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꿈꾸는 것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그녀는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곧장 작업에 돌입한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6.10.02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멈추지 않는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쉬지 않고 작업한다. 여든을 바라보는 이 예술가는 지금 어느 때보다 주목받고 있다.


여성의 힘 지난 4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 «Balkan Erotic Epic»가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열렸다. <Balkan Erotic Epic> 시리즈의 <Women Massaging Breasts I>(2005).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예술을 위해 많은 것을 견뎌냈다. 퍼포먼스 아트의 선구자인 그녀는 얼음 덩어리 위에 누웠고, 타오르는 별들 한가운데 서 있었으며, 피가 나도록 몸을 긁고, 심장에 화살을 겨눴다. 대표작인 <The Artist Is Present>를 선보일 당시, 수천 명이 아브라모비치의 맞은편에 앉기 위해 줄을 서는 동안 그녀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736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은 건강 문제다. 현재 그녀는 고혈압 관리를 위해 병원을 오가고 있다. 비행기도 탈 수 없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작업 활동을 이어온 그녀에게는 낯선 상황이다. 현재 그녀는 신작 <Balkan Erotic Epic>으로 투어를 진행 중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구성은 대담하다. 전시, 무대,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까지, 총 세 가지 버전이 있다. 납득이 간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여성의 힘, 에로틱한 의식, 영적 에너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예술가니까. 그녀는 고향인 발칸 반도의 민속 신화에서 이들의 기원을 찾고, 오늘날 그것이 갖는 의미를 다룬다. 우리는 뉴욕에서 화상 통화로 만났다. 모니터 너머의 그녀는 분주하면서도 집중하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게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


<Balkan Erotic Epic>의 무대 버전에서 공연 중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시간을 정확히 맞춰 오셨네요. 좋습니다. 시작하시죠!

하퍼스 바자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고혈압 때문에 고생을 좀 하고 있어요. 몸에다 이 모니터를 차고 있어야 하거든요. (상의 목 부분을 내려 측정 장치를 보여준다.) 여든 가까운 나이가 되면 많은 일이 생기죠.

하퍼스 바자 사실 저는 당신이 다가오는 11월 80세가 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저도 그래요. 처음엔 인공관절 수술을 받은 무릎이 문제였는데, 지금은 고혈압으로 애를 먹고 있어요. 전 20~30대의 속도로 일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인데, 이제는 속도를 좀 줄여야 해요.

하퍼스 바자 그런데도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많으시잖아요. 4월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에서 «Balkan Erotic Epic» 전시가 열렸고, 오는 10월에는 베를린 페스트슈필레(Berliner Festspiele)에서 같은 전시의 무대 버전을 선보입니다. 그 사이에는 비엔나 비엔날레 개막과 맞물려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cademia)에서 전시 «Transforming Energy»를 선보이고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독일 루르에서 열리는 예술 축제 루르트리엔날레(Ruhrtriennale)도 빼놓을 수 없죠. 오는 9월, 그곳에서 <Balkan Erotic Epic>의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뉴욕에서 열릴 이 작품의 미국 초연도 준비 중이에요. 로마의 한 미술관을 위한 작업도 있고요. 일이 계속 밀려드네요. 제 생각에는 80세 생일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뒤에는 새로운 일정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난해 제 휴가는 딱 나흘이었어요. 나흘이라니! 그 사이 깨달은 게 있다면, 오프닝 행사는 줌으로 참석해도 된다는 겁니다. 기자회견, 만찬,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건 줄여야만 해요. 현실이 그렇습니다. 제가 젊어 보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말이죠.

