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종서 화보 인터뷰의 테마는 그의 SNS 속 한 문장으로부터 출발했다. “She acts like summer.” 전종서를 생각하면 왠지 여름이 떠오른다. 그는 여름에 태어났다. 데뷔작 〈버닝〉에서 전종서는 얇은 티셔츠를 걸친 채 여름의 석양 앞에서 홀로 춤을 췄다. 영화 〈콜〉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연쇄살인마 영숙을, 〈연애 빠진 로맨스〉에서는 데이팅 앱으로 만난 상대에게 “성병 안 걸린 것처럼 생겼다”는 말을 던지는 도발적인 함자영을 연기했다. 전례 없는 캐릭터, 한결같이 뜨거운.
그리고 지금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이미 5시즌이 방영된, 세계인을 사로잡은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의 한국판.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반항적인 캐릭터 ‘도쿄’ 역이 전종서에게 왔다. 데뷔 4년, 매해 영화를 찍었고 작품마다 전종서라는 이름 석 자를 찾아보게 만들 만큼 강렬했다. 그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전종서는 각인된다. 현장에서 전종서는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집중했다. 그와의 대화는 누구의 대화와도 같지 않았다.
스윔수트는 Daze Dayz. 재킷, 양말은 Celine. 스니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종이의 집〉 ‘도쿄’ 역에 전종서. 이보다 딱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원작과 가장 달라진 캐릭터라고 들었어요.
원작에서의 도쿄는 사고를 치고, 탈선하고,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죠. 감정적이고 굉장히 본능적인 인물. 근데 리메이크 버전의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도쿄는 거의 정반대였어요.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정적인 인물. 질서 유지를 시키고, 돈을 찍어내 훔치는 임무를 이루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를 정리하고 제거하는 인물. 캐릭터 성격 하나가 바뀐 것뿐 아니라, 제가 이렇게 바뀐 만큼 또 다른 캐릭터들이 가져가는 러브라인이나 돌발 상황 같은 것들이 좀 더 증폭이 됐어요.
저는 드라마가 처음이잖아요. 드라마의 제작 형태에는 반영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느꼈는데, 촬영 기법이나 연기를 하는 것도 영화보다는 좀 더 빠르고 단순한 게 있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적응하는 시간이 1~2개월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스윔수트는 Daze Dayz. 재킷, 양말은 Celine. 스니커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번에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가 이전 영화들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였다면 이제는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다는 인터뷰를 보고, 왠지 의외다 싶었어요.
사실 〈종이의 집〉 시나리오를 받기 전에 되게 오래 준비했던 작품이 있었어요. 두 작품을 두고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섰는데, 그 작품은 외국 영화였고 그때 코로나가 겹친 거죠. 전 코로나가 지나가면 너무 많은 게 바뀔 것 같았어요. 영화 시장도 진짜 없어질 것 같았고. 그때 정말 긴 고민을 거쳐서 드라마를 선택한 건, 제가 여태까지 했던 작품들이 폐쇄적이었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요. 가장 크게 놓쳤던 게 소통이 안 되는 것. 전에는 대중과의 소통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못 느꼈거든요. ‘그냥 연기만 열심히 잘하면 되는 거 아닌가? 본분에만 충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직 연기 시작도 못했는데?’ 이런 생각이 너무 커서 고지식하게 그것만 판 거죠. 근데 조금 유연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접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뭘까?’ 고민하다가 한국 드라마를 해보자, 결정한 거예요. 〈종이의 집〉을 찍으면서도 ‘이게 맞아? 맞는 거겠지? 맞는 거야!’ 속으로 계속 이렇게 고민하면서 찍었어요.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었나 봐요. 전에는 좀 자극적인 게 끌렸던 걸까요?
사실 저는 되게 보수적이고 고지식한데 아예 다른 역할을 많이 선택했잖아요. 알 수 없는 럭비공 같은? 20대 그 나이 대에만 할 수 있는 역할을 잘 만났다고 생각해요. 그런 걸 했어야 됐던 것 같고. 지금 와서 〈콜〉을 하라고 하면 그렇게 못할 것 같거든요. 〈연애 빠진 로맨스〉도 지금 하면 다른 느낌으로 할 것 같고. 왜 평소 우리도 보면 반스 올드스쿨 같은 신발을 훨씬 더 많이 신잖아요. 뾰족 구두보다. 지금은 그렇게 사고방식이 약간 달라진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고. 제가 생각이 어제, 오늘, 내일 기준으로 정말 많이 바뀌어요. 보편성이 추구되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 마음도 내일이면 또 달라질 수 있죠.(웃음)
브라 톱은 Marine Serre by BOONTHESHOP. 팬츠는 Ellonarc.
생각이 혼돈 속에 있는 걸 빨리 극복해야 한다기보다는 그냥 혼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제가 불안이 엄청 컸거든요. 연기를 하면 그게 좀 괜찮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데, 지금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연기는 내가 느끼는 최고의 재미인 것 같아요. 잠깐 불안을 잊고 자극에 빠져서 지내는 몇 달 동안이 재미있었던 거죠. 많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를 표현해보고 싶어, 디스토피아, SF, 미래 공상적인, 아예 감정이 배제된 로봇 같은 것도 해보고 싶고…. 지금도 불안하고 의심하고, 자신 없는 건 똑같아요. 근데 이 시기에 변화가 온 건, 더는 혼자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거.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감독은 배우가 있어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관객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어떤 작품을 선택할 것이냐에 국한되는 걸까요, 아니면 연기할 때 태도의 변화까지 가는 걸까요?
