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MEN
OF
THE YEAR

1980년대 태어난 여자아이들에게 유행처럼 붙여졌다는 이름. 봤다는 이도, 보지 않을 거란 이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화두에 올려 화젯거리가 됐던 그녀.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김지영이 배우의 모습을 빌려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김지영을 그저 평범한 인간이라 말하고 어떤 이들은 그녀를 악마처럼 묘사한다. ‘희대의 빌런’ 타이틀을 지닌 조커도 우습게 만든 2019년 가장 뜨겁게 불렸던 이름 김지영. 김지영은 각자가 나눠 쥔 아픔을 들춰내고 누군가를 떠올려 마음 아프게 하며 종종 피곤한 논쟁에 뛰어들게 한다. 그녀의 이름은 꼭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묻게 된다. 김지영을 아느냐고. 묵혀뒀던 아픔을 꺼내 보인 이들에게 계몽가로, 이념 대립의 심벌이라 평하는 그들에겐 정치가로,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짚어보게 하는 사상가로. 보는 이에 따라 그녀의 삶이 보편적인 서사가 되기도,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당신이 김지영이 아니거나, 김지영을 마주한 일이 없다 해도 그녀의 삶 속에 당신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김지영 씨의 삶 안에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그녀를 대신해 올해의 여성으로 김지영을 꼽는다. 누군가 김지영 씨의 이름에 손사래 치거나 ‘픽션’인 인물을 올해의 여성으로 꼽은 데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상관없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모습으로 김지영을 본다. 나는 계속해서 김지영을 물을 것이고 당신은 김지영의 삶을 통해 지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당신의 역할을 답할 것이다. ‐ 조각(타투이스트, @tattoo_a_piece)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의 중학생 김은희의 이야기를 한다. 김은희는 러닝 타임 내내 참 많은 것을 얻고 잃는다. 그 습득과 상실, 발견, 회복의 과정은 그가 꽤 특별하고 영화적인 삶을 살고 있는 양 보이게 한다. 하지만 그런 김은희의 삶을 지켜보고 있자면 그의 삶이 우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사랑해야 할 존재의 폭력에 아파하고 분노하지만 어느덧 무감각해지고, 두려움은 일상이 된다. 가끔은 기분 나쁠 정도로 평면적인 단어로 자신을 재단하는 사람들을 마주하고도 침묵해야 한다. 그와 같이 대부분의 여자들은 살면서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종의 레퍼토리를 오롯이 혼자 거쳐야 한다. <벌새>는 탄생과 동시에 외롭고 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미래의 승자들을 향한 찬가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음에도 이에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한 그 처지조차, <벌새>는 여자와 닮아 있다. 때문에 승리를 약속한 전투사들은 김은희의 곁을 지킴으로써 고독한 싸움의 정서적 종말을 알린다. 그래서 김은희와 여자들의 삶은 외롭지만 빛나고, 슬프지만 희망차다. 김은희를 사랑함으로써 여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다독이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의 승리를 다짐한다. 2019년을 살고 있는 미래의 승자들에게 놀랄 정도로 신기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일깨워준 김은희를 2019년, 올해의 여성으로 꼽는다. ‐ 허지인(DJ 4001RAKTA)

최수정 대표
2019년 ‘여성’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단순히 '남성'의 대칭점에 위치한 고유명사로서의 기능을 넘어선 듯 보인다. 몇 해 전부터 여성 인권이 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되고 일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일기도 하지만 이조차 반가운 논쟁의 흐름이다. 감히 내가 올해의 여성을 명명할 자격 같은 건 없지만, 현재 내가 속한 문화예술계를 제외한 다른 위치에서 괄목할 만한 쾌거를 이루어낸 여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얼마 전 우연히 기사로 접한 한국 코카콜라의 신임 대표 최수정 씨다. 최 대표는 한국 코카콜라 사상 첫 여성 CEO이자, 브랜드 매니저에서 시작해 대표이사 자리까지 오른 첫 번째 내부 발탁 인사다. 그의 행보는 한국사회의 유리천장 따위는 시원하게 뚫은 의미 있는 쾌거라고 본다. 또 이것은 여성이 리더로 자리 잡기 쉽지 않은 이 사회에서, 기업들이 조금이나마 여성 임원의 비중 확대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작지만 큰 주춧돌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위해 우리 사회 여성들을 떠올리다 보니 올해 나에게 영감과 자극이 되어준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 내에서 여성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해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여성들의 성취는 우리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전진시킬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 이주영(배우)

