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지에게서는 무심한 강단 같은 게 느껴진다. 쉽게 타협하진 않을 것 같은, 관찰하지만 관찰 당하지 않을 것 같은, 온도로 치자면 뜨거움보다는 차가운 쪽. 그가 이번에 넷플릭스 시리즈 〈썸바디〉에서 성소수자 무당 ‘목원’을 연기했다.
화이트 티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넷플릭스 시리즈 〈썸바디〉 예고편만 봐도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됐다. 소셜 커넥팅 앱 ‘썸바디’를 매개로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어떤 작품이고, 어떤 캐릭터를 연기했는지?
일단 ‘섬’이라는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섬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어떤 남자와 연관된 사건으로 나를 포함한 세 여자가 이 남자를 쫓는 내용이다. 제가 맡은 ‘목원’이라는 친구는 필연적으로 숨기거나 혹은 묻어두고 있어야 하는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극 중에서 무당이라는 직업이 그렇기도 하고, 세 여자의 관계에서도 말을 아껴야 하는 상황. 나머지 두 여자가 이 남자를 쫓는 과정을 목원이 많이 도와주는데, 신내림을 받았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잖나. 그런 것들을 최대한 지키면서 친구들을 도우려고 한다.
‘성소수자 무당’ 역할이라…. 어떻게 접근했고 준비했는지도 궁금하다.
일단 감독님이 원하신 목원이라는 사람은 좀 푸근하게 나머지 인물들을 품어주는 사람이었으면 하셨다. 살을 찌워달라고 하셔서 10kg을 찌웠다. 의무적으로 먹고 자고 그렇게 두 달 만에 찌웠다. 한 5kg까지는 행복했는데, 이후부터는 정체기가 오면서 ‘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지?’ 계속 체크하면서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친구가 성소수자인 건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캐릭터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있어 성에 대한 제한 없이 사람으로서 좋아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중요하다.
그전에도 사주는 봤었는데, 신점은 이번에 처음 보러 다녔다. 알아보니 굿도 지역마다 다르고, 모시는 신마다 형태도 다 다르더라. 되게 여러 가지를 많이 보러 다녔다. 극 중에서 장군신을 모시는 무당이라, 장군신 모시는 분들 영상도 많이 찾아보고.
재킷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화이트 셔츠 칼라는 Ann Demeulemeester by Mue.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처음에는 영령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했는데, 극 중에서 제 신어머니로 나온 실제 무당 분이 작품을 위해 조언해주시는 것도 듣고, 굿 하는 것도 배우러 다니고 하다 보니까 제가 듣고 본 것을 믿지 않으면, 이 연기를 할 수가 없겠더라.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존중하고 믿기로 마음을 먹게 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이런 영역이 있구나, 정확하게 알게 됐다.
작품 때문에 자른 것이지만,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 개인적으로는 비로소 김용지라는 배우의 오라가 완성된 느낌이랄까. 스스로 쇼트커트를 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감독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캐릭터가 성소수자라서 그런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머리를 자른 건 절대 아니라고, 이전 드라마에서 제가 보여줬던 이미지들과 좀 상반된 모습이기를 바라셨다. 원래 긴 머리로 좀 ‘걸리’한 이미지로 많이 보여졌는데, 이번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서 나도 반가웠다. 일상에서는 일단 옷 입을 때 굉장히 제약이 많다. 이 짧은 머리에 막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면 너무 어색해서 옷차림도 많이 바뀌었다. 편리함은 뭐 엄청 늘었지. 특히 샤워할 때 거의 5분이면 끝이다. 올인원으로 샤워실에 제품 하나 갖다 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웃음) 머리 자른 지 1년 3개월 정도 됐는데, 공개한 지는 2개월 정도밖에 안 됐다. 워낙 드라마틱한 변화이고 작품으로 ‘짠’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런 이미지 변신이 제 스스로도 어떤 모드 전환이 된 느낌이 확 들기도 해서 좋다.
고교 3년을 캐나다에서 유학했다고. 유학 시절은 어땠나? 미성년일 때이고, 낯선 타국에서 혼자라 언어의 장벽, 외로움 같은 것들이 떠오르는데.
제가 있던 데가 저희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의 홈스테이여서 그래도 완전히 혼자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많다는 점이 좋았다. 한국 학교 생활보다 훨씬 좋았고, 자유로운 느낌. 언어적으로도 물론 배웠지만, 그 외 다른 수업도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요리 전공을 택했다. 요리는 기본적으로 특기보다는 취미, 그러니까 좋아해야 하는 분야라는 생각을 하는데. 요리가 왜 좋았나?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워낙 요리를 잘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가 해외여행 가시고, 아빠랑 밥을 해먹어야 하는 상황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만든 게 심지어 만두다. 그 어린애가 만두 속까지 혼자 만든 거다. 기억에는 별로 맛이 없었던 것 같긴 한데(웃음), 그런 거에 호기심이 되게 많았던 것 같다. 손으로 뚝딱뚝딱 하는 거. 지금도 뭔가를 만들고 있을 때 약간 명상이 되는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온전히 이 안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좋다.
