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 경쟁 부문 '누벨바그'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와의 대화
12월 국내 개봉을 앞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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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영화는 예술과 삶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다.” 장 뤼크 고다르의 이 말처럼, 지금 우리가 마주할 세 편의 영화는 그 본질에 닿고자 하는 증거일지 모른다. 극장이 사멸해가는 시기, 그럼에도 우리를 끊임없이 영화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세 감독의 목소리.
영화를 만드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임기응변하는 거죠. 통용되는 예술의 이미지와는 달리, 영화 제작 과정은 서사시나 영웅적인 전투가 아닙니다.
반항의 세대, 리처드 링클레이터
영화 인생 40년.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여전히 비주류이고, 여전히 독립적이며 근사하다. 6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청년 같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나타나 악수를 청한 그는 가벼운 농담으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며 편안하게 나를 맞이한다. 공놀이를 즐기던 스포츠 소년은 괴짜 청소년기를 거쳐 텍사스주의 첫 아트 영화관 가운데 하나인 ‘오스틴 영화 협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고, 그 경험을 작품에 잘 녹여냈다. 스스로 현대적이며 자유롭고, 쿨하고 열정 가득하다고 자부하는 감독들은 많지만, 까다로운 그의 필모그래피보다 한 시대상을 잘 나타내는 영화들은 없을 것이다. <슬래커>로 처음 이름을 알린 링클레이터는 1990년부터 끊임없이 재충전되는 창의력으로 생동감 넘치는 영화의 어떤 초석을 놓았다. 다수의 단편영화(젊은 날의 다니엘 존스턴이 출연한 <우드쇼크>는 실로 최고였다)를 비롯해 <멍하고 혼돈스러운>을 통해 끝나가는 청소년기를 향한 잊지 못할 찬가를 선보인 링클레이터는, 1995년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내놓았다.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꿈결 같은 동행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남아 있다. <비포 선라이즈로> 첫 대중적 성공을 거둔 링클레이터는 이어서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이라는 두 편의 속편을 공개한다. 그리고 2014년, <보이후드>라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숭고한 기록을 통해 범상치 않은 촬영 방식에 관한 애정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촬영하며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배우 패트리샤 아퀘트에게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안겨주었다. <뉴튼 보이즈> <스쿨 오브 락> 등 몇 편의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도전하기도 했지만, 이 텍사스 출신 감독의 작품 세계는 저예산 영화와 대형 프로젝트, 10대 영화와 사랑 이야기를 넘나들며 맹렬한 독립성과 다양함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감독의 33번째 연출작인 <누벨바그>가 추구하는 것도 이같은 정열과 생명력이다. 영화를 통해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네 멋대로 해라>라는 신화의 탄생을 그만의 당돌한 방식으로 재현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선보인 그의 신작은 영화, 웃음, 삶에 대한 관념들을 능숙하게 다루며 고다르의 첫 장편영화에 빛나는 헌사를 바친다. 나아가 당시 ‘제7의 예술’로 불린 영화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위대한 영화로부터 위안을 얻는 세계에서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는 약속과 함께.
하퍼스 바자 <네 멋대로 해라>의 제작기를 소재 삼아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네 멋대로 해라>는 지금 봐도 놀랄 만큼 현대적이죠. 20살 때 아버지와 함께 처음 그 영화를 봤는데, 65세가 된 지금도 감동은 여전합니다.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그 당시 한 달 뒤에 다시 보러 갔는데, 갑자기 심지에 불이 붙은 느낌이 들었어요. 특히 강렬하게 다가왔던 건 그 미친 듯한 자유로움이었죠. 별다른 각본 없이 길거리에서 순간을 포착하고, 떠오르는 방식대로 촬영하는 모습. 바로 그 창의성이 제 관심을 끌었어요. 영화를 따라 우리는 1959년으로 돌아가게 되죠. 그 시절은 누벨바그 운동과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로 인해 영화계가 한창 들떠 있었고, 장 뤼크 고다르 감독이 생애 첫 영화를 연출하던 시기였습니다. 정말 특별한 시대였죠. 그 시대 영화인들은 두려운 게 없었어요. 망설임 없이 실험하고 규칙을 전복시켰죠. 저는 그런 새로운 에너지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사료, 사진,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하며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재구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하퍼스 바자 제작 과정 영상에서 (특히 샤넬과 협력해 만든) 진 시버그가 입었던 옷 등 의상의 솔기를 직접 살펴보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모든 요소가 정확히 들어맞도록 세부적인 사항까지 일일이 확인하더라고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맞아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아, 완벽해. 어, 머리 건드리지 마. 이부자리도 정리하지 마. 잘 하고 있어”라고 말하는 감독의 모습이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제게는 매우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말씀대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꼼꼼히 다듬으며 정반대의 길을 갔죠. 그 점이 참 재미있었어요.
하퍼스 바자 누벨바그 시대를 대표하는 감독들이 그러했듯이, 당신도 영화는 삶의 연장이어야 한다는 점을 늘 의식해왔다고 말했죠. 어떤 의미인가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제가 어렸을 때 영화의 역할은 중요한 사건, 대서사를 들려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평범한 인간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죠. 히치콕의 작품 같은 할리우드 영화들은 연출자의 인생을 담고 있지는 않죠. 감독 고유의 터치를 찾아볼 수 있는 정도이고, 영화를 통해 한 개인의 유년시절이나 직접적인 경험을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어요. 그러다 누벨바그의 물결과 함께 변화가 찾아왔고, 그 무엇이든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죠. 일례로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의 제스처’, 즉 관객에게 제안하는 일종의 여정으로 여겼는데 그의 이런 관점이 제게 영감이 되었습니다. 트뤼포와 같은 감독들을 발견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어요. 평범한 삶도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거든요.
