러 그룹전과 개인전에서 주재료가 돌인 조각과 설치를 선보였다. 인왕산의 선바위, 경주 남산을 수놓은 수십 개의 불상과 탑 등을 보면서 돌이 지닌 둔중한 힘에서 먹먹한 감동을 받는다.
그건 아마도 돌이 지닌 시간성 때문일 거다. 그런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각인 것 같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양한 선택을 하는데 그 상황과 선택을 굉장히 단순화해서 보면 결국에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속에서 각자만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돌이라는 것은 함께하기에 좋은 파트너라고 생각한다.
몇몇 인터뷰에서 작업할 때 관찰하는 시간을 오래 갖는 편이라고 얘기했다. ‘작업하는 시간’에 대해 묘사한다면.
시간을 오래 갖는 편이긴 한데 그게 결코 의도적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부분이 크다. 알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번뜩하는 순간에 거대한 확신에 휩싸였다가 다시금 혼란스러운 시기가 찾아오고…. 이 과정을 가장 안전하게 보내는 방법은 기다리는 것이다. 옛날에도 했고 지금도 하고 있고 미래에도 할 질문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질문에 얹혀서 살아가며 그 질문을 바라보고 함께 보내는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업이 나오는 것 같다. 구체적인 계획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그런 질문들을 한쪽에 두고 내가 생각하는 조각의 형식을 다른 쪽에 둔다. 그러면 어느 날 이 두 개가 포개질 때가 있다.
지난해 갤러리 기체에서 열린 «Hourglass»에 관해 묻고 싶다. 3층으로 이뤄진 전시 공간에 〈구름〉 연작으로 시작해서 〈Humming Facades〉로, 또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와 〈얕게, 고르게, 깊게〉로 마치 자연현상처럼 작품을 배치했는데 각 시리즈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 궁금하다.
앞서 말했듯이 나란히 둔 아이디어가 합쳐져서 일을 저지르고 바라보는데 이때 잘 안 풀릴 때가 많다. 아무런 성과 없이 한 계절이 흐르기도 하고…. 어느 여름날 테이블 위에 얼음물이 담긴 유리컵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이 녹는데 그 순간 〈구름〉과 연결이 되면서 〈얼음-물-컵 그리고 공기〉 시리즈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렇다고 얼음물 컵을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이런 순간이나 상태에 대해서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찾아보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수증기처럼 둥둥 떠 있는 점들을 타공하는 ‘행동’들을 하는 거다. 당시 입체의 결과물로 나오기는 하지만 조각 자체의 평면성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고 이를 중력을 없앤 듯한 상태로 풀고 싶었다. 이런 상황의 굉장히 막연한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나에게는 무언가가 흥얼거리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것들이 또 포개지며 〈Humming Facades〉가 나왔다.
모두 조각가인 세 가족 구성원이 각자 다른 조형언어의 돌 작업을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오랜 기간 작업을 해온 분들이기 때문에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는 게 큰 힘이 된다. 웨스에서 회화작가 박민하, 안무가 이양희와 전시 «살 돌 기름»에 선보일 작업을 하는 중인데 충남 보령에서 온 오석으로 기호를 만들어보고 있다. 끊임없이 문제를 푸는데, 풀다 보면 당면한 문제는 안 풀리는 대신 예전에 풀지 못했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과정이 순환하는 삶을 추구한다.
3미터 가까이 되는 회화작품을 옆으로 눕힌 채 포즈를 취한 남진우 작가.
