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영화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82년생 김지영> <벌새> <밤의 문이 열린다> <우리집> <아워 바디> <메기> <영화의 바람>까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들이 이토록 풍요로웠던 해는 한국영화사상 처음이다. | 여성,영화,82년생 김지영,영하의 바람,밤의 문이 열린다

훗날 우리가 2019년을 돌이켜보면 경이로운 해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한국영화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첫 장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유독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침체된 한국 독립예술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고, 그런 맥락에서 여성 영화의 어떤 새로운 원년으로 여겨질 정도다. 그 중심에 김보라 감독의 &lt;벌새&gt;가 있다. 관객 13만5천여 명을 모으며, 한국 독립예술영화로는 &lt;더 테이블&gt; 이후 2년 만에 1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남겼다. &lt;벌새&gt;는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의 성장담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담론을 제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미시사를 통해 거시사로, 개인에서 출발해 사회로, 소문자의 역사를 거쳐 대문자의 역사로 나아가는 구조를 가진 영화다. 일상의 폭력에 젖은 채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1994년의 은희를 매개 삼아 김보라 감독은 여전히 가부장제 질서 안에서 신음하는 오늘날의 ‘은희들’을 호명했고, 그들은 이 영화에 화답했다. 최근 한국독립예술영화의 스코어를 떠올린다면, &lt;벌새&gt;의 흥행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시대와 공간을 특정하는 이 영화가 전 세계 영화제를 순회하며 35관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1990년대 서울이라는 지역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밑바탕 삼은 것도 고무적이다. 자전적 이야기는 창작의 영역에서 지금껏 어딘지 모르게 열등한 취급을 받아왔다. 특히 여성의 삶을 새기는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lt;벌새&gt;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보란 듯이 넘어섰다. 여성의 삶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깃거리일 수 있고, 그것이 꼭 소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nbsp; &lt;벌새&gt;의 개봉을 전후로 등장한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는 유은정 감독의 &lt;밤의 문이 열린다&gt;, (장편 데뷔작은 아니지만) 윤가은 감독의 &lt;우리집&gt;, 한가람 감독의 &lt;아워 바디&gt;, 이옥섭 감독의 &lt;메기&gt; 등이다. &lt;밤의 문이 열린다&gt;는 장르의 외피를 쓰고 동시대 여성의 고립감과 불안, 거주 문제 등을 이야기한다. 여성으로서 체감하는 시대의 폭력성을 호러 스릴러의 문법으로 풀어낸 것이다. 한국 독립영화 신에서 이렇게 동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장르로 접근하는 감독은 드물다. 유은정 감독은 장르를 다룰 줄 안다는 면에서 상업영화 신에서도 각광받을 만한 미덕을 갖췄다. &lt;메기&gt;의 경우는 어떤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이 영화는 데이트 폭력, 몰카 범죄, 청년실업과 고용불안 등을 화두 삼는다. 이옥섭 감독은 제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화법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딱히 레퍼런스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미장센과 음악을 과감히 사용한 감각적인 영화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저 재기발랄함으로만 승부를 거는 것은 아니다. 이옥섭 감독은 서울 한복판에 별안간 싱크홀이 생겨난다는 극적 장치를 통해 한국사회 시스템의 불균질한 내부를 쳐다보게 만든다. 싱크홀 자체가 한국사회의 각종 균열로 읽히고, 그것을 확인하고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옥섭 감독은 현재 상업 신에서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데, 누구와도 닮지 않은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 기존 대중영화의 문법에 균열과 파장을 일으킬 것을 열렬히 기대하게 된다. &lt;우리집&gt;은 장편 데뷔작 &lt;우리들&gt;(2016)로 그해 독립영화계를 평정했던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전작에서 여자아이들의 미묘한 심리를 포착했다면, 이번에는 이해 못할 어른들의 세계에서 연대하고 서로를 지키며 나아가는 여자아이들을 그린다. 5만3천여 명이 이 영화를 지지했다. 그간 소외되어온 여성과 아동의 목소리를 담는 영화는 윤가은 감독을 거치며 이제 하나의 장르로 안착된 듯하다. &lt;아워 바디&gt;는 여성의 몸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8년 차 고시생 자영(최희서)이 겪는 육체와 정신의 문제를 그리고 있다. 도심 속 달리기라는 소재를 통해 동시대적 풍경을 호출하며, 탈코르셋 시대에 몸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지 않는’ 촬영 방식에서 조심스러운 성찰이 느껴진다. 여성 감독들은 어쩔 도리 없이 자기 검열과 객관화에 숙련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상업영화 신에는 &lt;82년생 김지영&gt;이라는 굵직한 여성 영화가 존재한다. 원작 소설이 등장했을 때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이 작품은 영화라는 매체에 걸맞게 보다 보편적인 서사로 탈바꿈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신인감독 김도영은 &lt;자유연기&gt;라는 단편영화로 화제가 된 인물이다.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 배우에 대한 이 영화는 감독이기 이전에 배우였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니 &lt;82년생 김지영&gt;은 감독에게는 마치 숙명처럼 다가온 작품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일부 남성들의 거센 공격 속에서도 8일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순항 중이다. 이밖에도 11월 개봉한 김유리 감독의 &lt;영하의 바람&gt;도 꽤 탁월한 여성 영화다. 10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시간을 견디며 두 여성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곁에서 묵묵히 지켜보게 만든다. 김유리 감독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초를 과장하지도, 무미건조하지도 않게 그려낸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선명한 문제 제기가 있다. 올해 과거에 비해 보다 다양한 갈래의 여성 영화가 등장했다. 이들은 누군가에게 자극과 영감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작은 이야기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우리의 진짜 삶에 대한 이야기도 영화가 될 수 있다. 이들은 향후 새로운 여성 감독의 등장에 불씨가 되어줄 것이며, 이들의 성취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연쇄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재능 있는 여성 감독의 등장이 더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현실을 고대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