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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싸이월드 어디까지 해봤니?

한때를 풍미했던 시대가 이제 곧 다시 돌아온다. 그때 그 시절 싸이월드에 얽힌 단상.

BYBAZAAR2021.07.14
 

인터넷 클러빙

 
내 인생에는 두 가지의 클럽이 있다. 전자음악에 밤을 새워 춤추던 클럽과 싸이월드 클럽. 싸이월드의 전자음악 클럽 친구들과 홍대 앞의 클럽(Club)에서 2000년대를 보냈다. 이 친구들은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에 앞서 천리안 전자음악 동호회(Tech N****)에서 만났으나 PC통신의 시대가 막을 내리며 프리챌 등을 떠돌다 싸이월드에 마지막 둥지를 틀게 되었던 것. 이 클럽에서 만난 친구 중 둘과는 2000년대 초반 클럽의 본고장인 런던으로 떠나 반년 동안 끊임없이 클럽만 다녔으니 과연 온라인과 오프라인 생활 모두가 클럽뿐이었던 셈이다. 언젠가부터 어디든 엉덩이 붙이고 앉아 술만 진탕 마시는 정적인 모임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가끔 우리가 클럽(Club)과 클럽으로 만났다는 것을 떠올리면 모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 고향 친구의 학교 친구가 B로 시작하는 이름의 싸이월드 클럽을 만들었다. 건너 건너 친구들끼리 좋아하는 이미지나 일상 사진, 취향의 글과 음악 등을 올리며 서로의 이름이 익숙해졌다. 처음 가입했을 때 40명 남짓하던 그 클럽이 시간이 가면서 예상보다 훨씬 커졌고 자주 사진을 올리던 회원들이 각자의 게시판을 가지게 되었다. 게시판 이름은 닉네임이거나 홈페이지 이름이거나 했으며 그 단어로 서로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와 교류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몇몇은 일촌을 맺고 오가며 인사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두 명과는 AMQ라는 팀명으로 10년째 사진 전시회를 같이 하고 있다. 어느 날 이강혁이 나와 이윤호에게 같이 무언가 하자는 제안을 했고 마침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지내던 때라 바로 제안에 응했다. 가끔 인터뷰에서 세 명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게 되면 우리는 웃으며 싸이월드 클럽을 이야기한다. 여튼 정모와 번개를 그리워하는 내가 떠올리는 것이 PC통신 동호회인지, 다음 카페인지, 싸이월드 클럽인지 조금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실은 낯을 많이 가렸던 내가 왜 그렇게 많은 모임(?)에 참여를 했을까 생각해본다. 요즘의 SNS도 충분히 재미있긴 하지만 평소에 북적거리는 클럽을 눈팅하기만 해도, 그리고 막상 정모에 나가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 분위기가 그립다. 또, 그땐 실제로 알게 되거나 만나지 않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10여 년 뒤에 인사를 나누며 그때 그 닉네임으로 활동한 사람이 결국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해준 싸이월드 클럽을 그리워하며, 최근 싸이월드 재개장 뉴스레터를 신청해버린 것은 ‘안 비밀’. 
글/ 이차령(사진가)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슬픔’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할까? 언제나 궁금했다. 중학교 2학년, 처음 이별을 겪었을 때 〈늑대의 유혹〉을 읽었다. “너밖에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널 사랑하다 보니 너밖에 없더라.”는 충격적인 대사를 읽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때 나의 슬픔이 가진 형체는 시적인 은유나 깊은 통찰로 짐작할 수 없는, 아주 동그랗고 말랑한 것이어서 가슴 미어지는 절절한 멜로디와 소름 끼치게 유치한 ‘인소(인터넷소설)’ 명대사만이 그 슬픔의 실체를 알고 위로할 수 있었다.
 
