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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먹고 자란 롱샴의 78년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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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CHAMP
패션은 유행을 먹고 산다지만, 어떤 브랜드는 시간을 먹고 자란다. 78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 세대가 하나의 이름을 이어 온다는 것. 그건 단순히 브랜드를 지켜낸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증명해낸 것이다. 롱샴이라는 이름 뒤에는 한 가족의 선택과 책임, 그리고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다. 유행이 아닌 유산으로 말하는 롱샴, 그 이야기가 여기서 시작된다.
2026 S/S 르 로조 백.
History in Hand
롱샴의 히스토리는 한 명의 진보적인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1948년, 흔한 파이프 담배 케이스를 가죽으로 감싸며 제품의 위상을 바꾼 장 카세그랑은 쇼핑이 단순한 소비가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임을 이해한 최초의 비전가였다. 그로부터 시작된 78년 여정을 되짚어본다.
#파이프에서 시작된 혁명
1948년 2월, 전쟁의 잔해가 아직 파리 거리에 남아 있던 시절. 장 카세그랑(Jean Cassegrain)은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하게 될지 예견했다. ‘갈색 황금’이라 부를 만큼 담배가 귀했던 그 시대, 그의 담배 가게 ‘오 술탄(Au Sultan)’은 연합군 병사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장 카세그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병사들이 떠나면 사업도 끝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파이프에 가죽을 입혔다. 단순한 흡연 도구를 파리 최고의 장인들이 다루는 가죽으로 감싸면서, 그는 제품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말안장을 만드는 기술을 파이프에 적용하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조차 이 가죽 파이프를 소유했다고 전해진다. 일상의 소비품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나아가 정체성의 표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제품 개발이 아니었다. 전후 파리에서 일어난 문화적 혁명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생존을 넘어 ‘더 나은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쇼핑은 더 이상 필요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표현하는 선택이 되었다. 장 카세그랑은 바로 이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치를 구매한다는 것을 이해한 최초의 비전가 중 한 명이었다.
부모가 1926년에 세운 고급 담배 가게를 물려받은 장 카세그랑은 파리 그랑 불바르 중심부에서 해방군들에게 담뱃대를 팔며 사업을 키워나갔다. 당시 “유럽에 있던 미군 중 이 파이프를 갖지 않은 이는 없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용 파이프 ‘더 레이디’까지 출시했고, 마를렌 디트리히가 시가렛 홀더를 든 광고 이미지는 롱샴을 여성 고객에게까지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1948년 2월 1일, 그는 공식적으로 롱샴을 설립했다. 친척이 이미 가족 이름 ‘카세그랑’을 제지 사업에 사용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매일 출근길에 지나치던 롱샴 경마장(Hippodrome de Longchamp) 끝자락의 방앗간이 영감을 주었다. ‘카세그랑(Cassegrain)’은 프랑스어로 ‘곡물을 부수다’, 즉 ‘제분업자’를 의미했다. 그는 이 언어유희와 자신이 디자인하는 마구(馬具) 세계를 결합해 ‘롱샴’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전력 질주하는 경주마 위의 기수를 로고로 채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장 카세그랑은 최고의 가죽 장인들과 협업해 악어와 도마뱀 가죽 컬렉션을 제작했고, 1948년 5월 파리 페어에서 이를 선보였다. 아들 필립 카세그랑은 당시를 회상한다. “아버지는 전 세계에서 찾아온 고객을 직접 부스에서 맞이했습니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최초로 대중에게 소개되었을 시기였죠. 전 세계 고객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일은 흔치 않은 기회였습니다.” 롱샴의 무대는 파리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갔다. 파리지앵 스타일을 선망하던 전 세계 고객에게 롱샴은 담배 파이프를 시작으로 서류 가방, 책상용 패드, 카드 홀더, 지갑으로 제품군을 자연스럽게 확장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롱샴은 카세그랑 패밀리 전체의 사업이 되었다. 어머니는 파리 페어와 부티크 운영을 병행했고, 자녀들은 바느질과 도금, 배송 등 제작 과정 곳곳에 힘을 보탰다. 하우스가 커질수록 가족의 손길은 더욱 깊어졌다. 한 명의 진보적인 리더, 이를 뒷받침하는 가족들, 그리고 파리 장인들의 손길. 세 가지가 만나 78년간 이어지는 롱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Decades of Evolution
1950년대 오를리 공항의 첫 부스부터 2020년대 지속가능성 인증까지, 롱샴은 매 10년마다 시대를 앞서가는 선택으로 럭셔리의 의미를 새롭게 써왔다.