하퍼스 바자 엄청난 작업량도 그렇지만, 여전히 발휘되는 당신의 창의성이 놀랍습니다. 당신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작업 그 자체죠. 제가 평생 바라온 제 전부입니다. 예술, 예술, 예술! 지금 저는 돌아다니며 여행할 수가 없잖아요. 가만히 멈춰 생각하다 보니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하더군요. 오늘 당장 일을 그만둔다 해도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걸요. 하지만 저는 그만두는 것이 두렵습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게 제 일상이니까요.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릅니다. <Balkan Erotic Epic>을 예로 들어보죠. 보통 제 나이쯤 되면 자기 복제에 빠지기 쉬운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저는 제 작업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장시간 지속되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공연자와 무용수들을 한데 모으는 식이죠. 저는 이 작품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제 사고방식이 이렇게 깨어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하퍼스 바자 오랫동안 당신의 몸과 그 몸이 가진 고통을 견디는 힘이 작업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이 된 이후 작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셨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몸은 몸일 뿐입니다. <The Artist Is Present>를 작업할 때도 이미 예순다섯 살이었어요. 제가 했던 일 중 손에 꼽히게 힘든 작업이었지만, 더 어렸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렸다면 에너지야 더 넘쳤겠지만, 그걸 끝까지 버텨낼 집중력과 의지력, 그리고 지혜가 부족했겠지요. 때로는 나이가 필요한 법입니다. <7 Deaths of Maria Callas>를 할 때도 안무, 연출, 퍼포먼스까지 전부 다 해냈습니다. 일흔 중반의 나이에 말이죠. <Balkan Erotic Epic>에도 제가 직접 참여합니다.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는 13개의 모든 장면을 다 감상하려면 4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하퍼스 바자 왜 당신의 작품은 그렇게 길어야 하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퍼포머로서 저에게 중요한 건 마음의 상태입니다. 10분이든 1시간이든 무언가를 할 때는 역할을 연기할 수 있죠. 그런 척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긴 호흡의 작품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오직 나 자신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관객에게 스스로를 완벽히 열어 보이게 되는 것이죠. 관객 역시 당신을 향해 마음을 완전히 열게 되고요. 바로 이러한 취약성에서 마법 같은 연결이 일어납니다. 원리는 이렇습니다. 저에게 여러분의 시간을 주시면, 저는 여러분에게 경험을 선사하는 거예요.


작업은 제가 평생 바라온 제 전부예요. 예술, 예술, 예술! 이미 많은 것을 이루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만두는 것은 두려워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바로 작업을 시작하는 게 제 일상이니까요. 오늘도 저에겐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떠오릅니다.


하퍼스 바자 <Balkan Erotic Epic>에 대해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몸속의 모든 에너지는 성적 에너지입니다. 우리는 이를 창의성과 영적인 영역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고, 폭력과 전쟁, 분노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 에너지’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생식 본능의 에너지, 생명의 에너지죠.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입니다. 저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성적 에너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발칸 반도의 민속 문화에서 생식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질과 남근을 이용한 의식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온갖 용도로 사용되었죠.

하퍼스 바자 당신은 왜 지금 이런 주제를 흥미롭다고 느꼈을까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저는 오늘날 우리가 신체를 잘못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학, 아름다운 기준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죠. 이러한 관점을 바꿀 때 비로소 여성적 성의 힘을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보여주는 나체는 포르노그래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쟁과 고통이 만연한 시대에 우리 문화의 뿌리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할까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하퍼스 바자 그로부터 무엇을 발견하셨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성적 에너지를 공격성과 폭력으로 변모하게 만드는 것은 수치심입니다. 수치심은 제가 줄곧 다루고자 했던 주제이기도 해요. 제 삶 속의 수치스러운 순간들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요? 제가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나에게 고통을 주는 무언가를 공유할 때, 누군가에겐 해방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믿어요.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수치심을 품고 있으니까요.

하퍼스 바자 <Balkan Erotic Epic>은 역사적 고찰인 동시에 어머니가 등장하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꼭 등장시켜야만 했던 이유가 있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이 작품을 통해 저는 어머니를 해방시킵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결코 해내지 못했던 일이에요.

하퍼스 바자 조금 더 설명해주신다면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저의 어머니는 성관계는 더러운 것이며 오직 자녀를 낳기 위해서만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24살이 될 때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한 번도 키스를 해준 적이 없으셨고, 다정함을 보여준 적도 없었습니다.