싸이월드는 이 모든 슬픔들이 모여 있는 아카이브였다. “난 가끔 눈물을 흘린다. 가끔은 눈물을 참을 수 없는 내가 별루다.” 가수 채연이 ‘눈물 셀카’와 함께 올린 이 글은 그 시절 ‘싸이 감성’의 1막 1장으로 통한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채연을 놀리고 싶을 때 사용하는 일종의 ‘치트키’ 같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나는 이렇게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자기 연민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은 세상에 다신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래서 〈피식대학〉의 ‘05학번 이즈백’이 싫었다. ‘내 여린 감성이 잠든 과거를 이렇게 우습게 그려내다니!’ 시대의 촌스러움과 우스꽝스러움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것 같아 불쾌했다. 계속되던 묘한 거부감은 이상하게도 ‘쿨케이’를 연상시키는 ‘쿨제이’를 보면서 조금씩 누그러졌다. 레이밴 선글라스, 망고 나시, 스컬 비니, 본더치 볼캡, 아베크롬비 티셔츠, 카고바지, 아디다스 저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수염…. 그들이 재현한 패션을 보며 쿠보즈카 요스케, 배정남, 류승범, 조시 하트넷 같은 당대의 워너비들이 떠올랐고, 특유의 ‘쿨한 형님’ 정서가 만든 패거리 문화까지 연상되자 트라우마에 가까운 웃음이 쉴 새 없이 흘렀다. 〈피식대학〉이 감히 오리지낼러티 근처에도 가지 못한 영역도 있다. ‘허세’로 ‘싸이 감성’ 분야의 고전이 된 장근석의 싸이월드다. 그가 남긴 “뉴욕 헤럴드 트리뷴!” “두통. 내가 머리가 아픈 건 남들보다 열정적이라서 그런 건가?” “나도 몰랐던 내 안에 순수한 열정” 같은 수많은 명문들…. 젊은 한류스타가 유명세를 얻으며 느끼는 싱숭생숭한 심경의 변화 같은 것이 투명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션 레논의 ‘Parachute’는 서정희의 싸이월드 주크박스에서, 트뤼포의 〈쥴 앤 짐〉은 윤진서의 사진첩에서, 자음과 모음을 띄어 문장에 나른한 ‘bar’를 만드는 것은 전도연의 다이어리에서 알았다. 10대 때 알게 된 노래와 영화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는데 나는 대부분 싸이월드를 통해 알았으니 내 정서의 토대는 ‘싸이 감성’이라고 봐야겠다. 추억을 팔 듯 늘어놓은 이야기의 끝에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착이 아니다. 슬픔을 형상화하고 불안과 고독을 그려내는 타인의 표현에 그때만큼 관대해져야 한다는 경각심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사람은 누구나 가끔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글/ 복길(자유기고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촌평 많은 친구가 부러웠다. 그렇다고 일촌평이 올라오는 족족 지우고 파도타기를 못하게 일촌을 숨길 정도로 ‘쿨’하진 못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무렵 나는 스무 살이었다. 힙합을 좋아하지만 랩 동아리는 가입하기 싫은, 거리 응원은 궁금하지만 시청은 별로인, 묘하게 질풍노도인 신입생이었다. 노란 염색에 하얀 블리치, 농구공만 한 포일펌, 뒷골이 당겨 당일 풀어버린 콘로, 두 줄 스크래치를 낸 삭발을 오고 간 머리 모양을 떠올리면 그때는 어떻게든 다르고 싶었던 것 같다.
 
세이클럽에서 윈앰프 음악방송을 하며 쓰던 제시(Jesse)라는 별명을 지금도 쓴다.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니미 말풍선도 ‘Jesse’s Room’ 정도였던 듯하다. 어쨌든 그 미니미가 살던 미니룸엔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로 미니룸 꾸미기는 그 정도에서 그만두고, 도토리로 BGM을 샀다. 상당히 비장한 목적을 가지고. 그러니까, 〈논스톱〉 양동근 머리에 턱수염은 길렀는데 랩 동아리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 방송국 라디오 PD를 지망했다가 월드컵 기간 동안 거리응원은커녕 꼼짝없이 교내에 월드컵 방송만 송출한. 동시에 인터넷 사이버 방송인으로 음악에 진지하던 나는 싸이월드 BGM이라는 신세계에 목숨까진 아니라도 꽤 큰 자아를 집어넣었다.
 
