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슨 자매와 피터 뮐리에가 사랑한 조지 나카시마의 가구 공방을 가다
딸 미라 나카시마가 이야기하는, 나카시마 가구가 그토록 선구적이고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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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시마의 가구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아버지 조지 나카시마의 유산을 차분히 이어가는 동시에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해온 딸, 미라 나카시마 덕분이기도 하다.
조지 나카시마 우드워커스 단지 안에 자리한 코노이드 스튜디오에서, 미라 나카시마.
조지 나카시마 우드워커스(George Nakashima Woodworkers)는 뉴욕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펜실베이니아주 벅스 카운티의 뉴호프(New Hope)에 자리해 있다. 회화처럼 아름다운 뉴호프의 중심가 바로 뒤편 조용한 길가 근처다. 얼마 전 아침에 그곳으로 차를 몰고, 나란히 늘어선 농가를 지나 미국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이 건넜던 바로 그 델라웨어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는 길이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표지판과 배 모형이 세워져 있었다. 이 지역은 최근 몇 년간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욜란다 하디드와 그녀의 두 슈퍼모델 딸인 지지 하디드, 벨라 하디드, 그리고 브래들리 쿠퍼와 같은 유명 인사를 끌어모아 벅스 카운티는 ‘햄튼의 강력한 경쟁자’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뉴호프는 예술가, 극작가, 그리고 특히 20세기 목공예가 조지 나카시마를 불러들이며 예술 공동체의 등대 역할을 해왔다.
1943년, 조지 나카시마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부가 설립한 여러 수용소 중 하나인 아이다호주 미니도카 전쟁 재배치 센터에서 석방된 이후 뉴호프로 이주했다. 조지 나카시마 우드워커스는 조지 나카시마가 머물던 집을 포함해 15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단지에 자리하며, 입구에는 손으로 새긴 소박한 간판이 걸려 있다. 이 가구 공방은 현재 조지의 딸인 84세의 미라 나카시마가 운영하고 있다. 36년 전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영혼이 깃든, 소박한 목재 가구를 만드는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다.
1954년에 지어진 우아한 오크 목조 건물 안에 있는 나카시마 사무실에 들어서자, 영업 및 홍보 매니저이자 미라의 며느리인 수미 한 아마가수가 내 몸에서 “뉴욕의 냄새가 난다”고 담담하게 말하며 나를 맞이했다. 나카시마 단지는 예전에는 주말이면 일반에 개방되었으나, 최근 몇 년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뉴욕에서 방문객이 몰려들자 미라는 이를 예약제로 변경했다. 아마가수의 말은 나카시마의 작품을 향해 최근 고조된 열기를 반영한다. 오늘날 나카시마의 작품은 중고 시장에서 상당한 가격에 거래되며(2006년 오리지널 아를린 테이블이 사상 최고가인 82만2천400달러(약 12억 2천356만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가장 안목이 높고 세련된 공간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디자이너 피터 뮬리에가 2023년 가을 알라이아 캠페인을 연출했던 앤트워프 자택에서는 주방 카운터에 놓인 나카시마 스툴 한 쌍을 엿볼 수 있었다. 생 로랑이 파리에 레스토랑 ‘스시 파크(Sushi Park)’를 열었을 때, 인테리어의 일환으로 나카시마 라운지 체어를 선택했다. 줄리언 무어, 라프 시몬스, 마이클 코어스 모두 나카시마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대중적이고(동시에 비싸며) 디자인이 화려한 데다 유쾌한 에토레 소트사스, 가에타노 페세, 심지어 피에르 폴랑의 것과는 달리, 나카시마의 가구는 뚜렷이 절제된 매력을 지닌다. 종종 그 방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미라가 단지를 안내하러 왔을 때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터키석 컬러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자에 달린 단추들은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조각한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귀에는 나무를 형상화한 섬세한 은 귀고리가 매달려 있었다. “목재를 바라볼 때면, 그 나무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왜 그런 모양을 띠게 되었는지 항상 궁금해지죠. 그 뒤에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훨씬 더 흥미로워지는 법이니까요”. 미라에게는 마치 숲의 수호자인 듯한, 요정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그녀는 나를 폴 반(Pole Barn)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나무로 가득 찬 커다란 창고로, 거의 모두 수십 년 전 아버지가 구해 온 것이라고 말했다. 말린 참나무, 밤나무, 벚나무의 긴 판재들이 옆으로 세워져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공간에 기대어 있었고, 마치 숲처럼 내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건조하고 먼지가 쌓인 이 나무들은 정제되어 마감된 나카시마 작품의 광택과는 거리가 멀다. 목공예가들은 재활용 목재를 선호하는데, 미라는 이러한 철학이 이곳의 ‘생명력’의 일부이며 평온한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곳 부지에 들어서면 하나같이 ‘아, 여긴 정말 평화롭네요’라고 말해요.” 이곳은 맞춤 제작 프로젝트를 위해 재료를 고르러 오는 곳이다. 