1950년대: 공항에서 시작된 글로벌 도약
대대적으로 리뉴얼한 오를리 공항은 프랑스 명품이 세계로 도약하는 관문이 됐다. 단순한 터미널이 아니라 오픈 테라스에서 비행기를 바라보고, 오드리 헵번이나 레이 찰스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속에 사람들이 찾는 문화적 공간이었다. 장 카세그랑은 파리-뉴욕 직항 노선이 개설되자 가장 먼저 오를리 공항에 롱샴 부스를 세웠다. “모험이었습니다”라고 그의 아들 필립은 회고한다. 그 모험은 성공했고, 오를리는 어느새 에펠탑보다 더 많은 방문객이 찾는 장소가 됐다. “보시다시피 오를리 공항의 첫 번째 럭셔리 브랜드 매장은 롱샴이었습니다. 어떤 가죽 상인도 공항에서 빈 수트케이스를 팔기 위해 임대료를 낼 생각은 하지 않았죠. 저희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1960년대: 세계 100개국으로 확장
롱샴은 유럽 최초로 일본과 거래한 기업 중 하나가 되었고, 1960년대에는 이미 유럽을 넘어 아시아와 미주를 아우르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1970년대: 나일론 혁명과 예술과의 만남
롱샴은 나일론이라는 소재를 가죽과 결합하며 가방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필립이 스케치한 카키색 나일론과 가죽을 결합한 컬렉션은 무거운 수트케이스와 달리 가벼운 여행 가방을 제공했다. 필립이 발명한 4분의 1 크기로 접히는 ‘엑스트라 백’은 훗날 르 플리아쥬의 전신이 됐다. 같은 시기 롱샴은 예술가 세르지 멘지스키와 협업한 한정판 가방 시리즈를 선보이며, 예술가와 협업하는 최초의 가죽 제품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다. 1971년 필립은 세면도구 케이스를 재작업해 첫 여성용 핸드백을 디자인했다. 실크스크린으로 말 문양을 새긴 송아지 가죽의 ‘LM 라인’은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8년 담배 관련 제품이 카탈로그에서 완전히 사라지면서, 롱샴은 럭셔리 가죽 제품 하우스로 변모했다.
1980년대: 파리 중심부에 깃발을 꽂다
1988년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첫 플래그십 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1990년대: 아이콘의 탄생
1993년, 롱샴은 나일론과 가죽 트리밍을 결합한 ‘르 플리아쥬’를 선보이며 브랜드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실용성과 우아함을 동시에 담아낸 이 백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아이콘이 됐다. 같은 해 출시된 뱀부 클래스프의 르 로조 라인 역시 롱샴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대: 라이프스타일 하우스로의 진화
2006년에는 최초의 여성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론칭하며 슈즈와 아이웨어로 라이프스타일 영역을 확장했다.
2010년대: 장인정신의 계승과 70주년
롱샴은 장인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2011년 워크숍-학교를 설립했다. 미래의 가죽 장인을 양성하기 위한 이 교육 프로그램은 프랑스 샤토 곤티에(Château Gonthier) 워크숍 스쿨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8년 브랜드 설립 70주년을 맞아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열린 이벤트는 롱샴이 지닌 글로벌 영향력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2020년대: 지속가능한 롱샴을 위하여
롱샴의 지속가능성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증명되고 있다. 1993년 출시 이후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아온 르 플리아쥬 컬렉션의 모든 캔버스는 현재 재생 섬유로 제작되며, 이를 통해 탄소발자국을 20% 감소시켰다. 2022년에는 자투리 천을 활용한 ‘르 플리아쥬 리플레이’ 컬렉션을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이며 자원 낭비를 최소화했다. 재활용 나일론 소재의 ‘르 플리아쥬 에너지’, ‘르 플리아쥬 그린’, 그리고 소비자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마이 플리아쥬’는 모두 내구성 좋은 재활용 원단을 사용한다. 특히 마이 플리아쥬는 가방 1개당 페트병 10개에 해당하는 재활용 플라스틱 폴리에스테르로 제작되며, 물을 사용하지 않는 프린팅 기법과 공기 오염을 최소화한 드라이 과정을 거친다. 롱샴이 사용하는 가죽의 88%는 친환경 가죽 인증 기관 LWG 골드 인증을 받았으며, 2018년부터는 악어 가죽이나 모피를 컬렉션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또한 모든 쇼핑백에서 플라스틱 코팅을 제거하고, 세계산림관리협의회인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 인증을 받은 종이를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패션 기업 중 425개, 프랑스에서는 단 25개 브랜드만 보유한 엄격한 B Corp 인증을 획득했다.
