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와 아티스트 이상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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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벌새>와 아티스트 이상은

김보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 〈벌새〉는 지난달 이상은의 신곡 ‘넌 아름다워’의 뮤직비디오로 재탄생했다. 장르를 뛰어넘은 두 작품의 만남은 상업적 계산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시너지를 냈고, 어쩌면 올해의 가장 성공적인 컬래버레이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은희’에게 “넌 아름다워”라고 말해주고팠던 두 사람의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리라.

BAZAAR BY BAZAAR 2019.11.25
 
가죽 트렌치코트, 니트, 반지는 모두 Hermes. 스트랩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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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인연은 <벌새>와 ‘넌 아름다워’의 뮤직비디오 컬래버레이션으로 시작된 거죠? 
이상은: 저희 제작팀에 <벌새>의 광팬인 친구가 있어요. ‘넌 아름다워’의 가사가 “내 인생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라고 묻는 주인공 ‘은희’에게 하는 대답 같다는 거예요. 당시 전 앨범 작업 하면서 너무 많은 힘을 쏟고 난 직후라 잘 몰랐어요. 뮤직비디오 콜라보가 성사되고나서 나중에 영화를 봤는데 정말 그 친구 말이 맞더라고요. 사실 이렇게 얽히면 실례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같이 협업을 한 게 아니라 다 만들어놓으신 영화였고 워낙 마니아도 많은 작품이다 보니. 그런데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넌 아름다워’를 좋아해주고 제 팬들도 <벌새>를 재밌게 보고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김보라: 가사에 ‘허밍버드’라는 단어도 나와요. 창작을 하다 보면 가끔 동시성의 법칙이 있는 것 같아요. 기분 좋은 우연 같은 것 있잖아요. 저도 음악을 듣고 운명이구나 싶었죠. 콜라보 제안을 주시자마자 너무 좋다고 바로 답변했던 기억이 나요.
영화를 보고 음악을 만든 게 아니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닌데 같은 메시지와 감동을 준다는 점이 새삼 놀랍네요. 그럼 ‘넌 아름다워’는 어떤 마음으로 작업한 건가요?  
이상은: 우리나라 음악 팬들 중엔 여성 비율이 월등히 높아요. 7:3 정도일까요? 그런데 남자 화자가 여자에게 “넌 예뻐”라고 말하는 곡 말고 정작 여성이 여성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곡은 적었던 것 같아요. 서양권에는 여성의 감정을 표현하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우리나라에는 여성을 위한 문화적 케어가 부족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번에 비로소 작업하게 됐죠. 아마 감독님도 비슷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드셨을 것 같아요. 김보라: 저도 <벌새>가 ‘영지 선생님’ 같은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억압이나 가부장제, 폭력 등이 영화에서 다뤄지긴 하지만, 삶에서 행복과 기쁨을 발견하는 의미의 여정, 아름다운 소통이나 연결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엔딩도 희망적으로 끝내고 싶었던 거고요. 저도 상은님의 음악과 제 영화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라서 잘 어울렸다고 생각해요.
이상은 씨는 EP 발표하는데 5년이, 김보라 감독은 <벌새>를 완성하는 데 6년이란 시간이 걸렸죠. 그렇게 오랫동안 공들인 작품이 드디어 올해 하반기에 나왔고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잖아요. 서로의 창작물에 대해서 일종의 존경심도 갖고 계실 것 같아요. 
김보라: 저는 원래 이상은 님 팬이었어요. 노래방에 가면 늘 ‘언젠가는’을 부르고 뉴욕 유학 시절에는 ‘뉴욕에서’를 참 많이 들었죠. ‘공무도하가’는 실험적이라 좋아하고 ‘사막’을 들으면서 위로도 받았고요. 무엇보다 창작자로서 자기 재료를 끊임없이 바꾸면서 나아가는 모습이 제게 영감이 됐어요. 이상은: <벌새>는 착한 영화고 치유가 되는 영화지만 저는 동시에 이 영화의 감각적인 부분이 좋았어요. 주인공들이 트램펄린 타는 장면에서 부서지는 햇빛 같은 거요. 음악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스토리보다도 그런 시적이면서 초월적인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요. 일상을 말하다가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뉴스가 나오잖아요. 보통 사람은 끄집어내지 않을 날것의 어떤 순간을 캐치하는 게 예리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런 독특한 감성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영화에서 주인공 은희의 부모님이 이상은 씨가 출연한 TV 쇼를 보는 장면이 나와요. 그것도 단순한 우연이었나요? 
김보라: “일부러 넣으신 거죠?”라고들 하시는데 그것도 정말 우연이었어요. 그 시대에 유명했던 TV 쇼를 시간대별로 다 조사했거든요. 연출부가 골라온 것 중에 제일 좋다고 느낀 게 그 부분이었어요. 당시에 이상은 님은 워낙 유명했고 일종의 센세이션이었잖아요. 시대의 아이콘이었으니 여러모로 적합했죠. 팬심 때문에 넣은 건 아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도 신기하더라고요.
 