미라의 설명에 따르면, 이 헛간은 1990년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어졌다. 아버지는 넓은 목재 창고에 나무를 보관했지만,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엔 모든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걸 지은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중고 시장에서 나카시마 의자의 가격은 제작 연도, 외관, 품질에 따라 수천 달러에서 수만 달러까지 천차만별이다. 나카시마 우드워커스에 직접 주문할 경우 가격이 별도로 안내되며, 의자는 특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구로 여겨지곤 한다. “이 작품들은 색상이나 과시성, 규모 면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개성 면에서는 매우 강렬합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마이클 바고(Michael Bargo)가 말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더 로우 매장을 모두 담당하는 그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매장을 열 때 올슨 자매가 소장한 나카시마 크레덴자와 의자 한 쌍을 고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작품마다 형태와 움직임이 다르기 때문에 희귀하고 특별하죠.” 소더비의 회장이자 20세기 디자인 부문 공동 글로벌 책임자인 조디 폴락은 나카시마의 친근함을 언급하며, 그의 작품이 “가장 훌륭한 의미에서 실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녀 역시 자신의 집에 나카시마 작품을 여러 점 두고 있다. “손으로 만지고 싶고, 사용하고 싶어집니다. 대화의 소재가 되는 작품들이죠. 수작업의 정취가 물씬 묻어나고요.” 조디 폴락이 말했다. 아버지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 못지않게 요즘 중고 시장에서 미라의 작품도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나무가 지닌 표현력만으로도 미라의 작품을 즉시 알아볼 수 있어요. 반면 그녀의 아버지 작품은 때때로 좀 더 절제된 느낌을 주기도 해요. 컬렉터들은 그 점을 정말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지 나카시마가 아닌 미라 나카시마의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에, 컬렉팅하는 데 지장이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그 경계는 점점 좁혀지고 있죠.”
미라의 어린 시절 집에 있던 도자기와 주방 전경.
총 12명 정도의 장인과 디자이너가 연간 약 800점을 제작하는데, 이 생산량은 나카시마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 존재감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패션계 최상위층 인사들에게 작품이 사랑받으며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꿈꾸는 명성을 얻은 ‘조지 나카시마 우드워커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라에게는 네 명의 자녀가 있지만, 뉴호프에 사는 자식은 없으며 사업에 관심을 보인 이도 없다. 미라의 남동생 케빈은 2020년 울혈성 심부전과 폐렴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일곱 명의 손주가 있지만 아직 어리다. 손녀 토시는 현재 그녀와 함께 일하고 있지만,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다. 미라는 이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지분을 직원들을 위한 신탁에 맡겨, 그들이 공동으로 나카시마 제품을 계속 만들 수 있도록 할 생각이다. “오랫동안 고민해 왔어요. 멀리서 소극적으로 감독할 수도 있지만,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려면 이곳에 있어야만 해요. 매일 가게에 가서 무언가를 표시해 두거나, 그림을 한두 점 그리거나, 고객들과 소통하거나, 나무 더미를 뒤져서 고객이 원하는 것과 어울리는 게 있는지 찾아봅니다.” 미라의 목표는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을 깨우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진화할 수 있을까?’에 가깝다. 맨해튼의 빈티지 디자인 갤러리 ‘폼 아틀리에(Form Atelier)’의 공동 설립자 퀴 응우옌(Quy Nguyen)이 말했다. “진화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큰 존중을 표합니다. 나무에 비유하자면, 그녀는 또 하나의 가지입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추종자들이 생긴다면, 그들은 더 많은 가지가 되어 잎이 될 것입니다.”
조지 나카시마는 동서양 문화가 독특하게 혼재된 삶을 살았다. 1905년 워싱턴주 스포캔에서 일본 이민자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MIT로 진학해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파리로 건너간 나카시마는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접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건축가 안토닌 레이먼드 밑에서 일했다. 레이먼드를 통해 그는 인도 퐁디셰리로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거대하고 부유한 아슈람(영적 공동체)의 사적 거주지인 골콘데 기숙사의 건축 설계를 맡았다. 이는 그에게 결정적인 시기였다. 나카시마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아슈람의 문화와 가르침에 깊이 몰입했다. 인도 체류 기간 동안 그는 목공을 접하게 되었고, 생애 첫 가구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건축 분야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처음부터 끝까지 디자인 과정을 자신이 직접 주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는 것을 깨달았다.