The People Behind Longchamp
78년간 이어진 롱샴의 여정 뒤에는 가족, 장인, 그리고 아티스트가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브랜드의 가치를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왼쪽부터) 소피 델라폰테인(Sophie Delafontaine), 헥터 카세그랑(Hector Cassegrain), 줄리엣 포파드(Juliette Poupard), 장 카세그랑(Jean Cassegrain).
#대를 잇는 비전
창립자 장 카세그랑의 장남이자 전 회장인 필립 카세그랑은 1937년생으로, 아버지가 롱샴을 설립했을 때 11살이었다. “당시에는 목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배 케이스나 여권 케이스를 만들곤 했죠. 저에게는 롱샴 로고를 금박으로 찍는 작은 도금 기계가 있었습니다.” 파리의 한 건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그 건물이 작업장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장 카세그랑의 비전은 차세대를 키우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16세의 필립을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태웠고, 1954년 17세가 된 필립은 롱샴 샘플이 담긴 수트케이스를 들고 홍콩으로 향했다. “홍콩 페더가를 중심으로 담배, 궐련, 커피 무역이 활발했습니다. 저만의 거래처를 만들게 됐죠.” 3년 연속 정기적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를 방문하며 필립은 하우스의 토대를 닦았다. 1980년대 필립의 아내 미셸 카세그랑이 롱샴에 합류하며 리테일 시스템을 구축했다. 1988년 파리 생토노레에 첫 플래그십 스토어를 연 것도 그녀의 선택이었다. 1991년에는 명문 파리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필립의 장남이 점차 CEO로서 롱샴의 경영을 맡기 위해 회사에 합류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장 카세그랑이었다. 현재 롱샴은 카세그랑 가문의 3세대가 경영을 이끌고 있다. 창립자의 손자인 장 카세그랑이 CEO를, 손녀 소피 델라폰테인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소피는 1995년 회사에 합류해 브랜드에 패션 감각을 더했다. “할아버지는 가죽으로 감싼 파이프를 만들었고, 아버지는 기능성을 개발했습니다. 저는 여성성과 사토리얼 정신을 가져왔죠.” 2006년 여성 레디투웨어 컬렉션을 론칭하며 롱샴을 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진화시킨 그녀는 2018년부터 브랜드 전체의 크리에이티브 비전을 담당하고 있다. 막내 올리비에 카세그랑은 미국 부티크 운영을 총괄한다. 2020년에는 4세대가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장의 두 아들 아드리앙과 헥터 카세그랑이 각각 변혁 및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디렉터와 프랑스 총괄 책임자로 합류했고, 2024년 초 소피의 딸 줄리엣 포파드가 그룹 이벤트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장 카세그랑은 가족 경영의 강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독립성은 우리에게 장기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분기별 실적에 얽매이거나 주주들에게 매번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할 필요가 없죠.” 1948년 설립 이래 단 세 명의 CEO만이 회사를 이끌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다른 구성원의 의견을 환영하며 자랐습니다. 긴밀한 관계는 우리 모두가 회사의 비전을 공유하고 사업에 개인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합니다.” 롱샴의 성공 비결은 다음 분기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계획하는 장기적 관점이다. “우리는 가족 기업으로 계속되기를 원하고, 독립성 역시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거라 믿습니다.” 4세대가 합류한 지금, 롱샴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예술과 만나는 가방