남진우 Jinu Nam
신사동 번화가 한가운데 자리한 빌딩 2층. 쓰임을 다한 갤러리 공간을 용도 변경한 남진우 작가의 작업실엔 9월 말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리는 «낭만주의자의 신비극»에서 선보일 완성작들이 신묘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홍익대학교 회화과 시절 ‘오징어만 그리는 선배’로 유명했다고 들었다. 진짜인가?(웃음)
주로 연필과 볼펜으로 오징어 몸통의 패턴까지 정교하게 묘사하며 ‘진짜’ 오징어만 그렸다. (이유는 무엇인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TV에서 오징어가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그 시각적 황홀함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한편 다른 아이들처럼 〈마징가 Z〉 〈메칸더 V〉 〈로보트 태권V〉 같은 만화를 즐겨 봤는데, 거기에 나오는 착한 편과 나쁜 편의 생김새가 확연히 달랐다. 착한 편은 인간이거나 인간에 가까운 생김새를 가지고 있던 반면, 나쁜 편은 연체동물 같은 생김새가 많았다. 친구들은 대부분 착한 편을 응원했지만 갑오징어와 대왕오징어를 너무나 좋아했던 나는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악당들에 훨씬 매력을 느꼈다. 그런 나의 취향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꼈다. 부모님의 직업으로 외국에서 2년마다 다른 나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생활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다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엄격한 집단생활 속에서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고 그 과정에서 대왕오징어와 만화 속 악당이 뒤섞인, 나만의 대왕오징어 캐릭터가 탄생했다. 대왕오징어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욕망에 의해 탄생한 얼터 에고이자 나를 보호해주는 수호자이며 내 작업의 주인공이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젊은모색»에서는 대왕오징어가 살아가는 세상을 〈두 괴물에 대한 서사시〉라는 제목에 맞게 장엄하게 부려놓았다면 일 년여 뒤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끔찍하고 아름다운»에서는 ‘영웅’에 집중했다. 두 ‘괴물’, 대왕오징어와 영웅은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가?
대왕오징어가 나를 은유하는 존재라면 영웅은 나를 고독하게 했던 다수, 혹은 집단을 상징한다. 이 두 ‘괴물’을 통해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려는 세상의 부정의함을 들춰 보이고자 한다. 대왕오징어가 이 세상에 의해 괴물로 내몰린 존재라면 영웅은 자신을 떠받드는 세상에 의해 스스로 괴물이 된 존재다.
2021년 12월 15일부터 2022년 1월 14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열린 개인전 «끔찍하고 아름다운»에서 선보인 삼단 제단화. 사진/ 조준용
마치 마블 시리즈처럼 서사의 확장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혹시 앞으로 다른 존재도 등장하는 건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풀 스토리의 몇 %에 해당하나?
현재까지는 두 존재가 주인공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새로운 존재들도 등장할 예정이다. 사실 마블보다는 DC코믹스를 좋아하는데, 내 작품 속 서사는 네버엔딩 스토리에 가까워 지금으로선 풀 스토리의 규모나 길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끔찍하고 아름다운»에서 삼단 제단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에덴으로의 길〉,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라〉 같은 제목에서부터 기독교적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중세유럽에서 이니셜과 세밀화 등의 장식을 넣어 제작했던 채식필사본도 떠오르는데, 기독교적 미학에 영향을 받았나?
사실 종교적인 미학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내 작업에는 다채로운 종교와 신화의 영향이 섞여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게 기독교적 양식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렸는데 어느 날 완성작을 보면서 불교 회화 같다고 느낄 때도, 힌두교의 신이 떠오를 때도 있다. 아무래도 그건 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압도감을 느끼길 원하기 때문인 것 같다. 휴먼 스케일보다 다소 높게 걸려 올려다보게 하는 성당 그림이나 바그너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신화와 민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밝고 화려한 로코코 양식 등을 관심 있게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즘 애니메이션 작업에 열중하느라 새벽에 작업실에 나온다고 들었다.
독학으로 회화작업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있다. 정말이지 2D보다 더한 노동집약적 방식이라서 단 몇 초를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릴 만큼 고되지만 에덴으로 향하는 대왕오징어의 여정을 2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할 생각에 설렌다. 오는 12월 즈음 개포동에 있는 전시 공간 오시선에서 선보일 계획이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이다. 작품이 경쟁적으로 소장되고 메가 갤러리가 속속 서울에 지점을 열고 아트 페어가 북적이는 가운데 고요하고 치열한 혁신과 성장이 일어나는 장소를 방문하는 즐거움으로 흠모하는 작가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