김규진 ©진태용스냅 포토 이호선
결혼의 사전적 정의.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월간 2만여 건, 연간 26만여 건의 혼인신고. 2019년 11월 10일, 또 한 쌍의 커플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다른 커플들과 똑같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 앞을 걸었지만 혼인서약서는 여느 결혼식장에서 나오는 문장과 조금 달랐다. 식을 올렸음에도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면 분명 거절당할 것이라고 확언했고 마일리지 합산도, 신혼부부 대출도, 수술 시 동의도, 사망 시 상속도 전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가 두 명이었다. 신부 김규진 씨와 그녀의 신부가 그 결혼식의 주인공이자 이 글의 주인공이다. 그녀들은 우리나라 혼인신고 통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결혼식을 올렸다. 알다시피 현재 우리나라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며 때문에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은 이성의 결합만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보란 듯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일면식 없는 나에게도 그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청첩장을 공개적인 SNS에 올렸으며, 결혼식 사진을 공개했고, 공중파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했다. 지극히 사적이어야 할 ‘개인’의 결혼식은 이성애와 혈연에 기반되어야만 ‘정상성’을 부여받는 가족 형태로 인해 많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제 어떤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까. 모두가 알고 있다. 그녀들의 결혼식을 통해 던져진 질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전부 다 해답을 얻어내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짧은 글로써 축하인사를 전하며 김규진 씨가 신부에게 남긴 혼인서약서 일부를 첨부한다.
“사랑하는 언니에게. 결혼이란 무엇일까? … 마일리지 합산이 안 된다면 내가 언니 카드로 적립을 할게. 신혼부부 대출이 안 되지만 1주택 세금으로 2주택을 보유할 수 있어. 수술 시 동의를 못하게 하면, 아는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가자. 사망 시 상속 순위가 밀린다면 미리 공동 명의의 법인을 설립할게. 힘든 일이 많겠지만, 함께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지금 서로가 골라준 웨딩드레스를 입고 우리를 축하해주는 하객들 앞에 서 있어. 결혼은 이런 게 아닐까? 우리의 결혼은 행복할 거야. 나랑 즐겁게 살아보자. 사랑해.” ‐ 손수현(배우)

유튜버 하말넘많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게 미덕인 나라에서, 할 말 못할 말을 다 하는 유튜버가 있다. 바로 얼마 전 구독자 10만 명을 달성한 페미니즘 유튜브 <하말넘많> 채널이다. 채널을 운영하는 강민지와 서술 2인은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한 의제뿐만 아니라 비혼을 선언한 여성들의 일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프라인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전국에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연결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구독자들은 행사 이후 그들만의 지역적 커뮤니티를 만들고 키워가며 자생적인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이는 <하말넘많> 채널이,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플랫폼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사회에 페미니즘 담론들이 적극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많은 여성들이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찾아가고 있다. 더 이상 인생의 기준을 타인의 관점에 두지 않겠다는 통렬한 선언들이 더 가시화되는 중이다. 이에 따라 생의 주인공을 '자기 자신'으로 설정한 여성들에게, 우리의 짧은 글이 또 다른 원동력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감히 올해의 여성에 놓아보려 한다. <하말넘많> 채널 안에 있지만, 우리 역시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여성이므로. ‐ 하말넘많(유튜버)

