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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유수연이 '시작'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시작과 끝, 두 개의 단어를 움켜쥐고서 시인 유수연이 사사로운 각주와 함께 <바자>를 위한 시를 보내왔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12.30
새로운 시작
겨울은 멎는 것

끝이라 말하지 않아도 끝날 수 있다

이별은 정하는 게 아니라
변하는 거니까

눈은 멈추는 게 아니라
그치는 거니까

눈 내린 세상에 마구 의미를 주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도
아름다운 게 많겠지

너무나 많아 계속 그립지 않도록

우리가 정한 기준으로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고 하자

광흥창의 노을,
저 노을이 우리의 기준이야

저녁이라고 눈이 붉어질 일 없는데
눈을 감아도 발자국이 생긴다

기준은 멀어지고 있었다

맞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저문다고 다 아름답다 말하지 마
꼭 내가 곁에 있는 것 같잖아

새해입니다. 새롭다 믿으면 뭐든 새로울 것 같습니다. 13월이 있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기에 1월 다음은 2월, 12월 다음은 1월이라고 믿기로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12월을 끝으로 정했으니, 1월은 우리의 새로운 시작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새롭게 시작한 것이 있으신가요? 지속되지 않길 바란 마음을 끊기로 정한 것은 아닌지요. 끝이라 말하지 않아도 끝나는 것이 있고, 끝이라 말했으나 끝나지 않은 것도 있겠습니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 여태 모르겠습니다. 분명 끝난 사이인데 끝나지 않고, 끝냈다고 믿음으로써 끝을 유예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이 길어질 때면 정녕 끝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느 순간 멎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에는 너 닮은 사람도 많고, 너랑 같은 이름이라면 사랑할 준비까지 된 마음이 있기도 하니까요. 계절도 시절도 사랑도 기준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멀어지기만 하면 멀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4월에 내린 눈을 기적이라 부르지 말고, 사랑을 미련으로 남겨두지 않은 우리의 멎음을 기적이라 부르기로 해요. 시작을 되돌리기로 해요.

Credit

  • 글/ 유수연
  • 일러스트레이터/ 최산호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