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전환점은 팡파레를 울리지 않고 온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말했다 “전환점은 종종 멘토나 동료의 인정도 팡파르도 없이 그냥 온다”고.

BYBAZAAR2021.05.13
 
 
가즈오 이시구로를 좋아하는 작가로 꼽지는 않는다. 책의 디자인이 맘에 든다는 이유로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사 모으던 시절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을 챙겼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에 대한 기대를 더해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을 보기도 했지만,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다음부터는 못난 반발심(서점의 모든 매대에 그의 책이 쌓여 있었다)으로 그의 이름을 멀리했다. 시간은 텀벙텀벙 지나 그의 새 책 〈클라라와 태양〉이 나왔다. ‘노벨 문학상 이후 처음으로 발표하는’이라는 솔깃한 문구를 뒤로하고 함께 나온 작은 책을 집었다. 정작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은 대놓고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집’이었다. 그러나 작가 소개와 연보 등 차 떼고 포 떼면 50페이지 남짓한 책이 나의 온 마음을 흔들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20대 시절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한다. 일본인의 이목구비에 장발, 노상강도 같은 콧수염을 기르고 영국 남부 억양을 쓰는 청년은 별 볼일 없는 다락방에서 별 볼일 없이 글을 쓴다. 시점은 더 먼 곳, 그가 가족과 영국에 당도한 때로 돌아간다. 1960년 런던에서 남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서리주 길퍼드에 도착한 다섯 살의 어린아이. 어쩌면 그 땅에 처음 섰을지도 모르는 동양인인 그는 어딜 가도 눈길을 끌었다. 일본에 남은 할아버지가 보내주는 일본어 교과서로 모국의 언어를 잊지 않으면서도 정작 수십 년을 일본에 가지 않았다. 그런 그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방향을 튼다. 어느 날 밤, 새롭고 다급하며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자신이 태어난 나가사키에 대한 글을 썼다. 특별한 사건도 영적인 부름도 없던 이 짧은 나날은 그의 세상을 바꿔놓는다.
 
ⓒJeff Cottenden

ⓒJeff Cottenden

 
“그 몇 달은 나에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 이후 나는 종종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렇게 자문하곤 했습니다. 그때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특별한 에너지는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내 결론은, 삶의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긴급하게 행동에 나선 게 무언가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영국 소년들처럼 밥 딜런에 심취하던 청년이 문학을 배우고 어떤 전환점을 맞아 작가로서 성취를 이루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순수한 기쁨과 따뜻함. 종종 사소하고 추레해 보이는 순간들도 조용하고 은밀한 계시의 섬광일 수 있으며 그 순간을 그대로 인식하고 지속해야만 한다는 대작가의 전언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만 유효하진 않을 것이다.  자기계발서도 아닌데 이 손바닥만 한 책을 근사한 상의(안쪽에 포켓북을 넣는 주머니가 달린) 속에 넣어 두고 수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만나 얘기해주고 싶다고도. 45분 동안의 수상 연설문을 책으로 펴낸 것을 아는데도 나는 45분 동안 행복한 오독을 했다.
 
자기계발서도 아닌데 이 손바닥만 한 책을 근사한 상의(안쪽에 포켓북을 넣는 주머니가 달린) 속에 넣어 두고 수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만나 얘기해주고 싶다고도. 45분 동안의 수상 연설문을 책으로 펴낸 것을 아는데도 나는 45분 동안 행복한 오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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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박의령
  • 사진/ 민음사 제공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