이다혜 작가의 신작
책, 영화, 글쓰기에서 말하기까지 이다혜는 만능이다. 갭이어도 없다. 한 사람이 어떻게 이걸 다, 그것도 잘, 소화할 수 있지? 오랫동안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감탄을 넘어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특히 올해는 장르가 다른 두 권의 책을 내고 두 개의 팟캐스트를 진행하며 그것들이 모두 사랑받는 놀라운 타율을 보이고 있다. 그가 아니었다면 BBC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된 이수정 박사님을 팟캐스트로 불러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게 다 풀 타임 기자로 일하면서 해낸 일이란 걸 잊지 말자. 여성의 경우 한때 반짝 주목 받고 그 뒤로 잘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꾸준히 자기 위치를 지키고 성과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다혜는 그걸 해내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덕분에 나도 좋은 자극을 받아 첫 책을 낼 수 있었다. 이다혜처럼 쓰고 말하며 사라지지 않는 여성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 김진아(울프소셜클럽 대표,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저자)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 노동자 분들을 떠올리면 첨예한 이슈가 한꺼번에 주르르 딸려온다. 여성 경력단절과 저임금 노동시장, 편법적인 비정규직 고용, 그리고 자동화 시대에 사라질 직업군 문제까지. 이를 짧은 글에 다 담는 것이 어렵겠지만, 각각의 문제가 다 ‘핫’하다는 것이 그들이 ‘올해의 무엇’에 가장 적합한 인물군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방으로 공연을 다니면서 수없이 톨게이트를 지나면서도 수납원 분들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는 올해 자회사 전환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그 시간에 거기 누군가 있는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당연한 건 정말 없는데도 말이다. 알고 보니 원래 톨게이트 영업소에 직접 고용되었던 수납원 분들은 2008년 말에 용역업체로 밀려났다고 한다. 사실 이제서야 수면 위로 올라와서 그렇지 이미 오래전부터 곯을대로 곯은 문제였던 셈이다. 초여름에 시작된 농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분들이 정말 올해의 여성이 될 수 있도록 올해가 더 추워지기 전에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반향기(밴드 ‘브로콜리 너마저’ 기타리스트)
나의 과장님
나의 사수 84년생 과장님.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안 된 내가 워킹맘인 그의 삶을 보고 느낀 점은 대학생 시절 생각했던 여성의 삶(그때도 차별이 많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과 사회에서 체감한 그것의 온도 차가 크다는 것이다. 유니폼을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직급에 걸맞은 대우를 못 받을 때가 많은 과장님. 육아휴직을 썼던 탓에 본인보다 연차가 낮은 남자 직원들한테 진급이 밀리는 과장님. 모두가 당연하게 배정받는 연차도 자녀들 일 때문에 급하게 쓰느라 직원들에게 미안해하는 과장님. 회식에서는 댁에 가야 할 생각에 술을 못 마셔서 윗사람들 눈치를 보고, 회식이 끝나고는 아이를 봐주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는, 어디서도 편치 못하고 항상 미안해하는 과장님. <벌새>의 은희였고 <82년생 김지영>의 지영이인 과장님. 그 두 영화가 너무 보고 싶음에도 정작 여가 시간에는 자녀를 돌보느라 영화관 갈 시간이 없어 IP TV에 올라오는 걸 기다리겠다는 과장님. 이 주제의 취지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올해의 여성을 생각해보라는 거였겠지만, 올해의 여성뿐만 아니라 매 시대에 존재했던,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우리의 어머니이자 누나 혹은 언니, 친구, 그리고 동생인 우리 모두의 과장님을 떠올렸다.‐ 강서우(은행원, <하퍼스 바자> 독자)
※10월 31일부터 11월 8일까지 <바자> 인스타그램을 통해 독자들이 생각하는 ‘올해의 여성’에 대해 물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인물은 박나래였다. 그 외에도 연기자 천우희, 공효진, 한지민, 모델 한혜진, 재재 PD, SM엔터테인먼트의 남소영 대표가 있다.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와 <바자>가 인터뷰한 김유라 PD, 이수정 교수, 김보라 감독에 대한 댓글도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을 뽑은 댓글도 눈에 띄었다. 자세한 내용은 <바자> 인스타그램(@harpersbazaarkorea)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