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나리오가 쏟아진다고 들었어요. 여러 작품 중에서 〈설강화〉를 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가장 큰 이유는 글이죠. 글이 주는 힘, 이야기의 힘. 그리고 작가님과 감독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어요. 사실 〈D.P〉와 스케줄이 겹쳐서 참여하지 못할 뻔했는데 작가님, 감독님, 제작진이 제가 할 수 있는 환경을 기꺼이 만들어주셨어요. 그래서 더 책임감과 부담감이 생기더라고요. 믿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하니까요.
연기는 기본이고 외적으로도요. 이를테면 현장 분위기. 촬영을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든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사실 그럴 때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단 몇 초면 끝나요. 감독님께서 줄곧 그런 역할을 하셨는데, 그걸 보면서 옆에서 좀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태프들은 열 시간 넘게 마스크를 끼고 있잖아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마스크 때문에 웃어도 웃는 표정이 잘 안 보여요. 그래서 단순히 눈인사 하고 웃고 이런 거 말고도 뭔가 더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촬영 끝나고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애써줘서 고맙다고요.
재킷은 Maison Margiela by Yoox. 베스트는 Miter Gentle Man by BOONTHESHOP. 화이트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말한 대로 〈D.P.〉와 〈설강화〉가 맞물려서 진행됐잖아요. 수호라는 인물에 어떻게 집중했나요?
체력이 무너지면 멘탈도 같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체력을 키우는 데 신경 썼어요. 플레이어로서 저의 중심이 잘 잡혀 있으면 작품의 결이 다르다고 해서, 또는 촬영장이 바뀐다고 해서 크게 요동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게다가 수호에 대한 힌트는 대본 안에 다 있었거든요. 그래서 온종일 대본을 붙들고 살았던 것 같고요.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들을 관찰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그 사람의 감정을 흡수하면 리액션이나 표정이 더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1987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잖아요. 시대적 배경에 대해 미리 연구하거나 공부한 부분이 있나요?
제가 88년생이거든요. 1987년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시대죠.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기도 하지만 사실 정답은 다 대본에 있다고 생각해요. 대본을 잘 들여다보면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무엇보다 소품팀과 분장팀이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시대극이라고 해서 연기가 달라지지는 않잖아요. 그 시대 사람들도 다 똑같이 살았죠. 시대극과 현대극의 차이는 결국 소품과 세트, 미술, 분장이지 않을까 싶어요. 예를 들어 우리 작품에는 오렌지 주스 유리병이나 그 시대 과자 같은 것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도요.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여대생 기숙사 신 하나만 찍어도 1백 명에 가까운 인물이 나오는데, 일일이 분장하는 건 물론이고 사람마다 개성을 살렸어요. 다들 노력 많이 하셨죠.
셔츠는 Marni by Mue. 피케 니트 톱은 Isabel Marant Homme. 선글라스는 Gentle Monster.
시대극이든 현대극이든 인간 보편의 감정을 연기하는 건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라고 하면 좀 더 진중하고 진솔한 정서가 깔려 있잖아요?
휴대폰이 없었고, 편지를 주고받아야 했고, 그 시대만의 진정성 같은 게 있죠. 지금 편하게 문자 하고 영상통화 한다고 해서 진정성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만큼 더 애틋하잖아요. 연락이 안 되면 묵묵히 기다려야 하고. 시대극은 그런 맛이 있는 것 같아요.
수호가 어느 날 갑자기 여자대학교 기숙사에 숨어들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아까 지수 씨가 귀띔하기를, 그 장면을 촬영할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다고요.
이를테면 그룹 샷에서요. 카메라는 제 바스트를 찍고 그분들 중 상당수가 카메라에 안 잡혔거든요. 그럼에도 다들 열정적으로 연기를 해주셔서 정말 도움 많이 받았어요. 그 에너지가 촬영장 안에 가득 찼던 것 같아요. 열 시간 가까이 그렇게 연기를 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잖아요. 진짜 고마웠죠. 그 촬영이 끝나는 날, 감독님이 여대생 역할을 하셨던 한 분 한 분에게 꽃다발을 선물하셨어요. 한 분씩 나와서 마지막 촬영에 대한 소감을 말할 자리를 만들어주셨고요. 수호도 나와서 한마디 하라고 하셔서 제가 그랬죠. “도움을 주신 덕분에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제가 혹시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다른 촬영장에서 만나면 꼭 저한테 알은체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요.