버튼 스웨터, 스커트는 모두 Moon J, 귀고리는 Black Muse. 부티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버튼 스웨터, 스커트는 모두 Moon J, 귀고리는 Black Muse. 부티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994년도에 김보라 감독은 은희 정도의 나이였고 이상은 씨는 실제로 TV 쇼에서 한창 활약을 하고 계실 때잖아요. 영지 선생님의 대사 중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표현도 나오는데, 두 분은 1994년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이상은: 1993년도에 ‘언젠가는’이 나왔던가요? 엄청 바빴죠. 그래서 중간에 도망도 갔다가.(웃음) 그땐는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바빠도 계속 달려야 하는 거고. 거절하면 방송국에서 미워하고 그랬죠. 계속 그렇게 살면 재미없잖아요. 도망이라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도망치는 것 말고는 정말로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죠. 김보라: 그랬기 때문에 또 좋은 음악이 나온 게 아닐까요? 그해엔 성수대교도 무너지고 삼풍백화점도 무너지고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잖아요. 제가 살던 동네라서 특히 더 가깝게 느꼈던 것 같아요. 어린아이였지만 이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거의 최초로 실감한 비현실적인 해였죠.
두 분에게는 ‘영지 선생님’ 같은 멘토, 의지할 수 있는 여자 어른이 있었나요?
이상은: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살면서 그런 분을 꽤 만나지 않나요?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제가 아는 그분하고도 닮았고, 그분하고도 닮았고. 여러 선배가 떠오르더라고요. 좋은 여자 선배들 참 많잖아요. 어른이 돼서 가만히 보면 남자들은 성공으로 가는 라인이랄까, 시스템이 훨씬 더 잘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자들은 개인적으로 연대하지 않으면 어려웠으니까 제도권 밖에서 만난 개인교습형 멘토가 많았던 것 같아요. 김보라: 맞아요. 남자들은 진짜 네트워킹이 조직적으로 잘되어 있어요. 남자 감독들만 해도 이미 내가 모르는 모임들을 다 갖고 있고.(웃음) 이상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사회적인 사다리를 잘 타는 건 사실이겠죠? 그에 비해 우리는 훈련을 덜 받은 것 같달까요. 집에서 육아를 하고 가정을 돌보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여자들이 그 외에도 자기만의 것을 더 찾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렇게 사회로 진출해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도 자부심을 느꼈으면 좋겠고요. 그렇게 우리끼리 좀 더 정신을 차리고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 예술인으로서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더 절감하시죠? 
이상은: 특히 이 분야의 여자들, 알고 보면 숫자는 되게 적어요. 너는 누구 친구지? 너는 누구 언니지? 다 연결되어 있고요. 우린 싸우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울 수 있는 관계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외롭게 혼자 있지 말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아가면서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어요. 정말 몇 명 안 되니까요. 김보라: 저도 영화 준비하면서 여자 영화 선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제가 도움을 받은 건 주로 남자 선배들이에요. 이유는, 남자 선배들밖에 남아 있지 않거든요. 여자 선배들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소식이 끊겼거나 그만뒀거나. 스태프 일을 하다가 현장이 너무 남자 위주다 보니까 그거에 질려서 떠난 친구도 많고. 그런 상황이 안타까워요.
대신 후배 여성 영화인들에겐 <벌새>나 김보라 감독의 존재가 큰 힘이 될 거예요. 
김보라: 제가 더 힘이 되려면, 두 번째 영화를 잘 만드는 것까지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요. 비슷한 이유인데, 여자 감독이 데뷔를 하고 그 다음 작품을 만들기가 진짜 어려워요. 린 램지 감독도 두세 번째 작품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제인 캠피온 감독도 초반 영화들이 각광을 받다가 이후 계속 공백이 생겼죠. <아메리칸 사이코>의 메리 해론 감독도 아이를 가지면서 경력이 단절되는 시기가 있었고요. 그만큼 제가 영화를 열심히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그분들에게도 지속적인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GV에선 “그럴 생각이 없다”고 선을 그으셨지만, 사실 이상은 씨야말로 지난 몇십 년간 많은 여성들의 ‘영지 선생님’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상은: 선생님이라니 그렇게 되면 제가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웃음) 저는 여전히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남의 눈치 안 보고.(웃음) 그런 선생님 역할을 제가 맡는 게 부담스럽다는 이야기였지, 제가 전하는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면 그건 분명 좋은 일이죠.
 