레더 스커트, 초커, 장갑, 슈즈는 모두 Dolce & Gabbana.
쟁취하려고 노력해도 다 되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고 하기에도 모호한,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데. 이 모든 걸 다 제쳐두고 재미가 있다. 체력적인 힘듦,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불안함 물론 있지만, 이런 걸 잊게 할 만큼의 어떠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 같다.
롱 코트는 Vetements by Mue. 초커, 슈즈는 Dolce & Gabbana. 장갑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본인의 외모에 대해 ‘독특한’이라는 수식어를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얼굴에서 김용지만이 가진 분위기가 있다. 쉽게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관찰하지만 관찰 당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함, 강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고. 성별이 모호한 매력도 있고. 미안, 감상이 너무 길었다.
하하, 고맙다. 성별 구분이 어렵다는 말은 예전 모델로서 화보 작업 같은 걸 할 때 그런 면을 되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근데 연기할 때는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표현하기는 어렵고, 작품에서 원하는 걸 해야 하니까. 모델 할 때보다는 훨씬 더 여성성에 인접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고, 또 그렇게 보여주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보여지기도 하더라. 그리고 강단, 그건 단단한 것 같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누가 나를 막 흔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에게 흔들린다면 제가 그렇게 허락하기 때문에 되는 거고. 관찰 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건, 실제로 제가 남 관찰하는 걸 되게 좋아한다. 인간뿐 아니라, 강아지, 어떤 풍경, 식물이 자라나는 방향, 해가 이쪽에 있구나, 하는 관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관찰을 당하는 건 글쎄, 잘 모른다. 크게 관심이 없고 상관이 없달까. 누가 날 관찰한다고 느끼면 그냥 모른 척하는 편이다.
최근 영화 〈둠둠〉의 주연도 했다. 첫 영화 주인공 아닌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또 어떤 작업이었는지?
정말 너무 너무 좋았다. 결정된 날은 술도 한잔 한 것 같다. 제가 하기로 되면서 이 인물,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한 6만 배 정도 상승하면서 진짜 재밌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감독님과 이렇게 많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작품도 처음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환경이, 운이 좋게도 그런 좋은 환경에 놓여졌던 것 자체가 지금은 마냥 감사하다.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좀 더 주변을 많이 살펴보게 됐다. 스태프들, 이 프로덕션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같은 것들. 저에게 굉장히 큰 경험이었다.
데님 팬츠는 Victoria Beckham by Mue. 레더 재킷, 화이트 셔츠, 타이,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디제이 역할이었기 때문에 디제잉도 수준급으로 배웠다고 들었다. 적성에 맞던가?
아니, 적성엔 절대 안 맞고.(웃음) 어려운 것도 그렇지만, 그 라이브라는 게 너무 무섭다. 이 버튼을 누르면 음악이 꺼지는데, 급하다고 막 아무거나 누를 수도 없고. 항상 공연할 때 등에 땀 줄기가 흘렀던 기억이 난다. 음악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혹여나 내가 하는 모습 때문에 디제이에 대한 평가에 조금이라도 흠집 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마시고 음악 틀고, 윗집하고도 많이 싸우고 그랬다.
늘 안 해본 일,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동력을 얻는 사람이라고 했던 인터뷰를 봤다. 그런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잘 맞는 것 같다. 매번 다른 작품, 다른 캐릭터, 정답이 없고, 매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역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연기가 재미있나?
너무 재미있다. 제가 새로운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는 게 굉장히 많다. 근데 그 흥미가 재미까지 가려면 완전히 체화됐을 때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는 분야가 생각해보면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연기가 또 내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그게 또 약간 간드러진다고 할까.(웃음) 쟁취하려고 노력해도 다 되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고 하기에도 모호한,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데. 이 모든 걸 다 제쳐두고 재미가 있다. 체력적인 힘듦,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불안함 물론 있지만, 이런 걸 잊게 할 만큼의 어떠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위해서 하는 것 같다.
김용지의 연기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감상을 이야기할 때, 어떤 말이 들리면 기분 좋을 것 같나?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든다. 제가 작품을 많이 한 건 아니지만, 캐릭터가 다 달랐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색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많이 했던 터라, 지금은 그냥 나, 김용지스러운 걸 해보고 싶다. 현실 사회 안에 그냥 똑 떨어져 있는 일반적인 사람. 서사가 툭툭 튀어나가는 것 말고, 현실에 발 붙이고 흘러가는 역할. 보는 사람들이 ‘아, 김용지는 이런 사람인가 보다’ 하는 말을 들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을 많이 하고 싶다. 아직 확률 상 내가 어떤 작품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치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많이 해보고 ‘나 이런 게 좋구나’ 통계를 내볼 수 있게 많이 많이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