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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규모,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 전

총 165점의 작품을 통해 문인화가 정선의 새로운 면면을 비춘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5.04.27

사람, 정선


실경 속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바라보고자 한 ‘진경산수화’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 조금만 들춰보면 몰랐던 ‘사람 정선’의 모습이 보인다.


호암미술관의 «겸재 정선»전은 지금까지 열린 정선의 전시 중 최대 규모다. 리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 18개처의 기관과 개인 소장품을 모아 총 165점을 선보인다. 국보로 지정된 두 작품과 보물 10건 중 8점을 최초로 한 곳에서 전시하는 의미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10여 년의 기획이 현실로 이뤄진 데는 간송미술관의 협력이 컸다. 미술관에서 문화재단으로 변모한 간송과 ‘문화 공유’라는 뜻을 같이한 결과다.

165점의 작품은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표 화가였다는 사실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평생을 흠모한 금강산과 나고 자란 한양, 조선의 명승지를 조망하는 것은 물론 비교적 덜 알려진 문인화가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단서가 모여 있다. 몰락한 선비 집안의 소년 가장으로 문인과 화가 사이의 줄을 타며 고뇌하기도 하고 누구보다 모험과 명성을 누리기도 한 인물. 정선이 남긴 자취는 조선의 아름다운 산수와 그 시절 사대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사료이자 화가의 개성과 욕망까지도 담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고 이끈 조지윤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이름 ‘겸재 정선’ 안에 겹겹이 쌓인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인왕제색도>는 해외 순회로 인해 이번 전시에서도 짧게 만날 수밖에 없죠. 이 작품에 이토록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금강전도>와 함께 겸재 정선을 대표하는 작품이죠. 일단 좋은 작품은 잘 그린 그림이어야 할뿐더러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인왕제색’을 풀어 말하자면 ‘인왕산의 비 갠 풍경’이에요. 말 그대로 비가 갠 바위산을 그린 것인데 산을 까맣게 표현했어요. 한국회화사를 탐구하면서 조선시대 산수화를 수도 없이 봤지만 산을 검은색으로 칠한 경우는 <인왕제색도> 외에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인왕산은 정선이 살던 동네이자 평생 가장 자주 본 익숙한 장소였어요. <인왕제색도>는 수많은 해석을 거쳐 본인의 생각대로 그린 그림입니다. 많은 훌륭한 작품이 있지만 작가의 개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비교할 수 있는 작품은 없는 것 같아요.