비 오는 날엔 빛과 소금의 ‘그대 떠난 후’를 걸었다. 첫 소절부터 “온종일 비가 온 날은”이라 부르니 더욱 효과적이었다. 시작부터 빗소리가 쏟아지는 SWV의 ‘Rain’나 브룩 벤튼의 ‘Rainy Night in Georgia’도 종종. SWV의 것과 동명의 유명 가요는 노래방 선곡 번호까지 외우면서 모른 척 외면했다. 김현식이라면 ‘비처럼 음악처럼’보다 ‘눈 내리던 겨울밤’이 더 멋지다 여겼다. 9월엔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의 ‘September’ 대신 크리스 리어의 ‘September Blue’가 먼저였다. 크리스마스는 각축의 장, 가장 우위를 점한 건 도니 해서웨이의 ‘This Christmas’였다.
BGM을 바꾸고 나면 다이어리에 이야기를 썼다. 대부분 감정을 드러내는 일기였다. 새로 올린 인스타그램 피드가 눈에 잘 띄듯, 새 소식 알람 기능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일촌들이 그걸 읽으며 성의껏 고른 BGM이 더 잘 들렸으면 했다. 그 맘이 제일 컸다. ‘좋아요’는 없지만, 하루 방문자 수 지표는 팽창한 자아를 안심시킬 수 있는 즉각적 해결방법이었다. 그렇게 20대 초·중반을 싸이월드 BGM과 보냈다. 
글/ 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 DJ) 
 

내가 그의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일촌이 되었다

 
한물간? 촌스러운? 오그라드는? 싸이월드는 어떤 측면에서 봐도 세련됐다고 말하긴 힘든 플랫폼이다. ‘왕년에 싸이 좀 했었노라’ 고백하며 첫 책을 쓰는 데는 그래서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싸이에 진심이었던 여자’란 건 어딘지 자폭 느낌이었다. 서울깍쟁이인 척은 다 하고 나서 “이것 좀 ‘데파’(데워) 줄래요(↗)?”란 한마디로 근본을 들켜버린 것 같은 기분. 눈물 셀카, 허세 글이란 싸이 감성의 프레임에 나까지 도매급으로 묶여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 하지만 싸이월드가 망했다는 소식이 포털 뉴스를 도배할 때마다 쏟아지는 한탄, 아쉬움, 격앙의 댓글을 보면서 녹이 슬고 잡초가 무성해진 ‘쇠락한 놀이공원’ 같은 이 세계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는 걸 절감했다. 실은 나 역시 그랬다. 싸이월드는 불안과 수면장애로 몸서리치던 내 젊음의 밤을 위로하던 도피처였다. 쌈짓돈을 털어 도토리를 구매했고, 좋아하는 배경음악(BGM)을 샀다. 
 
공강 시간이면 과실에서 맥주로 소주 안주 하며 궁상맞게 시간을 때우던 그 시절, 5백원 주고 샀던 BGM으로 누리는 감성적 호사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값어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싸이월드에는 요즘 SNS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차(時差)’가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내 공간에 들어오는 수고를 해야만 새로운 게시물을 볼 수 있었다. 일방적으로 타인의 피드를 실시간으로 점령해버리는 무법자 같은 일은 불가능했다. 돌이켜보니 도토리란 가상화폐까지 있었던 이 플랫폼은 정말로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에 진심이었다. 요컨대, 싸이월드에 대한 책을 쓰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2000년대 초반을 풍미하다 사라진 한물간 플랫폼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때 우리가 누렸던 무형의 세계와 아직도 여진을 떨치고 있는 정서적 유산, 그리고 그 시절 진심에 대한 어떤 이야기였다. 싸이월드 기사마다 달렸던 수많은 댓글에서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이 실은 싸이월드가 아니라 이제는 멀어진 그곳의 그리운 이름들이었던 것처럼. 가장 젊고 예뻤던 우리의 한 시절과 그때 우리를 불러 세웠던 다정한 목소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글/ 박선희(〈아무튼 싸이월드〉 저자) 
 

