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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에게 바치는 어느 시인의 편지

사랑하고 시하고 새하는 우리들에게

BYBAZAAR2019.12.10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선생님께 저를 복희, 라고 부르라고 하고, 선생님을 혜순, 이라고 불러도 되느냐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9월, 혜화에서 열린 <죽음의 자서전> 낭독회 때 단 한 번 뵈었지만, 그렇게 이름으로 선생님을 부르고 이름으로 선생님에게 불리고 싶습니다. 시하고 새하는 선생님과 새 인간을 사랑하는 제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과 이 편지가 공개편지라는 형식을 띤다는 점이, 이런 용기를 내도록 합니다. 예전에 저는 너무나도 좋아하는 누군가를 보면, 막연히 그 사람의 자식이든 조카든 되고 싶다, 절대로 헤어질 수 없도록 피로 엮이고 싶다는 당치않은 소망을 품었습니다. 제가 시를 읽거나 쓰기 전에 했던 생각들입니다. 물론, 이룰 수 없는 과거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태어난 제가 누구의 피를 거슬러 오를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사슬을 제 좋을 대로 골라 채울 수 있을 것입니까. 하지만 시를 읽고 쓰기 시작하면서, 저는 누군가의 가족이 되는 일을 꿈꾸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좋아하는 것과 친구가 되는 일에 대해 골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두가 길었습니다만 친구 같은 느낌으로 혜순, 당신을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사실은 이미 혼자, 불러보았습니다. 아주 좋은 울림입니다.)
혜순이 “고통을 벗어나 살아 있다면 뭔가 쓸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한 인터뷰(<악스트> 25호)에서 답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좋았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어떻게 시를 쓰는가” 하는 질문을 어떤 여성 독자로부터 받았습니다. 저는 고통 가운데서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야기한다고 아는 것들 그러니까, 질병이나 죽음, 사랑,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을 덮치는 상황에서 저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다가 어느 정도 지나간 후에서야 뭍으로 밀려나옵니다. 매번 낯선 장소, 낯선 시간에 떨어져 새롭게 적응하고 새롭게 말을 배우는 상태가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새로 배운 말을 더해 오직 지금 있는 이곳을 쓰고 남겨두는 것뿐이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런 상태에서 유일하게 제게 가능했던 쓰기는, 진술서도 탄원서도 아니고 일기도 편지도 아닌 시였습니다. 대화를 이어 할 수도 없었고, 소설로도 쓸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게 신음이나 울음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가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겠지요. 미뤄두겠습니다.) 여하간 살아 있으려고 쓰는 것인지, 쓴다는 것으로 사는 것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미 겪으셨겠지요. 그리고 답을 주지 않으시겠지요. 그저 쓰시겠지요. 시를.
시란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인가? 네 시는 무엇을 말하는가? 등등 답 없는 질문을 혜순은 무척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 질문에 엉겨 붙은 ‘여성으로서’라는 전제도요. 매번 시의 얼굴과 몸통이 달라지는데, 말하고 나서 돌아서면 사라지는 답을 하고 잊어버리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시를 쓰는 여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중력인데 이것이 은총인지 고난인지 가볍게 물어보곤 합니다. 답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답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날아오르듯이 생각해서, 공중에서 그 질문을 보듯이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날아오르는 새도 중력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 참 재미있고 또 신비롭습니다.) 시인이라는 상태, 여성이라는 상태, 시 쓰는 여성이라는 상태에 대해 이미 일정한 선입견을 인정하고 그런 공통 감정 혹은 상식을 먼저 충족시킨 후에 그것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겨우 답을 할 수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선입견이 있다는 사실을 제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새로이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정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저를 지치게 했고요. 시를 쓸 때는 부정하고, 부정하고 언어와 낯설게 만나는 것이 세상 즐거운데 말입니다. 아마 이런 제 상태를 보시면, 혜순이 이미 겪은 것을 제가 또 겪고 있음을 아시겠지요. 맞아요. 저는 그간 혜순이 겪어온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대면하고 있습니다.
저런 질문들을 처음 받던 시기에는 질문에 대한 반감으로 답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습니다만, 이제는 최선을 다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답을 하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시기마다 제 답이 달라질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부정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답하고 있는 지금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는 모르겠지만요. 후일 돌아보면 혀를 깨물고 싶은 답을 하게 될지라도 최선을 다해볼 요량입니다. 제 시가 제 삶, 제 정신의 완벽한 반영일 수는 없겠지만, 시와 삶이 그리고 정신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을 거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이 저와 제 시뿐만이 아니라, 저를 아는 사람, 제 시를 읽는 사람에게도 미약하게나마 알 수 없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감히 짐작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혜순의 시를 읽으며, 혜순이 지내온 내력을 보며 (제가 물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겠지요. 저는 발표된 것을 제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오해하고 있겠지요.) 받은 영향이고 얻은 용기이고 의지이기도 합니다. 혜순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당신의 시는 저의 일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혜순, 당신과 꼭 같은 방식으로 제가 이 시간을 통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시를 읽으며 질투하고 선망하고 배우고 버리고 다시 얻고 또 얻고 나아가고 멈추고 또 나아가고 하였습니다. 혜순, 당신과 저, 그리고 다른 모든 여성 창작자들이 분명히 다른 나이와 지식과 경험의 반향을 전유하여 함께 그리고 다르게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저는 기쁩니다. 힘들지 않은 때는 없었을 것이고, 늘 새롭게 낯설게 힘들 것을 압니다. 우리 모두 혼자 쓰지만, 각자의 고통을 살아내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껏 혜순은 수많은 비평을 받아왔을 테지요. 저도 두서없지만 하나 보태고 싶습니다. 혜순, 당신의 시를 펼칠 때마다 즐겁게 늘 놀라워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써주세요. 저는 당신의 시가 계속 궁금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시를 읽고 나서 쓸 제 시가 궁금합니다. 사랑하고 시하고 새하는 우리들이 마주할 미래가 알고 싶습니다.  
 
※김혜순은 1979년 등단해 여성적 글쓰기의 시적 실천을 이어오고 있다. 올해 아시아 여성 최초로 ‘그리핀 시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제목에 쓰인 ‘새하다’는 ‘새처럼 날다’, ‘새가 되다’를 김혜순의 시학으로 창조한 언어이다. 2015년 등단한 젊은 시인 김복희가 여성이자 시인으로서 존경을 담아 편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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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김복희(시인)
  • 에디터/ 박의령
  • 일러스트/ 강태이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