1940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야망은 달라져 있었다. 이제 그는 목공예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1942년, 그를 포함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그중 3분의 2는 시민권자였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에서 쫓겨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며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이곳은 일반적으로 ‘수용소’라고 불리지만, 오늘날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러한 완곡한 표현을 거부한다.) 미국의 위협으로 낙인 찍힌 그는 아내 매리언, 갓 태어난 딸 미라와 함께 아이다호 시골에 1년 동안 수감되었다. 그러다 전 상사 레이먼드가 그의 석방을 후원하고, 뉴호프에 있는 자신의 부지에 나카시마를 고용하면서 비로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퀘이커 교도인 이웃 농장에서 일한 대가로 처음으로 3에이커 크기의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카시마는 가구 제작으로 성공을 거두며, 브랜드 ‘놀(Knoll)’을 위해 가구를 디자인하고 목공예가로서 꾸준히 명성을 쌓아갔다. 1972년, 넬슨 록펠러가 그에게 200점 이상의 작품을 의뢰했을 때쯤, 나카시마는 이미 재능 있는 장인으로 자리매김한 상태였다. “아빠는 서부 해안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빠는 뉴호프를 좋아하셨어요. 이 근처에 사는 예술가들을 좋아하셨고, 시골 풍경도 좋아하셨죠. 우린 이곳의 나무와 언덕, 바위 같은 것들 사이에 살고 있잖아요. 아버지는 나무를 사랑하셨어요.” 미라가 말했다. 나카시마는 깔끔한 선과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미드센추리 디자인의 과감한 단순함과 경이로운 자연이 빚은 문양을 결합했다. 예를 들어 나무 고유의 복잡한 무늬는 벤치나 테이블의 장식적인 가장자리가 되기도 했다. 다른 목공예가들은 나무 조각의 구조적 결함, 예를 들어 갈라진 틈이나 큰 균열을 거부할지 모르지만, 나카시마는 종종 바로 그 결함을 상상력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1981년 저서 <나무의 영혼(The Soul of a Tree)>에서 오래된 영국산 나무에서 얻은 커다란 나무 판자를 묘사하며 이렇게 썼다. “일반적인 고급 목재 시장에서는 사실상 자연이 버린 것과 다름없는 이런 판자를 별로 쓸모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쓰레기 더미에서 이런 거대한 판자들을 구해내곤 했는데, 운이 좋으면 그것들에게 훌륭한 가구로서의 두 번째 생명을 줄 기회도 있다. 울퉁불퉁한 요철과 ‘사마귀’ 결 같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나무 조각을 정교한 가구로 다듬어내는 일은 거의 부활의 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미라에게 가족의 수용소 생활에 대해 아버지와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많은 질문을 드렸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은 원래 그런 것 같아요. 특히 불쾌한 일이 있으면 그냥 입 밖에 내지 않죠. 전쟁 때도 그랬어요. 아무도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미라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가 짧은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자 고객들은 주문을 취소했다. 어떤 이들은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받게 될 거라 여기며 할인을 요구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장례 미사에서 가톨릭 신부조차 “그 손은 이제 멈춰 있습니다”라고 낭송했다. 성가대석에 서 있던 미라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잠깐만요, 우린 아직 여기 있는데’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처음에 미라의 어머니 매리언은 미라가 가구를 만든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도, 이 사업은 불행한 비극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카시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랜 단골 고객인 아서와 에블린 크로스닉 부부의 프린스턴 자택이 화재로 전소된 적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 부부는 나카시마의 작품 112점을 소장했다. 미라의 말에 의하면, 부부는 모든 것을 다시 마련하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조지 나카시마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 당시 어머니는 도면을 하나도 보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설계해야 했죠. 때로는 디자인을 다시 구상하기도 했지만, 크로스닉 부인은 보험금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보험사를 통해 성실히 처리해 주었어요. 덕분에 우리는 약 3년 반 동안 일을 계속할 수 있었죠.”
(왼쪽부터) 코노이드 스튜디오의 곡선형 지붕 아래 전시된 나카시마의 작품들. 메인 하우스의 아사노하 문양 창문.