하퍼스 바자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랬죠. 지금도 여전히 그래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일기를 읽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전혀 몰랐어요.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면 제가 약해질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흔다섯 살에 젊은 여자를 만나 떠나갔을 때 너무나 큰 고통을 겪으셨어요. 외로움과 직장 생활,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는 일에 얽매여 사셨죠. 하지만 이제 저는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옷을 벗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성적인 에너지와 부드러움,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죠. 마리아 스타멘코비치 헤란츠(Maria Stamenkovi´c Herranz)는 이 역할에서 정말 놀라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반나체로 춤추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 역시 해방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빛의 존재 지난 5월부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관객 참여형 전시 «Transforming Energy»를 진행 중이다. 미술관 250년 역사상 현존 여성 작가가 여는 최초의 전시다. 10월 19일까지. gallerieaccademia.it


하퍼스 바자 좋은 예술은 행복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고통스러운 일들은 이미 다 겪었으니까요. 저는 유머를 원하고, 삶을 즐기고 싶어요. 오랫동안 불행했거든요. 마지막으로 마음이 괴로웠을 때, <7 Deaths of Maria Callas>를 만들었어요. 그 후로는 행복에 집중하고 싶어졌습니다.

하퍼스 바자 당신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Transforming Energy» 전시를 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여성 작가의 대규모 개인전으로 이 공간을 내어주는 건 미술관 250년 역사상 최초로 있는 일입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에서 회고전을 연 최초의 여성 작가이기도 했죠. 255년 만에 최초였습니다. 가끔은 제가 다른 여성들을 위해 길을 터주는 불도저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하퍼스 바자 스스로 말씀하셨듯 당신의 작업에서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들을 마주할 때, 여성으로서 이뤄낸 성취를 체감하시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건 남성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대부분 곁에서 도와주는 아내가 있어요. 반면 제가 봐온 여성들은 아이를 낳으면 결국 예술을 포기해야만 했죠. 그래서 저는 결코 아이를 원하지 않았어요. 제 재단을 설립했고, 젊은 아티스트들을 가르치며, 퍼포먼스 아트를 주류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렇다고 지난 성취를 세어보지는 않아요. 그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싶어요.

하퍼스 바자 영화감독 파블로 라라인(Pablo Larraín)은 당신의 일생을 작품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당신과 동행해왔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우리는 제가 가장 오래 살았던 세 도시인 뉴욕, 암스테르담, 그리고 베오그라드에서 촬영하고 있습니다.

하퍼스 바자 영화의 일부로 당신의 장례식을 세 번이나 준비하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맞아요. 제 안에 존재하는 세 명의 마리나를 위해서죠. 두려움 없는 전사 마리나, 수도원에 들어가 살고 싶어 하는 영적인 마리나, 그리고 저급한 영화와 패션을 좋아하는 허튼 마리나입니다. 오랫동안 그 모습을 부끄러워했지만, 세 모습 모두 내 안에 살고 있어요.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자, 이제 제 장례식 얘기까지 했네요. 여기서 마무리합시다.

하퍼스 바자 좋습니다. 그럼 우리 긍정적인 생각으로 끝을 맺어보죠. 삶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왜 필요할까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비로소 삶을 주의 깊게 깨어 있는 상태로 쓸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 다정해지고 매 순간을 즐길 수도 있죠.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요.

하퍼스 바자 매일 아침 어제와 같은 창작의 힘을 갖고 눈을 뜰 수 있다면, 앞으로 또 무엇을 이루고 싶나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지금 새로운 프로젝트를 작업하고 있어요. 제작비도 많이 들고 수많은 기관이 얽혀 있어 준비 과정이 꽤 복잡하죠. 완성하기까지 3~4년은 걸릴 겁니다. 그러니 아직은 자세히 밝힐 수 없어요. 엄청난 규모가 될 거라는 사실 외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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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Marlene Sørensen
  • 사진/ 상하이 현대미술관(MAM)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전시 «Transforming Energy» 전경. 사진 제공: Yu Jieyu (2)
  • 어시스턴트/ 신형진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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