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보헤미안의 시대가 돌아왔다

1970년대, 칼 라거펠트, 뮤직 페스티벌, 2000년대 잇 걸들 그리고 끌로에의 새로운 수장 셰미나 카말리. 또 다시 보헤미안의 시대가 도래했다.

프로필 by 윤혜영 2024.10.05
Rabanne

Rabanne

2024 F/W 끌로에 쇼장. 원조 잇 걸 시에나 밀러, 믹 재거의 딸 조지아 메이 재거, 새로운 끌로에 걸 키어넌 시프카(Kiernan Shipka), 1970년대 칼 라거펠트의 뮤즈 팻 클리브랜드(Pat Cleveland)와 제리 홀이 프런트 로에 나란히 앉아 있다. 별다를 것 없어 보이던 프런트 로 앞은 이들의 발을 찍으려는 카메라로 북새통을 이뤘다. 왜냐하면 다섯 명 모두 똑같은 슈즈를 신고 등장했기 때문. 검은 가죽 스트랩의 우든 웨지 힐. 한동안 잊혀졌던 이 슈즈는 보헤미안의 낭만으로 가득했던 과거 끌로에의 흥행을 책임지던 존재가 아니던가. 쇼가 끝나고 다수의 매체들이 ‘웨지 힐의 부활’이란 기사를 앞다투어 쏟아냈다. 쇼 당일 ‘웨지’의 검색량은 25%, ‘끌로에’는 무려 37% 급증했다는 더 리얼리얼의 발표만 봐도 얼마나 화제였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케이트 부시(Kate Bush)의 노래 ‘Cloudbusting’과 함께 시작된 쇼! 웨지 힐은 새로운 보헤미안 시대를 위한 서막에 불가했다. 이 중심에는 끌로에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셰미나 카말리가 있다. “처음 끌로에에 왔을 때 사랑에 빠진 끌로에의 여성 정신, 그 감정을 되살리고 싶어요. 제 데뷔 컬렉션은 1970년대 후반의 끌로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의 끌로에는 감각적이고 자연스러운 여성성과 힘들이지 않는 강함, 자유의 시대였습니다.” 아직은 낯선 이름인 카말리는 20여 년 전, 피비 파일로 시절 끌로에의 인턴으로 시작해 한나 맥기본, 클레어 웨이트 켈러와도 함께한 탄탄한 경력의 소유자.(2016년부터 6년 동안 안토니 바카렐로와 생 로랑에서 일하기도.) 다시 돌아온 ‘끌로에 전문가’는 브랜드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가장 먼저 끌로에의 기초를 다진 1970년대의 칼 라거펠트를 소환했다. 그 결과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늘어진 러플 블라우스를 시작으로 근사하게 찰랑거리는 시스루 드레스, 벨보텀 팬츠, 프린지 가죽 재킷, 금속 로고 벨트, 사이하이 부츠, 오버사이즈 선글라스까지. 컬렉션은 그야말로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칼에게 경의를 표하며 화이트 레이스 톱과 블랙 플레어 팬츠를 매치한 룩 3번을 콕 집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칼의 컬렉션에 대한 오마주’라 설명하기도. “끌로에 인턴을 시작했을 때 샬럿 램플링, 로렌 허튼, 제인 버킨, 제리 홀 같은 1970년대 뮤즈들의 자료를 리서치하곤 했죠. 가장 동시대적인 보호 시크란 무엇인지 골몰했습니다.”

Chloé

Chloé

패션은 진정 20년 주기로 돌고 도는 걸까? 정확히 20년 전, 보헤미안 스타일은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당시의 보헤미안 룩은 1969년의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자유를 외치며 몰려든 히피 패션에 시크함을 한 스푼 더한 것이 특징. 이름하여 ‘보호 시크(boho chic, 보헤미안과 시크의 합성어)의 시대’였다. 시에나 밀러는 화이트 레이스 블라우스와 징이 달린 빈티지한 베스트, 슬라우치 부츠를 신고 주드 로와 데이트 중이다. 더 로우를 통해 미니멀리즘의 거장이 된 올슨 자매는 레이스 드레스에 비즈 주얼리를 주렁주렁 걸친 채 뉴욕의 한 행사장에 도착했다. 저 멀리 런던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에서는 케이트 모스가 스모크 드레스에 카우보이 벨트와 부츠를 두르고 보헤미안 시크를 널리 전파 중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보헤미안 스타일이 급부상하는건 단순히 패션계의 20년 주기설 때문인 걸까? “불황 속에서 사람들은 강렬한 미학에 끌리곤 하죠.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흥미롭고 장식이 많은 아이템에 끌리게 됩니다.” 패션평론가 리안 핀(Rian Phin)의 말이다. 카말리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미완성과 자유, 부드러움과 움직임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1970년대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그 시절 사람들은 관습, 전통적인 삶의 방식, 성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자 했죠.” 물론 브랜드 하나로 트렌드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히 보헤미안 스타일의 미학을 전파해온 이자벨 마랑을 비롯해 대담한 패턴 플레이를 선보인 에트로, 수공예적 태슬 장식을 더한 라반, 카우보이 모자와 벨트로 럭셔리한 보헤미안 우먼을 탄생시킨 랄프 로렌 컬렉션 등 다채로운 브랜드에서 보호 시크 룩을 제안 중이니 참고해볼 것.

2024 메트 갈라에 참석한 시에나 밀러. 끌로에의 화이트 시폰 드레스로 로맨틱 보헤미안으로 변신했다.

2024 메트 갈라에 참석한 시에나 밀러. 끌로에의 화이트 시폰 드레스로 로맨틱 보헤미안으로 변신했다.

2024년식 보호 시크는 어떻게 즐겨야 할까? 우리가 알던 보호 시크의 로맨틱함을 유지한 채 ‘성숙함’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떠올리는 알록달록한 컬러와 패턴은 금물. 대신 레이스와 시폰, 모슬린 등 보디라인이 비치는 가벼운 소재와 뉴트럴이나 파스텔 톤 컬러를 택해야 한다. 네이키드 트렌드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면 쉽다. 여기에 볼드한 액세서리를 한두 개 더하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패션평론가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헌터 샤이어스(Hunter Shires)는 말한다. “새로운 보헤미안 무드는 사치스러운 실루엣처럼 보이지만 스타일링 자체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합니다. 최대 두 가지의 스테이트먼트 액세서리와 미니멀한 메이크업을 가리는 비네트 선글라스, 모든 물건을 넣을 수 있는 오버사이즈 백이 필요할 뿐이죠.”

Credit

  • 사진/ Getty Images, Launchmetrics(런웨이)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