때때로 쓰레기 더미에서 거대한 판자들을 구해내곤 했는데, 운이 좋으면 그것들에게 훌륭한 가구로서의 두 번째 생명을 줄 기회도 있다. 울퉁불퉁한 요철과 ‘사마귀’ 결 같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가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나무 조각을 정교한 가구로 다듬어내는 일은 거의 부활의 행위나 다름없다.
미라와 나는 리셉션 하우스에 앉았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가 록펠러 가문과의 작업으로 자금이 넉넉해진 후 1970년대 중반에 지은 두 번째 집이다. 부모님의 친구였던 이사무 노구치가 만든 커다란 와시 종이 램프가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 자작나무와 호두나무로 만든 넓은 마루, 모자이크 페니 타일로 장식된 환상적인 욕실을 갖춘 아름다운 집이지만, 매리언은 1946년 바로 옆에 남편이 지은 훨씬 소박한 집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이곳으로 완전히 이사하지 않았다. 리셉션 하우스는 대부분 비어 있지만, 미라가 가끔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결국 밥 헌시커라는 홍보 담당자가 가족들을 설득해 미라가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미라에 관한 짧은 기사가 <아키텍처럴 다이제스트>에 실렸다. 미라는 하버드 대학교와 도쿄의 와세다 대학교에서 수학한 정식 건축가이다.
그녀는 도쿄에서 3년 동안 거주하며, 건축가인 첫 남편을 만났다. “반에서 가장 뛰어난 도면 작성자였던 그는 11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사람으로, 내 과제들을 해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죠.” 하지만 일본에서 생계를 꾸려나가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일본을 떠나 가족과 함께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1969년, 조지 나카시마는 자신의 집 건너편에 20에이커의 땅을 사서 미라 부부를 위해 집을 지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이사했다. “어쩌면 약간의 회유책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비록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해 1975년에 이혼했지만, 미라는 그 이후로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미라의 첫 남편은 그녀가 전업주부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부모님 곁에 살게 되면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과 자유를 얻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몇 시간씩 쪼개어 일했고, 네 자녀가 모두 학교에 다니게 되자 점점 더 많은 시간이 생겼다. 부모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라는 부모님에게서 몇 번이나 해고 당하기도 했다. “시키는 대로 안 하거나 부모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건강보험 같은 걸 들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죠.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공예가가 되기 전, 미라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다. 남동생 케빈이 그녀보다 12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외동딸과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젊은 목공 중 한 명이 그녀를 프린스턴으로 초대해 자신의 가족과 함께 민속 춤을 추자고 했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코더를 배우기 시작했고, 결국 고등학교 시절에는 플루트와 피아노까지 배우게 되었다. 하버드에 합격했을 때, 그녀는 음악과 수학을 전공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처럼 건축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아니, 넌 음악을 할 게 아니라 건축을 할 거야’라고 하셨을 때, 저는 ‘그래, 그건 할 수 있겠네’라고 생각했어요. 꼭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인정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며 일할 수 있어 정말 운이 좋아요.” 그녀는 첫 번째 결혼이 파탄난 후 같은 목공예가인 남편과 만나 수십 년간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손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요. 뇌가 다르게 발달하거든요.”
내가 방문한 날, 나카시마가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지은 코노이드 스튜디오의 아치형 지붕 아래에는 다양한 나카시마 의자 시제품들이 임시로 옮겨져 사슴 떼처럼 모여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주저 없이 ‘미라’라고 대답했다. 1950년 아버지가 딸의 이름을 따서 지어준, 셰이커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아담한 의자다. 하지만 내 시선을 사로잡은 의자는 ‘콩코르디아’다. 등받이가 거의 없고 좌석이 평평한 세 발 의자인 이 제품은 미라가 클래식 음악가들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지금까지 제가 만든 작품 중 가장 상징적이고 성공적이며, 아버지의 디자인과는 가장 차별화된 작품일 것”이라고 인정한다. 첼리스트가 활을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무런 제약 없이 악기의 고음역을 연주하는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콩코르디아 챔버 플레이어스의 연주회에 갔을 때, 무대 위에서 연주자들이 그 못생긴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음, 내가 그들을 위해 의자를 디자인해 줘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작품이 세상과 맺는 연결고리, 특히 그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하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왼쪽부터) 작업장이자 메인 숍에 있는 미라. 목재 창고에 있는 목재 판자. 작업대와 도구들, 테이블 위에 쌓인 의자들.
Credit
- 글/ Thessaly La Force
- 사진/ Victoria Hely-Hutchinson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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