오버사이즈 재킷은 Raf Simons by 10 Corso Como. 튜브 톱 원피스는 Rokh. 헤어핀은 Dior. 귀고리, 반지는 Cartier. 플랫폼 힐은 Jinny Kim. 스타킹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로 역을 맡은 상대 배우 지수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촬영마다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었어요. ‘원래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싶더라고요. 극 중에서 지수 씨의 연기가 결코 쉽지 않았거든요. 저도 대본을 보면서 어떤 감정 신에서는 ‘내가 이 배역을 맡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막막하고 가늠이 안 될 정도로요.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잘해나가는 모습이 놀라웠죠. 무엇보다 감독님의 피드백을 바로바로 흡수해요. 보통은 그걸 연기로 펼치기까지 일종의 버퍼링이 있기 마련인데 순발력이 대단하더라고요. 물론 노력도 어마어마하게 한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촬영에 조금 늦게 합류했는데 그 기간 동안 감독님과 수도 없이 미팅하고,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 작품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더라고요.
‘수호와 영로’에 대해 감독님은 어떤 디렉션을 줬나요?
특별한 주문이 있었다기보다 그냥 감독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 둘이 같은 앵글 안에 들어 있는 게 참 좋고, 잘 어울린다”고요. 억지로 뭘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주고받는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칭찬해주셨죠.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새삼 느낀 건, 참 열심히 살았더라고요.
2014년 데뷔 이후로 한 달 이상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찾아줄 때 열심히 하자’라고 생각하거든요. 저에 대한 니즈가 있을 때 더 열심히 해야죠.
공동체의 일이고, 제가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데에 감사하죠. 언제든 이러다가 갑자기 일이 끊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가죽 재킷은 Maison Margiela by Yoox. 니트 베스트는 Miter Gentle Man by BOONTHESHOP.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배우로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편인가요? 사명의식을 갖고 있는 편인가요?
배우라는 건 엔터테인먼트 종사자고 결국 서비스업이에요.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일이고요. 딱 그 정도지, 사명감은 너무 거창한 것 같아요. 책임감에 더 가깝죠. 그래서 직업의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 일을 최대한 잘해내고 싶잖아요. 저도 그래요. 안 되더라도 후회 없이,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죠.
아무리 직업의식이 투철해도 7년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면 지칠 것 같은데요.
번아웃이 왔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일이잖아요. 모든 직업이 다 이렇지는 않잖아요. 그게 버팀목이 됐던 것 같아요. 팬들과 대중들의 응원과 사랑이 느껴지면 아무리 지쳐도 계속 하고 싶어져요.
러플 장식 블라우스, 니트 톱, 팬츠는 모두 Celine Homme by Hedi Slimane.
제가 “안녕하세요, 멜로 장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닌 적은 없지만.(웃음) 기자님들이 그렇게 붙여주셨어요. 저야 감사하죠.
현실에서도 커플이 하나 생기면 주변에서 다들 그 두 사람이 잘되길 바라고, 응원하고 그러잖아요. 멜로드라마도 결국 비슷한 것 같아요. 작품 속 두 인물이 잘됐으면 좋겠는 마음? 그런 응원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요.
본인이 출연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 대해 “영화 속에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자존감에 대한 얘기다”라고 분석한 부분이 상당히 날카롭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설강화〉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나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두 남녀의 가슴 아프고 달달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
첫 방송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어떻게 시청할 계획인가요?
늘 그랬듯 가족들과 함께 보겠죠. 너무 떨려서 제대로 볼 수 있을지…. 어느 때보다 긴장돼요.
재킷은 Maison Margiela by Yoox. 니트 베스트, 팬츠는 Miter Gentle Man by BOONTHESHOP. 더비 슈즈는 Dior Men. 화이트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유독 이 작품이 떨리고 긴장되는 이유가 있나요?
〈설강화〉는 연기적으로 가장 벽에 많이 부딪혔던 작품이었어요. ‘내 한계가 이 정도구나,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 작품 내내 너무 어려웠고 어떻게 보면 자존감이 좀 낮아졌죠. 그만큼 주변에 의지를 많이 하기도 했고요. 감독님이나 지수 씨는 물론, 스태프 한 분 한 분에게요. 그러면서 느낀 것 같아요. 역시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요.