하퍼스 바자 그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가 ‘사랑의 제스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나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여행을 즐길 만큼 가정 형편이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께서는 자식들이 문화예술을 가까이 둘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셨어요. 창의성은 우리 일상의 일부였죠.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림을 그리셨고, 저는 나무를 깎거나 손으로 이것저것 만드는 걸 즐겼어요. 14살 무렵, 사촌과 함께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가지고 놀며 촬영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죠. 가족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직접 만든 결과로 실험하곤 했어요. 일찍이 창의력의 세계에 빠져 지낸 경험이 지금 제 세계관을 형성한 것 같네요. 그러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충격이 매우 컸어요. 갑작스레 성인이 된 저는 그 모든 혼란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죠.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느꼈기에 학교에도 정을 붙이지 못 했고요. 공식적인 틀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에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 했죠. 그래서 영화와 예술이라는 평행 세계로 도피하는 편을 택했고, 때로는 현실보다 그곳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당시 야구를 했기에 선수 생활도 고려해 보았지만 영화가 점차 제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고, 언젠가는 이 세계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죠.
하퍼스 바자 두 번째 장편영화 <슬래커>는 그런지 열풍이 한창이던 1990년에 개봉했습니다. <슬래커>를 촬영할 당시에 당신의 영화가 특정 청년층, 더 나아가서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선언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나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재미있네요, 그 촬영 중 종종 고다르를 떠올렸거든요.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난 지금 뭔가를 시도하고 있어.” 나 말고는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도 없는 독특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주류의 취향을 벗어난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요. 고다르는 1959년에, 저는 1980년대 말에, 마치 각자가 자신만의 영화 혁명을 겪고 있는 것 같았죠. 고다르에겐 본인의 작품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확신이 명확했지만 제겐 그런 게 없었어요. 그는 이미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저는 예산도 없이 무수한 불확실성을 안고 영화를 조각조각 만들어나가고 있었죠. 사실, 영화가 상영이 될지조차 상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배급사가 생기고 대중이 반응하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게 기적인 것만 같았죠. 희망을 거의 버린 상태였거든요. 영화계에 뛰어들다니 내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하고.
하퍼스 바자 그렇긴 하지만, 미치지 않은 예술가가 어디 있겠어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맞아요. 결국 중요한 건 나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진실된 자세로 대하는 겁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꿈을 간직한 채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이 일에 필요한 인내심을 가지고 수년간 작업해왔어요. 그게 바로 제가 고다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슬래커>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거울이 되는 동시에, 주류 가치관과 단절된 채 주변부에 존재하는 세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자 했어요.
하퍼스 바자 고다르 감독은 “여러 종잇장을 하나로 묶는 것은 여백과 다름없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죠.
리처드 링클레이터 맞아요! 한때 여러 기관들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보이던 시절이 있었죠. 대안 문화에도 진정한 호기심을 가졌었고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요. 오늘날에는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대중에게도 기관에게도 관심받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퍼스 바자 그런 업계에서 어떻게 독립성을 유지했나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시기를 잘 타고 난 것 같아요. 이전 세대와 달리 저는 할리우드에 발을 들일 필요가 없었어요. 그전만 해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공포영화 같은 특정 장르를 찍고 싶은 거라면 모를까. 예를 들어 조지 로메로는 피츠버그에서도 충분히 영화를 만들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면 모두 LA로 가야 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어요. 첫 영화 <슬래커>를 만들고 배급사를 찾는 데 성공했거든요. 덕분에 그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갈 수 있었고, 제가 살던 곳을 떠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비용이 더 저렴했거든요. 이 단순한 이유로 제작진을 설득시켰죠. 이런 작업 방식이 이제 제겐 일종의 습관이 되었고요. 하지만 이건 기질 문제이기도 해요. 저는 다시 업계의 중심부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여전히 스스로도 놀랍죠. 마치 그 누구도 제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한 채 그물망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에요.
하퍼스 바자 창작은 인간에게 필요한 ‘낙관적 활동’이라고 말씀하셨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낙관이 부족하다고 느끼나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대체적으로 분위기가 밝다고 말할 순 없죠. 하지만 저는 그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저항합니다. 우리 삶에 창의적 행위는 중요해요. 전반적인 분위기가 좀 어둡다고 해도, 반짝하는 희망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죠. 영화 제작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구체적인 적도 존재하지 않고, 없는 살림이어도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을 다 계획해놨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도 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고, 그때그때 맞는 대처 방법을 찾는 겁니다. 그 과정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통용되는 예술의 이미지와는 달리, 영화 제작 과정은 서사시나 영웅적인 전투가 아닙니다.
하퍼스 바자 꿈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리처드 링클레이터 어릴 적에는 영화감독이 아닌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랬다면 제 커리어는 일찍 막을 내렸을 것이고, 오늘날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짐작도 안 가네요. 결국 제가 살아온 예술가의 삶은 10대 시절에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예요. 만약 과거로 돌아가 젊은 날의 저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40년 후, 너는 성공을 이룰 거야. 영화도 만들고, 커리어도 쌓고,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죠. 약간의 운도 필요해요.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운이 따라주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지만, 저는 제게 주어진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 <누벨바그>는 12월 국내 개봉 예정이다.
Credit
- 글/ Florine Delcourt
- 사진/ Jean-Louis Fernandez, 오드(스틸)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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