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비통 2027 크루즈 컬렉션, 파리와 뉴욕이 만나다
뉴욕 프릭 컬렉션에서 펼쳐진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새로운 이야기. 키스 해링의 작품과 프랑스의 장인정신이 교차한 루이 비통 2027 크루즈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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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ND TOUR
160여 년 전 찰스 디킨스가 런던과 파리를 마주 세웠다면,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파리와 뉴욕을 나란히 놓았다. 프랑스를 동경하던 미국인의 저택 프릭 컬렉션에서 열린 루이 비통 2027 크루즈 쇼는 두 도시가 서로를 비추며 써 내려간 또 하나의 이야기였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으며, 믿음의 세기이자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으며,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중
1859년 전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런던과 파리라는 두 도시를 거울처럼 마주 세운 소설을 썼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이 읽힌 소설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중 하나로 꼽히는 <두 도시 이야기>다. 최고와 최악을 오가고 지혜와 어리석음이 뒤엉킨 두 도시는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또 달랐다. 그 혼돈 속에서 인간은 저마다의 선택을 하고 각자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 역사는 거대한 힘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드는 건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끈질기게 일깨운다. 오랜만에 이 소설의 첫 문장을 떠올린 건 루이 비통 2027 크루즈 컬렉션의 쇼 노트가 ‘두 도시 이야기’라는 문장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루이 비통의 두 도시는 찰스 디킨스의 런던과 파리가 아닌, 파리와 뉴욕이다. 1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최고와 최악의 경계가 수시로 허물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모든 것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듯했지만 나라마다 금세 다시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자유는 또 다른 억압을 낳았고 천국인 줄 알았던 곳이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번진다. 지금 우리는 찰스 디킨스가 그린 그 시절보다 더 혼란스러운 한때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혼란 한가운데서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을 이끄는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연결을 빚어낸다. 파리와 뉴욕이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과 현실 사이를, 그리고 한 도시 안에 존재하는 여러 도시, 그 이분법과 이중성 사이를 잇는다. 패션쇼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품는다. 책 한 권에 담긴 활자를 모두 풀어 헤친 뒤 암호처럼 다시 엮어 옷과 공간, 공기와 소리, 향기와 흐름 속에 새겨 넣는 일이니까.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또 아무것도 없었으며, 우리는 모두 곧장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고 또 모두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맨해튼 5번가와 70번가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세기 말 철강과 코크스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실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의 저택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바꾼 곳으로, 도금 시대(Gilded Age)의 부와 취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화이트 큐브의 여느 미술관과 달리 저택의 방 구조와 인테리어를 그대로 간직한 이곳에는 페르메이르와 렘브란트, 앵그르와 휘슬러 같은 유럽 거장의 회화가 걸려 있고 프랑스 장식 예술 컬렉션 또한 두텁다. 세브르 도자기와 18세기 프랑스 가구, 화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연작 패널로 꾸민 방에 들어서면 파리의 저택 하나를 통째로 옮겨 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쇼 노트가 이곳을 “미국의 시선으로 프랑스 장식 예술을 기리는 공간”이라 표현한 것도 그래서다. 루이 비통의 쇼는 바로 이 저택의 1층, 한때 프릭 가족의 생활 공간이었던 방들에서 열렸다. 프릭의 1층 갤러리가 패션쇼에 문을 연 건 이번이 처음이다. 프랑스를 탐미하던 미국인의 집에서 프랑스를 대표하는 하우스가 쇼를 연 셈이다. 쇼 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공간 사이의 여행이자 시대 사이의 여행이고, 정체성 사이를 오가는 발견의 항해다.
파리와 달리 뉴욕은 오래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여러 정체성이 모여 이뤄진 도시였다. 업타운과 다운타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서로 다른 감수성과 태도가 같은 거리에 나란히 머문다. 루이 비통은 이를 아름다운 모순이자 완벽한 차이라 불렀다. 자유의 여신상으로 상징되는 뉴욕은 보편성이라는 단어에 형체를 입힌 곳이기도 하다.(그 자유의 여신상 역시 프랑스가 보낸 선물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힙합이 태어나고 팝아트가 뿌리를 내린 뉴욕의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뻗어 오른다. 귀족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파리와는 결이 꽤 다른 지점이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미국 여성의 옷장을 떠올렸다.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그녀들을 그리는 프랑스 디자이너의 모습은 새롭기 그지없다.
쇼의 문을 연 건 가방 하나였다. 첫 번째 모델이 모노그램 하나 없는 1930년대 루이 비통 가죽 수트케이스를 들고 나왔는데, 언뜻 투박한 여행 가방 같은 그 표면에는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검은 마커로 그려 넣은 드로잉이 빼곡했다. 키스 해링이 1984년 친구를 위해 그림을 그려 넣은 이 가방은 2020년 루이 비통 아카이브에 들어왔고, 해링 재단과의 협업을 준비하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뒤늦게 그 존재를 알게 됐다. 스스로 ‘우연한 만남’이라 부른 이 발견이 컬렉션 전체의 출발점이 됐다. 파리의 오래된 트렁크와 뉴욕 지하철역 검은 광고판에 그림을 그리던 거리의 아티스트는 이미 이 가방 위에서 조우했던 것이다. 두 도시의 끌림, 그건 운명이었다.