그러게요. 내년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인간 정해인이 되고 싶어요
배우는 직업일 뿐이에요. 조금 더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
정해인이 입은 스웨터, 팬츠는 Dior Men. 지수가 입은 패치워크 니트 톱은 Mouse by Mue.
정해인이 입은 스웨터, 팬츠는 Dior Men. 지수가 입은 패치워크 니트 톱은 Mouse by Mue.
정해인이 입은 스웨터, 팬츠는 Dior Men. 지수가 입은 패치워크 니트 톱은 Mouse by Mue.
정해인이 입은 스웨터, 팬츠는 Dior Men. 지수가 입은 패치워크 니트 톱은 Mouse by Mue.
〈설강화〉의 대본을 다 읽고 나서, 맨 처음 어떤 감상이 들었나요?
오디션을 보기 전에 대본을 받아봤는데, 제가 맡은 영로라는 인물이 무척 매력적이었어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영로가 갖고 있는 사람을 끄는 힘이 저한테도 전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서툴지만 서서히 성장해나가는 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드라마 촬영은 어떤 경험이었나요? 주연으로 참여한 첫 번째 작품이잖아요.
이 작품에 참여하면서 많은 분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잖아요. 이 드라마를 통해서 저라는 사람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니트 베스트는 & Other Stories. 튜브 톱, 팬츠는 Our Legacy by Beaker. 반지는 Cartier.
영로라는 인물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져요. 어떤 마음으로 연기했나요?
영로의 정의롭고 선한 모습을 중점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감독님과 영로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도 큰 도움이 됐어요. 감독님께선 영로의 통통 튀는 매력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심 같은 면이 잘 보여지기를 바라셨어요. 저도 영로가 되어 영로처럼 생각하고 영로처럼 행동하려고 했죠. 영로는 아직 시행착오가 필요한 어린 나이잖아요. 그만큼 사람들이 영로를 보듬어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니트 원피스는 Erdem by Mue. 헤어핀은 Dior.
영로와 지수의 닮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이 인물을 연기하면서 해방감을 느낀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말한 대로 매우 정의로운 인물이잖아요.
영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밝은 에너지를 전달하며 모두가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인물이잖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노력하는 부분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어느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가려고 모두를 끄는 모습, 이건 제가 배울 점인 것 같고요.
사전제작으로 진행된 만큼 촬영이 끝나고 꽤 시간이 흘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본인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드라마 속 한 장면이 있을 것 같아요.
사실 마지막 회의 마지막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데요. 이건 비밀이니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웃음) 나중에 마지막 회를 보면서 확인해주세요.
블랙핑크 활동과 병행하면서 이번 작품에 참여했잖아요.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진 않았나요?
영로와 지수는 사는 세상이 너무 달라서 오히려 혼돈이 오진 않았어요. 게다가 드라마 촬영장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모두가 저를 지수가 아닌 영로로 대해주시기도 했고요. 덕분에 영로에 완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스태프분들께 너무 감사했죠.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해서 이렇게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까지. 본인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중심’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나’를 잃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나를 잃지만 않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제 자신이 단단해야 주변 사람들도 더 잘 돌볼 수 있다고 믿어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그 사랑에 보답하려면 제가 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생각하는 배우 지수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촬영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해주셨던 조언이 큰 힘이 됐어요. 뭔가를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웃으며 촬영에 임했던 것 같아요.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웃으며 열심히 노력하는 게 제 최대 장점이 아닐까 싶어요.
작품을 찍는 내내 블랙핑크 멤버들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죠?
멤버들이 꼭 본방사수를 하겠다고 했어요. 촬영하는 동안에도 워낙 자주 연락하니까 늘 응원해줬고요. 멤버들이 너무 궁금해하니까 저도 힘이 나서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첫 방송은 어떻게 시청할 계획이에요? 배우 지수의 첫 번째 발돋움이잖아요.
사실 누구와 같이 볼 자신이 없어요. 집에서 혼자 보고 싶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두 눈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 아주 작은 틈새로 겨우 볼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