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술꾼의 해장법

바로 지금 그 무엇보다 절실한 기술.

BYBAZAAR2019.12.25
 

수분과 플라시보

나는 술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한 잔 입에 대면 일찍 집에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술 약속을 자주 만드는 편도 아니다. 대신 갑작스레 술을 마시게 되는 상황을 즐긴다. 그럴 때는 술이 넉넉해야 한다. 대개 내 사무실 겸 작업실에 방문한 친구나 지인들과 술자리를 시작하게 되고, 모두가 같은 술을 마시진 않기 때문에. 위스키 2~3종류, 샴페인 한 박스는 항상 발주해 가지고 있다. 소주와 맥주는 한 짝 단위로 오니 따로 발주는 안 하고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편의점에서 산다.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 식당을 운영 중이면서 부러 일반음식점 허가를 받아 주류면허를 취득한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주로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마시거나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거의 먹지 않는다.
다만 손님들에게 음식을 내어주는 건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무실 겸 작업실로 쓰는 공간은 벽 하나를 두고 주방과 마주하고 있는 단순한 구조라 영업이 끝난 후에 안주를 만들기 어렵지 않다. 친구들도 처음엔 다들 왜 고생을 하냐며 시켜 먹자고, 사다가 먹자고 하지만 술이 두어 잔씩 돌고 나면 하나같이 “뭐 없냐”부터 시작해서 진짜 간단해도 된다며 음식을 만들길 바란다. 그래서 ‘급술’자리용 안줏거리를 항상 준비한다. 매일 제면하니 면 요리를 자주 하는 편이고, 꼭 챙겨두는 것은 매운 소스다. 요리를 그만하고 술을 더 즐기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 손님들에게 매운 것을 잔뜩 먹이는 거다. 그러면 많이 못 마시니까.
숙취가 거의 없지만 어쩌다 무거운 숙취를 겪을 때가 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되는데, 섞어 마시거나, 빨리 마시거나. 나는 기름진 안주를 먹었을 때도 숙취가 심하다. 그럴 때면 지난밤의 과음을 반성할 새도 없이 현재의 생존을 위해 숙취해소를 해야 한다. 3단계를 거친다. 첫째, 물을 잔뜩 마신다. 얼마나 마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갈증을 느낄 새 없이 계속 마신다. 그리고 과학적, 의학적 근거는 부족하지만 비타민제를 고용량으로 복용한다. 이건 플라시보 효과로 도움을 받는다 여긴다. 둘째, 화장실을 간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배출을 해야 한다. 배출을 하면 숙취가 확연히 다른 단계에 이른다. 확실히 편해진다. 셋째, 음식을 먹는다. 매운 것이나 국물 음식이 확실히 ‘해장’을 한다는 느낌을 주지만 잠시뿐이다. 난 몸에 부담이 적은 것을 먹는다. 가령 김밥을 조금 먹는다든지. 그러면 바로 두 번째 사이클로 도돌이표. 화장실을 간다. 그리고 다시 물을 마신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숙취해소법은 일을 하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임무가 있으면 숙취를 겪을 겨를도 없다. 조리사들 사이에선 이 방법으로 (강제적으로) 숙취를 푸는 사람이 꽤 있다. 오븐 앞에 있으면 술이 깰 수 밖에 없다.
글/ 정창욱 (‘금산제면소’ 셰프)
 

 

피자와 양장피와 오렌지주스

술에 취해 자면 옆으로 누워도 뒤집어 누워도 도통 잠을 잘 수 없는 ‘새벽 숙취’에 자주 시달리는 편이다. 악몽을 꾼 것 같은 더러운 기분, 허리 아래 자갈이 박힌 듯 불편한 자세, 울렁거리는 위장, 뇌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머리통,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귀갓길에 무슨 사고를 쳤을 것만 같은 찝찝한 여운이 마구 뒤엉켜 새벽 5시쯤에 눈이 떠지면 딱 한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오렌지주스! 직접 짠 주스가 아니라, 차갑고 새콤하고 벌컥벌컥 마시기 좋은 시판 오렌지주스 두세 잔이 한 줄기 빛보다 더 간절해지는 순간이 온다. 생수는 비린 맛이 너무 많이 느껴져 괴롭고 콜라나 사이다와 같은 탄산음료는 더는 느끼고 싶지 않은 내 위장 속 무엇을 끄집어내는 효과 때문에 싫어한다. 오렌지주스의 달고 신맛이야말로 갈증과 구토를 동시에 해결해주는 만병통치약이다. 이때는 플라스틱 페트병을 통째로 들고 마셔줘야 효과가 배가된다. 주로 전날 밤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갈 때 아파트 상가 슈퍼마켓에서 ‘아침에 주스’ 950ml짜리를 사는데, 이걸 한 손으로 잡고 들이부어야 숙취는 물론이고 숙취의 기분도 함께 떨쳐버릴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신맛’이 나는 해장법에 강력한 반감을 던졌다. 신물이 올라오는 와중에 신맛을 다시 또 느끼고 싶냐는 논리다. 산성화된 위장에 산을 꼭 들이부어야 속이 시원하냐는 뜻이다. 하지만 육개장이나 짬뽕 같은 뜨끈하고 매운 국물을 마시면 콧물을 마구 흘리는 ‘미각성 비염’ 체질이라 보통 사람들의 해장법이 나에게는 제대로 통한 적이 없었다. 속이 풀리는 게 아니라 코가 풀리면서 오히려 정신이 더 몽롱해지는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숙취 때문에 몸과 정신이 둔해져 있으니 뭇국이나 복지리 같은 밍숭맹숭한 국물로는 미각이 “어우, 개운하다” 느끼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정통성 있는 해장 음식으로는 도통 숙취를 타파해본 적이 없다.
술 마시는 일에 에너지를 한창 쏟아부을 때에는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아예 나만의 숙취해소 음식을 먹고 들어가기도 했다. 동대문에 있는 중국 식당 ‘동북화과왕’의 오이양장피무침을 경험한 뒤로 오이를 잔뜩 넣은 양장피가 어마어마한 숙취해소 효과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 위로 미스트를 뿌린 것같이 촉촉해지는 맛과 상큼하게 터지는 겨자소스의 자극이 술을 확 깨우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장피를 먹다 다시 술을 시작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이 숙취해소 방법도 빛을 잃게 되었지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오렌지주스로 급한 불을 끈 뒤 창문 너머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슬슬 배가 고파진다. 냉장고에 엄마가 만들어준 온갖 반찬이 넘쳐나도 이날만큼은 배달 음식을 시킨다. 처음엔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음식을 고르다 피자를 시켰는데, 계속 먹다 보니 이 묵직한 음식이야말로 숙취와 싸울 힘을 주는 적합한 음식이라는 걸 발견했다. 기분 탓이겠지만, 숙취로 고생할 때에는 고구마 무스가 올라간 피자를 시킨다. 부드러운 치즈와 포근한 무스가 내 속의 많은 것을 밀어내주는 느낌이랄까? 피자를 먹고 나면 그제야 정신이 들고(화장실을 다녀오고) 비로소 깨닫는다. 하늘 아래 우아한 숙취해소란 없다.
글/ 손기은(바 ‘라꾸쁘’ 대표) 

Keyword

Credit

  • 에디터/ 박의령
  • 사진/ Getty Images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