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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의 도른자, 당신입니까?

‘도른자’에 대해 프로파일링하다가 마침내 그들을 이해해버리게 된 사연.

프로필 by BAZAAR 2024.01.03
 
부츠는 Christian Louboutin. 체어는 Fritz Hansen.

부츠는 Christian Louboutin. 체어는 Fritz Hansen.

분노를 동력 삼아 일하던 시기가 있었다. 매일 동료들과 젊고 유능한(하다고 믿는)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는 상사의 무능을 성토하면서 동시에 관심과 인정을 받길 바라던 주니어 시절 이야기. 30대 중반을 향해가는 지금, 평균 2~3차례 이직을 경험한 나와 친구들은 이끼가 끼지 않도록 바지런히 구르는 돌 같은 실무자이거나 설익은 관리자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더는 유니콘 같은 회사나 완벽한 멘토를 꿈꾸지 않는다. “10년 넘어도 주니어처럼 일하는 사람들 천지. 시니어는 역량이지 연차가 아님.” 댓글을 보면 서늘하다. 불쑥 고단한 날엔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삶이 괴롭다면 그냥 평소보다 더 많이 먹고 평소보다 더 많이 자라.” 쇼펜하우어의 베스트셀러 속 문장에 위안받으며 냉온탕을 오간다. 
새해를 앞두고 ‘일잘러를 위한 효율성, 단순함, 셀프 브랜딩’ 같은 키워드로 가득한 서점 매대에서 <사무실의 도른자들>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집어 든 건, 억눌린 보상 심리였을지 모르겠다. 저자인 뉴욕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 테사 웨스트는 20년간 3천 명을 인터뷰한 뒤 직장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이상한 사람들의 유형을 7가지로 나눴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응하는 팁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먼저 강약약강형. 최고 결정권자를 포섭한 다음 툭하면 선을 넘는 라스푸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당하면 똑같이 당한 사람들을 모으고, 평판에 민감한 그가 두려워할 법한 인맥왕을 아군으로 곁에 두라고 조언한다. 성과도둑형은 자신의 성과를 나눠주는 일까지 마다 않다가 더 큰 성과를 가로채는 이들이다. 끝없이 아이디어를 브레인스토밍하거나 비슷한 성향이 모인 조직에서 흔한 케이스. 프로젝트 시작 전 명확히 업무 시간과 역할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불도저형은 무능한 상사의 특징과는 거리가 멀다. 막강한 네트워킹과 전문성으로 무장하기에 정면으로 들이받기보단 팩트를 제시하고 회의할 때 시간 할당제를 마련해 발언권을 동등하게 만들길 권한다. 또 기만을 일삼는 가스라이팅형은 사회 초년생들이 피해자가 되기 쉽다. 쭈뼛거리며 직속 상사에게 바로 말하기보단 회사를 5년 이상 다니거나 그가 상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 ‘사회적 참고인(Social Referent)’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밖에도 팀워크에 기대어 눈에 보이는 일만 끄적거리는 무임승차형, 자기 불안을 직원에게 전가시키는 통제광형, 늘 자리를 뜬 채 혼자 여유로운 불성실한 상사형까지, 언제 만나도 낯설지 않을 군상들이 사례로 이어진다.
 명쾌한 대응법을 파악한 다음 나는 의도치 않게 건설적인 결론을 내려버렸다. 우리는 누구나 사무실의 도른자가 될 수 있고, 몇 가지 페르소나를 동시에 지닌 ‘멀티 도른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지난 상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컨펌을 차일피일 미루며 불성실한 상사 유형에 가깝던 선배는 우선순위 없이 수많은 업무를 저글링하다가 번아웃까지 겪고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자정이 넘은 주말에 잡무까지 감시하던 선배는 큰 그림은 못 보지만 자기 일은 기똥차게 잘하던 완벽주의자였으며, 관리를 잘해서 승진했다기보다 일을 잘해서 승진한 것이었단 걸 비로소 깨닫게 됐다. 
오랫동안 나는 좋은 관리자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회사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해왔다. 과연 미숙한 나란 인간이 반면교사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사표를 내지 못하고, 덕망 있고 유능한 상사가 될 수 없다면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남는다. 재빠르게 도른자를 골라내 맞서거나 내가 도른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방하거나. 냉정하게 봤을 때 10년 뒤쯤 나는 무임승차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유형이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비율은 가장 낮은 7.8%에 불과하다. 나는 중재자에 가깝지, 싸움을 거는 성미의 사람은 아니니까 체력과 일에 대한 흥미가 줄고 유능한 팀원들을 만나게 되면 충분히 그렇게 될 것도 같다. 반대로 신경증이 도진 상태에서 능력 밖의 업무를 맡았을 때엔 후배들을 옭아매는 통제광형이 될 지 모른다. 이 점을 직시하니 놀랍게도 두려움이 꽤 해소되었다. 
현대인에게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월급이라는 보상 외에도 환희와 환멸을 오가며 자기존재 증명 이상의 증표가 된다. 모로 가든 성과만 내면 되고, 성과에 따라 공정함마저 평가하는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도른자가 될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다. 희망적인 시그널은 오늘날 점점 사람들 사이에서 관리자의 유형이나 능력에 대한 담론이 퍼지고 있다는 거다. 댓글 하나에 CEO 리스크가 주가를 좌지우지하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나는 이 터널을 정면돌파하고 싶어졌다.   
 

Credit

  • 에디터/ 안서경
  • 사진/ 김래영
  • 어시스턴트/ 허지수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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