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와는 재작년 이맘때 부다페스트에서 만났죠. 당시 열심히 촬영한 〈트레드스톤〉이 올해 한국에서도 방영했고요. 2년 전, 참 열심이었던 본인을 마주하고 어떤 기분이었나요?
한동안 한국에서는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다들 제가 쉬고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요즘 왜 일을 안 하느냔 소리를 자주 들었죠. 그런데 사실 전 지금까지 쉰 적이 거의 없어요.(웃음) 시간은 조금 흘렀지만 그동안 제가 뭘 했는지 보여드릴 수 있어서 의미 있었어요. 작품이 잘됐든 안 됐든 결과는 전혀 상관없어요. 제가 얼마나 노력했고 안 했고와도 관계없죠. 그냥 〈트레드스톤〉이라는 작품 자체가 저에겐 인생의 선물 같았거든요. 그 시간이 떠올라서 새삼 마음이 좋더라고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직전이었잖아요. 새삼 유럽에서 지내던 그 시절이 꿈같이 느껴지진 않나요?
더 이곳저곳 쏘다닐걸, 더 자주 거리를 거닐걸, 그랬어요. 부다페스트는 야경이 예쁜 유럽 여행지로 손꼽히는 곳 중 하나죠. 게다가 서울의 한강처럼 시내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 있고요. 서울과 비슷하면서도 달라요. 그 특유의 분위기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물가도 싸요. 저렴한 가격에 바구니 한 가득 과일을 담을 수 있었죠. 장을 보면 부자가 된 느낌이 들었어요. 헝가리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루마니아 곳곳에 세트장이 있었고 저에겐 저마다 특별한 장소가 되었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다시 가보고 싶어요.
드레스, 이너로 입은 터틀넥 보디수트, 미니 ‘포켓’ 백, 삭스 부티는 모두 Burberry.
한국에 돌아온 뒤 참여한 작품이 〈해적: 도깨비 깃발〉이죠. 텐트폴 영화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꽤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다들 그런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20대 때는 배우로서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나 도전을 해나가는 게 더 중요했어요. 작품 전체보다 내가 맡은 캐릭터에 더 열정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작품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것에 더 의미를 두게 된 것 같아요. 같이하는 배우들이 이미 다른 작품에서 한 번씩 호흡을 맞췄던 분들이거든요. 이 사람들이라면 나도 재미있게 연기할 수 있겠다, 현장 가는 길이 즐겁겠다 어느 정도 예측이 되더라고요. 게다가 다들 근심 걱정이 많은 시기이니까요. 요즘은 코로나 블루를 넘어서 레드까지 왔다고들 하잖아요. 이럴 때 관객들이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죠.
실제 현장은 상상만큼 좋았나요? 일단 쌍검 액션 신부터 쉽지만은 않아 보이던데요.
안 힘든 현장이 어디 있나요?(웃음) 힘듦을 훨씬 뛰어넘을 만한 재미와 보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제가 맡은 ‘해랑’이 성별을 떠나 인간적으로 아주 매력적인, 진취적이고 리더십 강한 인물이라서 더 좋았어요. 이 작품에서 여성 배우는 저와 (채)수빈이 단둘뿐이거든요. 그런 데다가 저는 해적 단주라서 수많은 남자들을 아우르는 인물이에요. 다행히 여자, 남자를 떠나서 다 같이 으으 단합하는 분위기였달까요? 나중에는 성별 같은 건 기억도 안 나고 정말 다 함께 모험이라도 떠나는 분위기였죠.
가죽 크롭트 트렌치코트, 프린지 스커트, 이너로 입은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모두 Burberry.
어떻게 보면 영화라는 하나의 배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주연 배우는 해적 단주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솔직히 지금까지는 “나 아직 어리잖아” 하고 핑계를 대기도 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살짝 눈을 감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단순히 배우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나가는 작품의 일부로서의 배우라는 의식이 컸어요. 어쩌면 해랑이라는 캐릭터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배우는 아주 많은 시간을 그 캐릭터로 살잖아요. 역할과 완벽히 분리하기 어려워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면서 무엇보다 영화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잖아요. 시장 규모나 제작 편수는 말할 것도 없고 각각의 영화 현장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고 있어요. 〈해적: 도깨비 깃발〉 또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고요. 이런 시기에 극장용 영화를 만든다는 건, 배우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어쩌면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화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사실 마음이 아파요. 어렸을 때부터 이 일을 해왔지만 요즘에서야 크게 깨닫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봐주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땀과 열정을 쏟아부어서 탄생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요.
플래그 프린트 드레스, 이너로 입은 터틀넥 보디수트는 Burberry.
영화 팬의 한 사람으로서 극장 영화를 감상하는 문화 자체가 더이상 대중적이지 않은 미래가 올까봐 두려울 때가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대라는 게 있으니까. 저도 그렇고요. 극장 가는 걸 진심으로 좋아해요. 20대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쉬는 날에 혼자 영화관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보는 거였어요. ‘시네마 데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서 조조 영화부터 심야 영화까지 몰아 보곤 했죠. 사실 연인 사이에 제일 좋은 데이트 코스도 영화관이잖아요. 다른 공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가격으로 두세 시간 동안 몰입해서 즐길 수 있으니까. 이만한 대중문화가 없어요. 이 시기가 지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의 취미생활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드라마 〈해피니스〉도 곧 방영을 앞두고 있어요. 소재가 흥미롭더군요.