롱샴에게 예술은 마케팅 도구가 아니라 태생적 본능이다. 1948년 일러스트레이터 투렌느 슈발로가 로고를 그렸을 때부터, 이 브랜드는 예술가의 손을 신뢰해 왔다. 1971년 창립자 장 카세그랑이 세르주 멘지스키에게 가죽 패치워크 백 디자인을 맡긴 건 대담한 선택이었지만, 롱샴에게는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였다. 2004년은 중요한 해였다. 건축가 토마스 헤더윅이 긴 지퍼로 구성된 집 백(Zip Bag)을 만들었고, 트레이시 에민은 르 플리아쥬 10주년을 위해 러기지에 이야기를 새겼다. ‘인터내셔널 우먼’이 도시를 옮겨 다니며 ‘인터내셔널 러브’를 찾는다는 내러티브. 각 가방의 로제트에는 에민이 직접 그린 롱샴 로고와 그녀 인생의 로맨틱한 순간을 담은 거리와 호텔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가방이 일기장이 된 순간이었다. 이어 제레미 스콧은 2006년부터 10년간 르 플리아쥬를 놀이터로 삼았다. 우표 모티프, 세계를 여행하는 푸들, 클래식 엽서 그래픽, 현대적인 사무라이로 표현한 자화상 등 팝 컬처를 20가지 스타일로 번역하며 그는 롱샴이 얼마나 유쾌할 수 있는지 증명했다. 2014년 사라 모리스, 2017년 바람 무라티앙, 2018년 셰인 올리버, 2023년 토일렛페이퍼로 이어진 협업 리스트는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롱샴이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다.
롱샴의 아트 프로젝트는 제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메종은 주요 아티스트들에게 핵심 매장 공간을 맡기며, 예술을 일상 속 경험으로 확장해 왔다. 카를로스 크루즈디에즈는 뉴욕 매디슨 애비뉴 부티크를 위해 움직임과 색채가 살아 있는 작품을 특별 제작했으며,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 매장에는 르 플리아쥬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접히고 펼쳐지는 조각 작품이 설치되었다. 런던 본드 스트리트 매장에는 마야 헤이욱이 여러 각도에서 인식되는 기념비적인 벽화 작업을 선보였고, 홍콩에서는 리우 웨이와 수이 지엔궈가 조형 작품을 통해 공간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했다.
한편 2004년부터 롱샴은 프랑스 패션예술발전협회인 ANDAM 패션 어워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며 신진 디자이너를 지원해왔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소피 델라폰테인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재능을 알아보는 일이 롱샴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현재 전 세계 15개국 이상의 롱샴 매장에는 60명 이상의 아티스트가 만든 200여 점의 작품이 걸려 있다. 가방을 사러 온 사람이 예술을 만나고, 예술을 보러 온 사람이 가방을 발견한다. 롱샴이 말하는 ‘예술과 일상의 공존’은 이렇게 구체적이다.
#손끝에서 완성되는 유산
롱샴의 장인정신은 인증서보다 먼저 존재했다. 2007년 프랑스 정부가 ‘Entreprise du Patrimoine Vivant(EPV, 살아 있는 유산 기업)’ 라벨을 수여했을 때, 이는 이미 수십 년간 쌓아온 것에 대한 뒤늦은 확인이었을 뿐이다. 노르망디와 루아르에 흩어진 5개 공장에서는 1959년부터 가죽이 가방으로 변하는 과정이 매일 반복되어 왔다. 세그레 메인 공장은 이제 6만㎡ 규모로, 2024년 한 해에만 200명 넘는 신입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다. 20년 경력의 장인 그웬날레가 말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며 가방은 변한다. 그 변화를 만드는 건 기계가 아니라 우리 손”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리에서 롱샴 가방을 볼 때마다 반갑다고 했다. 자신이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이 문장 하나가 롱샴 장인정신의 본질을 설명한다.