정선은 30대에 붓을 잡고 80세를 넘겨 죽음을 앞두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얼추 50여 년 동안 주제 의식과 화법에 생기는 변화를 눈으로 따라갈 수 있는데요. 특히 대상을 축약하고 변형하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정선은 83세까지 살았어요. 그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인물이고 80대에 그렸을 것이라 추정되는 작품이 있는 만큼 노년에도 대작을 만들 실력과 기력이 있었다는 거죠. 변화는 아무래도 진경산수화에서 가장 잘 보입니다. 정선은 36살에 처음으로 금강산에 갔고 그때부터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초반 작품은 굉장히 디테일해서 쓸데없는 돌덩이들까지 여기저기 그려져 있는 것이 보여요. 금강산은 당시에도 중국과 일본에 이름날 정도의 명산이었고 웬만한 사람들은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정선은 눈에 모조리 다 담아놓고 싶었던 것 같아요. 몇 번 더 금강산을 찾고 노인이 되었을 때는 머리와 마음 속에 금강산의 많은 장면이 저장되어 있었을 거예요. 실제 본 아름다운 풍경에 화가의 눈으로 바라본 금강산의 진짜 경치, 그러니까 진경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 변형이 필요해지면서 과감한 생략과 집중을 거쳐 이른바 추상화가 진행된 것이죠. 초년의 작풍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신묘년풍악도첩>이고 아쉽게도 중기 작품은 많이 없어요. 60대 이후 작품인 <관동명승첩>은 금강산 주변 관동 지역을 그렸는데 굉장히 실제 경치에 충실하면서도 뭔가 새로운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수태사동구>는 수태사라는 절이 주제인 그림이지만 정작 화면 속에 절이 보이지 않습니다. 정선의 스승이었던 삼연 김창읍이 수태사에서 1년여를 머물며 시를 남겼는데 안개와 나무가 무성해 절이 다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어요. 시에 담긴 모습이 정선에게는 수태사의 진경이었던 거죠. 풍경 앞에 종이와 물감을 놓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경치 속에 담긴 진위를 찾는 것은 오랜 경험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진경산수화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선의 작품 세계에서 금강산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금강산을 향한 열망은 어디로부터 시작된 걸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금강산은 민족의 영산이었어요. 조선시대 이전부터 중국이나 일본에서 사신들이 오면 금강산 구경을 시켜달라고 왕에게 조를 정도로 동아시아에서 알려진 산이었죠. 정선이 살았던 18세기는 임진왜란의 피해가 다 복구된 시대이고 영조 시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기였어요. 경제와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이 유람을 즐기기 시작했고요. 또한 금강산에 가려면 시간과 돈과 체력이 필요했습니다. 정선의 친한 친구 사천 이병연이 마침 금강산 가는 초입인 금화의 현감으로 있으면서 정선을 초청해요. 이때 금강산과 관동 지역을 그린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정선의 커리어가 시작되죠. 시대적으로 개인적으로 특별한 곳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선은 지금의 청운동 일대인 유란동 난곡에서 태어나 50세 이후 인왕산 아래 인곡정사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런 배경은 삶에도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죠. 청운동 일대는 돈과 명예, 권력을 가진 화려한 세도가가 모여 살던 ‘장동’이었습니다. 이 동네를 그린 그림들이 상당히 남아 있어요. 본인의 주거지이자 후원자들이 꽤 많이 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장동팔경첩>을 자세히 보면 경치 속에 큰 집 한 채씩이 그려져 있어요. 어떤 장소인지 파악된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데 어쩌면 후원자들의 집이 아닐까 추측하는 거죠. 인왕산 청풍계도 정선이 자주 그렸던 장소입니다. 장동에 사는 안동 김씨 중 학문적으로 최고 어르신인 선원 김상룡의 집과 사당이 있던 곳입니다. 정선의 대표적인 후원자인 안동 김씨 집안과의 관계를 볼 수 있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거의 집들이 들어섰지만 정선이 그린 곳이 지금의 어디였을지 주소까지 나와 있는 자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언급되고 있는 곳은 인왕산 수성동 계곡과 창의문을 들 수 있습니다.

먹이나 최소한의 채색이 들어간 산수화에 익숙했는데 이번 전시에서 ‘블루’나 ‘핑크’라는 지칭이 어울리는 정선의 색을 보며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빛이 통과하는 무지개를 투명하게 표현한 지점도 그렇고요. 우리나라 산수화는 채색이 많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왕실용 장식화 외에 색을 많은 쓰는 그림은 가벼워 보인다고 평가받곤 했어요. 정선은 꽤 과감하게 색을 썼습니다. 당시 좋은 건물 벽은 분홍색이 섞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그런 색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정선의 <사문탈사>를 보면 분홍색 벽이나 지붕에 내린 눈을 흰색 소분으로 덧대어 표현하고 있고, <홍관미주>는 조선시대 작품 중 처음으로 무지개를 그려 넣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결코 난해하거나 난삽해 보이지 않는 것이 정선 그림의 특징인데요. 유홍준 교수가 말하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처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고고함이 작품에 남아 있는 거죠.


전시 1부에서는 진경산수화를, 2부에서는 문인화가의 면모를 조명합니다. 조선시대의 문인화가라는 확고한 영역 안에서 방황하는 정선의 인간적인 모습과 그로 인해 창작된 작품이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정선은 화가이면서 동시에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문인임을 적극적으로 피력했습니다. 당시의 문인화가란 글 공부를 하다 잠시 쉬고 싶을 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었어요. 의도적인 아마추어리즘이라 얘기하는데, 너무 공을 들여 그리거나 판매로 이익을 얻으면 안 되는 것이었죠. 정선은 뿌리 깊은 양반 집안 태생이긴 하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벼슬을 못 했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 가장과도 같은 상황이었어요. 과거 시험으로 벼슬을 얻진 못했어도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후원자들을 통해 벼슬을 얻게 된 거예요.