〈해피니스〉는 감염병을 소재로 한 작품이에요. 사람이 사람을 무는 ‘광인병’이라는 바이러스가 돈다는 게 기본 설정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아파트 하나가 봉쇄되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죠. 소재 자체는 좀비물과 닮았는데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결국 사람들 이야기예요.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잘 보여주거든요. 시대가 반영된 소재나 인간에 대해 얘기한다는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지금 딱 제 나이에 맞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참여하게 됐어요. 배우가 연기를 할 때는 어느 정도 만들어가는 부분이 있잖아요. 캐릭터를 정밀하게 세공한 뒤에 작품에 임하는 거죠. 그런데 이 작품의 ‘윤새봄’이라는 인물은 당장 내일 촬영장에 가도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더라고요.
재킷, 컬러 블로킹 보디수트, 쇼츠, 삭스 부티는 모두 Burberry.
팬들 사이에서 “한효주는 드라마 한 편을 마치면 특기가 하나씩 생긴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예를 들어 드라마 〈봄의 왈츠〉를 통해서 운전면허를 땄고, 〈동이〉로 해금을 배웠고, 〈트레드스톤〉 이후에 베토벤 소나타 8번을 능숙하게 칠 수 있게 되었죠. 이번 드라마가 끝나고는 뭘 얻었나요?
이번 드라마에서는 사람을 얻었어요. 안길호 감독님과는 첫 작업이었는데 디렉션이 너무 좋았어요. 빠르고, 정확하세요. 요즘 같은 때에 딜레이 하나 없이 12부작을 4개월 만에 다 찍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리고 배우들. 아파트 안에 봉쇄된 인물들인데, 극중 캐릭터뿐만 아니라 배우들 한 명 한 명이 다 재미있어요. 대놓고 웃기는 게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진짜 웃긴 사람들 있잖아요. 꼭 고양이 같달까요? 이런 사람들만 모아놓기도 쉽지 않은데.(웃음)
〈해피니스〉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 겸 작가 백현진 씨가 얼마 전 PKM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잖아요. 거기서 우리가 우연히 만났었죠. 처음에 두 분의 대화를 듣고 어느 미술 기자의 인터뷰인 줄 알았어요. 좀 신선한 인터뷰다 싶었죠.
작품에 관해서 물어보고 있었어요. “왜 이렇게 그린 건가요?” “여기 벽에 붙은 건 뭔가요?”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롱 슬리브 저지 톱, 유니언 플래그 모티프 스커트는 Burberry.
백현진 작가가 나중에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음악 때문인지 자기 전시가 쓸쓸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까 배꼽 잡고 웃었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 좋았다고요.
전시장 가운데에 화분을 하나 탁 놓고, 이 작품의 이름이 〈씨발〉이라고 하는데 웃기지 않아요?(웃음) 이끼 낀 돌이 하나 있고 그 주위에 그냥 돌들이 놓여 있는데 작품 이름이 〈구식 농담과 신식 농담〉이래요. 그런 위트가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아까 말한 ‘고양이 같은 동료 배우들’도 그렇고, 백현진의 작품도 그렇고. 재미와 즐거움을 발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 같네요.
어머, 좋은 말이네요. 30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바뀐 것 같아요. 그러려고 애쓰다 보니 실제로 재미있어지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지오메트릭 프린트 드레스, 보디수트, 퀼팅 장식 ‘롤라’ 체인 백, 삭스 부티는 모두 Burberry.
예전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쳐다보는 걸 힘들어했어요. 제 직업적 특성임에도 불구하고요. 최대한 조용히 지내고, 밖에도 잘 안 나갔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어요.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연예인이니까 쳐다보실 수도 있죠, 뭐.(웃음)
서른을 목전에 둔 스물아홉 무렵에 인터뷰로 만났던 거 기억해요?
저 어땠나요? 그때 힘들었거든요. 아홉수라고도 하잖아요. 티 많이 났어요?
울 코트, 이너로 입은 드레스, 모헤어 ‘아스트라’ 백, 삭스 부티는 모두 Burberry.
그때는 좀 뾰족했죠. 나를 지키려고 가시를 세웠어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솔직해졌어요. 사람이 좋은 면만 있을 순 없잖아요. 어렸을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약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기보단 감추려고 하고 속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답지 않은 다른 모습이 튀어나오기도 했죠. 때로는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계기도 됐지만요.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는 나의 단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그치, 내가 그런 게 좀 부족하지?’ ‘나는 그런 게 좀 약하지?’ 그게 사람들에게 보여진다고 하더라도 더이상 무섭지 않아요. 대신 “맞아, 나는 좀 그런 사람이야, 미안해”라고 사과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 인터뷰에서 액션물에 도전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것도 떠오르네요. 〈트레드스톤〉부터 〈해적: 도깨비 깃발〉 그리고 이번 〈해피니스〉까지 연이은 세 작품을 통해 액션의 한은 충분히 풀었을 것 같고요. 앞으로는 무엇에 도전하고 싶은가요?
20대 때는 멜로의 비중이 제일 컸던 것 같아요. 30대에 들어서면서는 액션이나 몸을 쓰는 연기를 많이 했고요. 정말 원 없이 했죠. 몸으로 하는 액션, 총으로 하는 액션, 칼로 하는 액션 다 해봤네요. 앞으론 사회적인 메시지가 묻어 있는 작품이나 조금 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이제는 영화나 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지, 배우로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해외 활동 계획은요? 말하자면, 다시 ‘셀프 테이프’를 촬영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물론이죠. 처음 연기를 시작한 18살 무렵에 오디션을 보러 다닌 뒤로 운이 좋게 잘 풀렸고 여기까지 왔죠. 오디션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트레드스톤〉을 준비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오디션을 경험하고 보니 새로운 열정이 샘솟았달까요. 단순하게 셀프 테이프, 오직 이 하나를 위해서 노력하는 내 모습이 좋더라고요. 언제든지 셀프 테이프를 다시 촬영할 마음이 있어요.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먼훗날 노배우가 되어서도 도전할 거예요. Always!
※ 화보에 소개된 제품은 모두 가격 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