2011년 설립된 샤토 곤티에 워크숍-학교는 이 감각을 전수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교육 받은 폴린은 이전까지 가죽을 만져본 적조차 없었다고 고백한다. “재료를 보는 눈을 배웠고, 가방 하나가 완성되는 전 과정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롱샴은 기술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넘어서는 법을 보여줬죠.” 이것이 교육과 전승의 차이다. 또한 롱샴의 장인정신은 국경을 넘는다. 그들이 세 시즌 연속 마다가스카르 NGO 아나카(Anaka)와 협업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2018년 설립된 아나카가 추구하는 가치 즉, 여성의 경제적 자립, 아동 교육, 환경 보호가 롱샴이 믿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여성 장인들이 라피아를 손으로 짜면, 롱샴 팀이 가죽 디테일을 더한다. 그렇게 완성된 ‘르 플리아쥬 필레(Le Pliage Filet)’ 백은 두 대륙, 두 기술,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2024년 이 협업은 숫자로도 말한다. 40명의 여성이 워크숍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고, 66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숫자 너머에 있다. 이것은 장인정신이 보호받아야 할 유산인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바꾸는 현재진행형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증명이다. 롱샴이 말하는 ‘전 세계 여성에 대한 헌신’은 선언문이 아니라, 마다가스카르 어느 워크숍에서 라피아를 짜는 손 안에 존재한다.
Icons of Everyday
르 로조와 르 플리아쥬라는 두 이름 속에는 서로 다른 철학이 깃들어 있다. 롱샴이 수십 년간 만들어온 아이콘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견디고, 일상을 완성하며,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다.
르 로조(Le Roseau)
1993년 등장한 르 로조는 한 손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시그너처 실버 뱀부 클래스프를 단 토트백으로 시작했다. 영국 선원들의 더플코트에서 영감을 받은 이 뱀부 모티프는 30년 이상 롱샴의 시그너처 라인을 상징하는 엠블럼이 되었다. 라인의 이름 로조(Roseau)는 프랑스어로 갈대를 의미하는데, 갈대처럼 유연하지만 결코 부러지지 않는 롱샴의 브랜드 정체성을 담고 있다. 과하지 않게 여성적이고, 지나치게 기능적이지 않으면서도 일상에 정확히 맞닿아 있는 실루엣은 출근길부터 저녁 산책까지 하루의 장면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주얼리처럼 빛나는 뱀부 토글은 잠금 장치라는 기능을 넘어 하나의 장식이 되며, 절제된 우아함을 상징한다. 견고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죽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용자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롱샴의 장인정신을 대표하는 르 로조는 매 시즌 새로운 형태와 소재, 감각적인 컬러로 재해석되며 수백 가지 버전으로 진화해왔다. 2026년 봄 컬렉션에서는 ‘르 스마트(Le Smart)’ 라인이 새롭게 공개됐다. 뱀부 토글 버클을 슬림한 벨트 디테일로 재해석한 이 라인은 벨트 길이 조절을 통해 가방의 실루엣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어, 착용자의 스타일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하는 르 로조의 새로운 장을 연다.
2026 S/S 르 플리아쥬 엑스트라 백.
르 플리아쥬(Le PliageⓇ)
1993년 필립 카세그랑은 일본 여행 중 오리가미에서 영감을 받아 실용적이면서도 스타일리시한 접이식 가방을 디자인했다. 가벼움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안 레더 핸들과 나일론 캔버스 바디를 결합한 르 플리아쥬는 4단계의 간단한 접기와 펼치기로 형태를 완성한다. 하지만 이 간결함 뒤에는 50가지의 공정이 숨어 있다. 롱샴의 장인들은 이 섬세한 구조를 완벽히 마스터해야 했고, 제작되었다는 말보다는 건축되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정교한 과정을 거친다. 르 플리아쥬의 기원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 카세그랑이 미국 여행 중 본 슬림한 의류 가방에서 영감을 받아 양가죽 러기지 컬렉션을 제작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아들 필립 카세그랑은 군용 나일론 직물을 이용해 매우 견고하고 접을 수 있는 러기지를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르 플리아쥬의 원조가 되었다. 나일론의 가벼움과 속도, 러시안 레더가 지닌 전통과 깊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공존은 르 플리아쥬의 정체성이자, 하우스가 말하는 여행의 본질이다. 젠더와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니섹스, 유니버설 디자인은 시대를 앞서간 감각이자, 지금까지도 유효한 철학이다. 절제된 형태와 풍부한 컬러 팔레트는 매 시즌 다양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펼쳐왔고, 혁신적이면서도 컬러풀하고 유쾌한 이 백은 가방을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Longchamp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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