태도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쟤는 이렇다더라’, ‘쟤는 저런 루머가 있대’ 하는 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왜냐면 한국 사회가 너무 공인을 옭아매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들 역시도 그걸 해소할 출구가 없어서 그렇겠죠. 저는 연기로 해소하는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는 걸 봐주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동안 내 멋대로의 선택이었다면 앞으로는 그들이 좋아하는 걸 줘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또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지?’ 생각이 들 수도 있고요.(웃음)
전종서를 보면 연기를 굉장히 본능적으로, 동물적으로 한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근데 의외로 철저하게 준비하는 스타일이라고요. 시나리오를 엄청 파고, 연기 처음 시작할 때 반대하는 부모님을 설득하려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했다고도 하고. 또 할리우드 진출작인 〈블러드문〉 오디션 영상을 보낼 때도 장면 장면 다 따로 촬영해서 옴니버스 영화식으로 만들어서 보냈다면서요?
그렇게 준비하는 게 물론 저를 위해서 하는 것도 크지만, 이것도 상대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다 같이 한 개를 만들자고 하는 거잖아요. 당연한 매너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집중하는 것 같아요.
네이버 프로필에 ‘무남독녀’라고 표기돼 있는데, 직접 꼭 이렇게 표기해달라고 부탁했다면서요?
제가 너무 혼자 커서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늦둥이고, 우리 엄마 아빠가 내 친구들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은 게 싫고,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고. 집에 들어가면 너무 적막했어요. 부모님이 말수가 별로 없으시거든요. 그래서 저는 친구가 항상 중요했어요. 친구와 같이 살다시피 가족처럼 지냈거든요. 그러다가 나는 혼자구나, 내가 가는 길은 혼자 가는 길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구나, 그런 시기를 겪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외동이라 외롭다고 느낀다거나 부정적인 감정이 있진 않아요. 오히려 좋은 걸 더 생각해요.
톱은 Celine. 신발은 Jimi Choo.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예전에 〈바자〉와 인터뷰했을 때, 인간은 동등하다는 생각을 거의 매일 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요즘엔 어떤 생각을 주로 해요?
그랬어요, 제가? 그때는 스스로 자신도 없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끌어 올려주는 분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분들이 그렇게 대해주는 것에 동등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근데 요즘에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요. 일을 하다 보면 생각이 고여서 썩을 때가 있잖아요. 부정적일 때는 좋은 걸 계속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너무 좋아서 달려든 작품에도 너무 싫은 요소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특정 사람일 수도, 어떤 순간일 수도 있죠. 그럼 싫은 거에서 좋은 걸 보려고, 좋아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생각이 진짜 많이 달라졌네요.(웃음)
데뷔작이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잖아요. 칸 영화제에도 가고, 하루아침에 주목받게 됐죠. 아마 전종서에게는 데뷔작이 평생 따라다닐 텐데, 그건 배우에게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제가 〈버닝〉 촬영 들어가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나이키 헬스 가방 하나 메고 버스 타고 다녔거든요. 하루 용돈 2만원. 원하는 걸 먹을 수도 없어요. 외워야 되는 대본, 공책 들고 다니면서 외우고, 학원 갈 거 준비하고. 그때 툭 치면 쓰러질 정도로 살이 많이 빠졌는데. 그러다 정말 한순간에 바뀐 거예요. 그때 이창동 감독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콜〉도, 그 다음 작품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 안전하게 잘 올 수 있었을까요? 그때 교육을 잘 받았어요. 감독님이 “앞으로 사람들과 환경이 이렇지는 않을 거다. 이게 너의 비교 대상과 기준이 될 거다” 얘기해주셨는데, 지금도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감독님 영화 이후에 운 좋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업을 계속했다는 건 알아요. 은인 같은 작품이죠.
본인이 보기에 자신의 강점이 뭐라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싶은 거나 좋아하는 것, 가까워지고 싶은 것은 결국 갖는 것 같아요. ‘저 사람 너무 좋다’ 하면 그 사람과 있게 되고, ‘저거 해보고 싶은데’ 하면 그걸 하게 되고. 그게 꼭 돈이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뭔가를 원하면 그걸 어느 순간 갖게 되더라고요. 조심스럽지만 그 방법을 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톱은 Celine. 신발은 Jimi Choo.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전종서는 이상한 포즈를 거리낌 없이 해낸다. 요구하지 않아도, 아니 요구를 저만치 밀어놓게끔.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공간을 쓰고 싶어 한다. 반경을 정해주고 움직이는 걸 답답해 한다. 그래서 카메라 감독들이 힘들어 한단다.
전종서는 스스로를 보수적이고 고지식하다고 하지만, 어떤 틀 안에 가두는 걸 지독히 싫어한다. 생각이 계속해서 바뀌고, 바뀌는 생각을 그만큼 자주 들여다본다. 전종서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뭘 모르는지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한다.
〈종이의 집〉에 이어 전종서는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몸값〉 촬영을 마쳤다. 종말에 가까워온 지구 어딘가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고생으로 위장하고 장기매매를 하는 역할. 곧 〈콜〉의 이충현 감독과 함께 영화 〈발레리나〉 촬영도 시작한다. 경호원 출신의 주인공, 아름답고 무자비한 복수극이라는 게 작품 설명이다. 또 다시 어디로 튈지 모를 캐릭터, 하나같이 뜨겁다.
“제가 여름을 믿는 게 있어요. 좋은 일들을 생각하면 다 여름에 벌어진 거예요. 여름에 하는 일이 잘되고, 여름에 사랑에 빠지고, 여름의 기억이 더 미화돼요.”
더위는 지긋지긋해도 여름은 어딘가 늘 예측 불가능하고 다채롭다. She acts like Summer. 여름 같은 전종서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