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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가게'를 벗어난, 가장 보통날의 엄태구

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누구나 혼자가 된다. 엄태구는 일순간 반짝, 다른 사람이 된다. 고민과 긴장은 없던 것이 된다.

프로필 by 고영진 2024.12.23
셔츠는 McQueen by Seán McGirr. 팬츠는 Acne Studios.

하퍼스 바자 촬영일 기준 지난주, <조명가게>의 4회차 에피소드가 공개됐습니다. 본인이 출연한 1화를 제외하고는 방송을 통해 처음 봤다고요.
엄태구 밤늦게 집에서 혼자 긴장하며 봤습니다. 1화는 제가 촬영한 부분이니 으스스한 분위기가 연출되어도 괜찮았는데, 어떤 식으로 촬영한지 몰랐던 다른 배우분들의 신을 보면서는 너무 무서웠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를 끄고 보다가 2화였나요? 비오는 밤 학교에 어떤 친구가 앉아 있는 장면에서는 죄송하지만 뒤로 넘기기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밤’ ‘학교’만으로도 무서울 이유는 충분한데 정체 모를 학생이 앉아 있다면 그건 도저히 볼 수가 없는….
하퍼스 바자 시나리오를 읽은 뒤 “무서운데 슬프고 기묘한데 따뜻하다”는 감상을 남겼지만, 사실상 무섭다는 감상이 압도적이었군요.(웃음)
엄태구 아마 마지막 회차인 8화까지 보신다면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아실 거예요. 아까 촬영 준비하면서 헤어 원장님이랑 잠깐 이야기를 했는데 원장님은 아예 <조명가게> 스토리를 모르세요. 4화까지만 보고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을 말씀해주시길래 몇 가지 질문을 드렸더니 후반부의 내용에 대해 전혀 감을 못 잡으시더라고요. 속으로 ‘8화까지 공개됐을 때 많이 우시겠는데?’ 싶었습니다. 마지막 화까지 공개되었을 때 원장님 반응이 어떠실지 궁금하네요. 지금 가장 기대되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원작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분들이 드라마를 보고 어떤 감상을 남기실까 하는.

코트는 Versace. 이너 톱은 Amiri. 팬츠는 Acne Studios. 슈즈는 McQueen by Seán McGirr.

하퍼스 바자 <조명가게>의 현민은 매일 같은 옷을 갖춰 입고 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입니다. 원작인 웹툰과 드라마 각본을 쓴 강풀 작가는 현민을 이 작품에서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로 꼽았더군요. 그간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센 인물들을 주로 만나다 일상에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인물을 연기해보니 어떤 재미가 있던가요?
엄태구 글쎄요.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캐릭터든 저에게는 매번 똑같이 도전이고 어려워요. 제가 늘 꽂혀 있는 건 ‘어떻게 하면 더 진짜처럼 보일 수 있을까’인데, 그렇게 고민을 해도 잘 나올 때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죠.
하퍼스 바자 현민은 퇴근길에서 늘 흰 옷을 입은 채 정류장에 앉아 있는 지영을 마주치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에 임했는지요.
엄태구 지영과 마주치는 첫 장면은 일상적이길 원했어요. 매일 같은 장소에서 수상한 여자분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나올 수 있는 리얼한 반응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지영에게 말을 걸고 같이 집에 가는 과정까지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랐는데… 어떻게 보셨어요?
하퍼스 바자 처음에는 지영을 무시하다가 세 번째 마주칠 때쯤 쭈뼛쭈뼛 다가가 말을 걸잖아요. ‘아, 예, 그, 뭐… 아, 안녕하세요’ 하고. 그런 장면에서 우리가 지금껏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본 엄태구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엄태구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런 거 말씀이시죠. 그렇게 봐주셨다니 너무 좋네요. 다행입니다. 지영의 분위기를 따라가 무겁게 나올까 걱정했거든요.

니트, 셔츠는 Diesel.