특히 드물게 남은 자화상으로 알려진 작품을 통해 더욱 드러나지 않나 싶은데요. 문인화가는 보통 자기 얼굴을 잘 그리지 않습니다. 화가라는 자의식이 덜하기 때문인데요. 툇마루에 앉아 쉬면서 해당화를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도>가 정선의 자화상을 담은 작품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 안 책장에 가득 쌓인 책과 그 옆에 붙은 그림 한 장입니다. 그림과 책으로 문인이자 화가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죠. 또 하나 <인곡유거도> 또한 자연 속에서 선비가 홀로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속세를 떠나 학문에 열중하는 이상적인 문인상을 반영한 그림입니다. 이렇게 문인 신분에 대한 자부심을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도 드물어요. 그의 이상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1천원짜리 지폐 뒷면에도 그려진 <계상정거>를 들 수 있습니다. 퇴계 이황은 조선시대 모든 사대부의 우상이었는데 정선의 외가와 외가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피가 섞여 있었던 거죠. 정선은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정성 들여 화첩을 만든 것이고요.

문인화가로서의 결과물에 자연스럽게 문학적 소양이 묻어났을 텐데요. 실제로 정선의 문학적 소양은 깊었고 작품을 통해 드러납니다. 정선이 쓴 추모사나 시가 조금 남아 있긴 하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니었어요. 대신 정선은 그림으로 표현할 줄 알았어요. 압축의 미를 지닌 뛰어난 시 중에서도 한 장면을 골라 그림으로 그려낸 <시의도>를 보면 알 수 있죠. 송나라 때 시인인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자연에 묻혀 돌아가고 싶다는 내용인데 긴 구절 중 한 구절 한 구절을 따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입력된 글을 그림으로 출력하는 능력이 출중했던 것이죠.

전시장에서 정선과 친교를 나누던 이들의 존재가 제법 큽니다. 그의 문인 의식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시인인 사천 이병연을 들 수 있어요. 어릴 적부터 사귀어 오랫동안 친분을 가졌고 이병연을 통해 또다른 많은 교우 관계를 맺었죠. 정선이 나중에 양천 현령으로 멀리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시와 그림을 서로 나눴는데 그것이 작품으로 남게 되고요.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인 관아재 조영석은 진정한 문인화가였습니다. 정선보다 10살 정도 나이가 많았음에도 정선이 가진 예술적인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했던 인물입니다. 정선의 작품을 극찬하거나 혹평도 할 줄 알았던 진정한 평론가의 포지션이었어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처럼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고고함이 작품에 남아 있는 거죠.


어렵게 모은 165점의 작품 하나하나가 소중하지만 놓치지 않고 들여다봐야 할 작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전시장 1층의 ‘한양과 근교’ 섹션에 <필운대상춘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지금의 사직동 배화여고 근처인 필운대에서 꽃놀이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채색을 잘 활용해 매화꽃의 화사함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 꽃놀이를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침 봄에 어울리니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하고요. 정선의 직속 상관인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와 연천 현감 신유현이 지금의 임진강인 연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을 남긴 <연강임술첩>도 눈여겨봐주시길 바랍니다. 같은 장면을 세 번 그려 나눠가졌는데 현재 두 벌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화등선>, <웅연계람> 두 작품이 한 세트인데 지금까지 두 작품이 함께 걸린 적이 없어요. 그만큼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고 진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 «겸재 정선»전은 호암미술관에서 6월 29일까지 열린다.


박의령은 <바자 아트>의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이번 전시에서 그림을 통해 은거하는 초연한 선비의 자아를 실현하려고 했던 당시의 사대부들과 그로 인해 당대의 선망을 흠뻑 받은 화가의 탄생기를 알게 되었다.

Credit

  • 글/ 박의령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