ㄱ나니..? 너와 나의 세상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자기 전까지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카카오톡, 인스타그램부터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와 메일링 뉴스레터. 온갖 SNS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작가로 살기 위한 홍보의 창구이기도 하지만, 사생활을 드러내며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SNS는 다양한 방식으로 깊고 진득하게 삶에 달라붙어 있다.
 
언제부터 세상과 사람과의 소통에 SNS를 사용해온 걸까. 시작은 싸이월드였다. 20대 후반에서 40대라면 싸이월드라는 단어만으로도 깔깔 웃으며 자신의 흑역사를 떠올린다. 만약 지금의 내가 싸이월드를 한다면 어떨까? 미니룸에 흰색 벽지를 바르고 도토리로 식물을 두어 개 산 뒤, 책상 위에 커피잔을 옆에 두고 파자마를 입은 채 글을 쓰는 미니미를 만들까? 작가님들과 일촌을 맺고 독자분들은 내 그림에 “퍼가요~(하트)”라는 댓글을 달아주셨을까? 싸이월드는 나의 정체성을 가상의 세계로 표출하는 첫 번째 창구였다. 아바타를 만들고 취향과 기분에 따라 배경음악을 설정하며 일기를 쓰고 사진을 올렸다. 오직 나만이 아는 두서없고 오글거리는 것들이었음을, 지금 창작자로 살고 있는 나도 별반 다를 바 없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그럴듯한 일부분을 전시하며 타인과 교류하는 즐거움은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이어지는 만남의 첫 시도 또한 싸이월드였다. 한 클럽에 올린 그림을 보고 디자이너 분의 작업실에 초대받기도 했고, 대학 동기와 비밀 안부 글을 주고받다 연애도 했으며, 필름사진 동호회의 사람들과 출사를 가기도 했다. 20살 서울에 혼자 올라와 막막하던 나의 좁은 인간관계는 싸이월드를 통해 점점 넓어졌다. 그때 만난 사람들은 서로의 나이와 직업, 커리어 등에 개의치 않았고 취향과 관심사만을 공유하며 심플하게 가까워졌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함께 사진을 찍던 언니 오빠들은 엄마 아빠가 되었으며 방황하는 휴학생이던 나는 어느새 책 5권을 낸 작가로 살고 있다.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던 예술적 영감을 공유해준 이들의 이름을 자주 SNS에서 발견한다. 유명 연예인의 아트 디렉터와 영상감독,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와 브랜드 대표 등, 그들의 과거를 살짝 들여다보았던 이상한 친근감에 애정과 응원을 보내게 된다. 그들의 성장과 함께 나 또한 그 시절과 지금의 나를 겹쳐보며.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되고 새로운 배움과 경험들을 쌓아나가는 것에 있어 SNS의 역할은 꽤 크다. 올해의 이슈였던 오디오 소셜 플랫폼 클럽하우스와 카카오 음(mm)에도 발 빠르게 들어가보았다. 조금은 벅찰 만큼 빠르게 많은 것이 쏟아지는 것 같아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든다. 이제는 무슨 일이 생길지 감히 예측조차 할 수 없다. SNS 는 더 이상 가상의 세상이 아니다. 모든 곳에 깊게 스며들어 교류하는 연결고리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떤 그릇에 어떤 형질로 담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싸이월드에 남겼던 내 모습을 흑역사가 아닌 추억으로 기억하고, 지금 또한 나와 우리를 돌아보게 할 미래의 기록이기를 바라기에. 
글/ 봉현(작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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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박의령
  • 일러스트/ 선우훈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