하퍼스 바자 연기한 캐릭터에 대한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을 보니 선배 배우이자 <조명가게> 연출을 맡은 김희원 감독의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엄태구는 겸손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연기에 진심이니 캐스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동시에 질문이 너무 많고, 모니터링도 너무 꼼꼼히 많이 해서 힘들다.”
엄태구 그 말은 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지금껏 촬영 전에 이렇게까지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눈 작품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현민이라는 캐릭터는 요만큼만 기울어져도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릴 수 있어서였던 것 같고요. 촬영 전에 충분히 논의를 한 뒤에 현장에서는 감독님의 디렉션을 100퍼센트 믿고 소화해내려 했습니다. 모니터링은… 제가 모니터를 계속 보고 있으면 촬영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붙잡고 있진 않았습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뒤에. 그때서야 혼자 조용히 봤습니다.
하퍼스 바자 지난 몇 년간의 인터뷰를 훑어보니 꾸준히 멜로 장르에 대한 갈증을 강조했더라고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이를테면 일을 제외한 일상에서 관계와 사랑에 대해 부쩍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거나.
엄태구 그렇다기엔 갈증이 10년 넘게 지속된 걸 보면…(웃음) 말씀하신 이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저 많이 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멜로에만 갈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멜로와 누아르 장르 작품이 동시에 들어왔는데, 누아르 대본이 더 재미있다면 누아르를 택하겠죠. 그러니까 기준은 장르가 아닌 거죠.

티셔츠는 McQueen by Seán McGirr.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사실 엄태구라는 배우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연기를 할 때, 어떻게 그토록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타고난 성정이 일을 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요.
엄태구 그러게요.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까, 주어진 역할이니까, 잘해야 하니까. 절박한 마음으로 해온 것 같기도 합니다.
하퍼스 바자 연기를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였다는 말로 들립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엄태구 그런 시기도 분명 있었죠. 이 일은 나와 맞지 않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때요. 서른 초반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땐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맞는 줄 알고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구나, 하면서요.
하퍼스 바자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어 막막했을 그 시기는 어떻게 뚫고 지나갔나요?
엄태구 맞지 않는다고 느낀 이유 중 하나가 현장을 편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어요. 한번은 어떤 선배님이 저를 부르셔서 말씀하시더라고요. 현장에서 그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 저를 아끼는 마음에서 말씀해주셨다는 거 압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료 배우나 스태프에게 먼저 다가가서 살갑게 대하는 일들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다 보니 현장에서 연기 외적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고, 더 긴장이 되는 악순환이 생긴 거예요. 배우를 계속해서 업으로 삼아도 되겠다는 생각은 <밀정>을 촬영하고 나서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제 성향이 변한 건 아니고, 함께 일한 분들이 잘 챙겨주신 덕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래요. 옆에서 늘 배려해주고, 한 번이라도 말을 더 걸어준 고마운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레더 코트는 Ernest W. Baker.

하퍼스 바자 요즘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어요?
엄태구 여전히 같습니다. 지금도 현장이 어려워요. 저는 이 일을 마냥 즐기는 편이라 보긴 어렵습니다. 직업이니까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순간의 무게는 오직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로 혼자 있는 저에겐 잘 맞는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상대 배우, 감독과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눈대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주체는 저니까요. 이 두 가지 생각이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닙니다. 명확한 하나의 답은 앞으로도 얻지 못하겠죠.
하퍼스 바자 자꾸만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때입니다. <놀아주는 여자>와 생애 첫 팬미팅까지. 새로운 행보를 많이 보여준 2024년을 돌아봤을 때 가장 먼저 스치는 장면은 어떤 것인가요?
엄태구 문을 열고 팬미팅 장소에 들어섰을 때. 소리로 맞는다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했습니다. 시작하기 10분 전까지만 해도 홍보 실장님한테 큰소리를 쳤거든요. “전부 나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오셨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긴장이 안 된다”는 말을 했는데 문을 열고서는… 쓰러질 뻔했습니다 진짜로. 살면서 처음 경험해본 기분이라 가장 먼저 떠오를 한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그 순간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 같아요.

아우터는 Noice. 팬츠 labeless. 슈즈는 McQueen by Seán McGirr. 이너 톱,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퍼스 바자 12월 18일. <조명가게> 최종화가 공개되었을 때쯤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엄태구 연말이고, 새해라고 해서 거창한 계획을 더하진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그 순간부터 하는 편이에요. 그러니 오늘처럼 일정이 있다면 성실히 임하고, 스케줄이 끝나면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똑같겠죠.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제가 <조명가게>의 웹툰을 처음 보고 느꼈던, 어딘가 이상한 충격을 보시는 분들이 제대로 느껴주셨으면 한다는 겁니다. 드라마 역시 웹툰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거든요. 최근 몇 년 동안 제가 봤던 대본들 중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아주 깊은 밑바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맛본 느낌이랄까요. 가히 팬미팅 때의 충격에 비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웃음) 저에게 아주 의미 있는 이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Credit

  • 사진/신선혜
  • 헤어/ 김선애
  • 메이크업/ 김모란
  • 스타일리스트/ 임혜림
  • 어시스턴트/ 노현승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