컬렉션은 이질적인 두 만남을 옷으로 옮겨 놓는다. 마치 뉴욕과 파리처럼. 업타운의 격식은 셔츠 위로 과장되게 피어오르는 프릴과 몸 바깥으로 둥글게 솟은 어깨, 겹겹이 쌓인 러플 헴라인에 깃들었고 다운타운의 공기는 레이어드한 캐미솔과 리브 가죽 재킷, 새틴 쇼츠에 실렸다. 둘은 한 룩 안에서 거리낌 없이 포개졌다. 단단하게 구조를 잡은 가죽 재킷 위로 메디치 칼라가 부풀어 오르고, 새틴 복서 쇼츠는 오버사이즈 모토 재킷과 러플 장식의 메탈릭 부츠 곁에 나란히 섰다. 트위드 수트와 강렬한 로열 블루 수트 아래에는 니콜라 제스키에르식으로 다듬은 복싱 슈즈가 자리를 잡았다. 블루 진과 저지, 가죽처럼 미국인의 옷장을 이루는 기본 아이템들은 프랑스 아틀리에의 손을 거쳐 다른 디테일과 텍스처를 품게 됐다.
스트레이 키즈 필릭스가 쇼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해링의 작품은 옷 위에서도 발견됐다. 짖는 개와 빛을 내뿜는 아기처럼 누구나 한눈에 알아보는 그의 도상이 톱과 드레스, 손으로 프린트한 가죽 재킷과 가방 위를 뛰어다녔다. 종이접기처럼 접어 올린 드레스 위에도 키스 해링 특유의 선이 있었다. 슬롯머신과 자동차 섀시, 툴링 가죽 같은 미국 팝 컬처의 조각들은 도금 시대의 화려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식과 뒤섞여 옷과 액세서리로 다시 쓰였다. 파스망트리 장식은 그라피티처럼 번져 나갔고 시퀸 자수는 뜻밖의 레이스를 만들어냈다. 파리와 뉴욕은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 단단하게 교차하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피날레에 가까워질수록 프릭의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이 걸어 나온 듯한 풍성한 러플 블라우스가 등장했는데, 정작 그 아래에는 카프리 팬츠와 카고 팬츠를 더했다. 거장의 그림 아래로 뮤지션 피치스의 ‘Boys Wanna Be Her’가 울려 퍼졌고, 밴드 하임의 멤버이자 배우 알라나 하임이 처음으로 런웨이에 섰다. 현대의 인물이 미래에서 온 유령처럼 과거의 공간을 가로질렀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이곳에 함께 속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차이의 선은 그렇게 지워졌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일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일이며 내가 향하는 안식은 지금껏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안식이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중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산책》이 벽에 걸린 프릭 컬렉션에서 진행된 루이 비통 2027 크루즈 쇼장 베뉴.
쇼가 끝나고 다시 고요해졌을 프릭의 방들을 떠올려본다. 프라고나르의 그림도, 세브르 도자기도 늘 있던 자리로 돌아가 고요를 되찾았을 것이다. 불과 몇 시간 전 그 사이로 새틴 쇼츠와 복싱 슈즈가 지나갔다는 흔적은 남지 않았겠지만 그 방들이 품은 시간은 분명 확장됐다. 수백 년 전 거장의 작품과 1980년대 뉴욕 거리의 드로잉이 한 프레임 안에 나란히 놓였고, 지하철역과 미술관과 런웨이를 자유롭게 오가던 키스 해링처럼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것이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루이 비통의 여성 컬렉션을 이끈 지 어느덧 13년이 됐다. 그는 하우스의 오랜 유산을 신중하게 돌보면서도 그 안에 갇히지 않는 법을 습득했다. 한 매체는 그의 작업을 두고 아직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삶을 위한 옷장을 짓는 일이라 표현했다. 이번 컬렉션만큼 그 말이 잘 들어 맞는 쇼가 또 있을까. 업타운의 프릴과 다운타운의 가죽 재킷이 한 몸 위에 포개지는 모습은 지금의 옷차림이라기보다 갈라진 것들이 다시 하나의 풍경 안에 머무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그린 옷이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지금껏 해온 그 어떤 일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일이며 내가 향하는 안식은 지금껏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안식이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제스키에르의 크루즈 컬렉션 역시 이 결론에 닿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을까. 지금껏 알았던 그 어떤 안식보다 훨씬, 훨씬 더 나은 안식. 우리는 지금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Credit
-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Louis Vuitton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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