이상은이 착용한 가죽 트렌치코트, 귀고리, 반지는 모두 Hermes. 스트랩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보라가 착용한 레이스 셔츠 원피스는 Kume. 코팅 스커트는 Moon J. 진주 귀고리는 Black Muse. 시계는 Fendi by Gallery ‘O Clock.

이상은이 착용한 가죽 트렌치코트, 귀고리, 반지는 모두 Hermes. 스트랩 힐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보라가 착용한 레이스 셔츠 원피스는 Kume. 코팅 스커트는 Moon J. 진주 귀고리는 Black Muse. 시계는 Fendi by Gallery ‘O Clock.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잖아요. 2019년을 사는 은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상은: 내가 여자라고 더 봐줄 것도 없어. 맞짱 뜨자. 나한테 특혜를 주려고 하지 마. 똑같이 해보자. 이게 제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태도였어요. 전 여자들이 스스로 여성임에 갇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이 먹으니 다 똑같아요.(웃음) 마흔다섯 넘어가면 사람과 일, 실력이 더 중요하니까요. 나의 여성성을 드러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냥 ‘난 인간이야’라고 선언하고 다니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일상적인 말로는 좀 쑥스러워요. 대신 제 가사에 다 들어 있지 않나요?  
지금 하신 얘기가 딱 “네 마음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도 say no”라는 가사네요. “너 이제 맞지 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알았지?”라는 영화 속 대사 같기도 하고요. 
김보라: 아까 나온 얘기지만 여자들끼리 연대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이건 조금 다른 얘기일 수도 있는데 체력이 중요하더라고요. 몸매를 예쁘게가 아니라 자기 몸을 잘 들여다보고 몸을 잘 간직하는 것. 저는 요가를 하는데, 숨을 제대로 쉬고 호흡하고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게 마음의 근육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는 필요하지 않은 걸 사지 않는 거예요. 불필요한 물건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도 어지러워지더라고요. 저는 미니멀리스트라서 옷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저는 그게 좋아요. 옷이 적지만, 그 옷들은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거든요. 물건처럼 인간관계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고 보고요. 나에게 독이 되는 관계는 잘 들여다보고 화해를 하려고 했는데도 잘 안 되면 어느 시기에 안녕을 고해야죠. 어찌 보면 철학적인 얘긴데 정말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들만 남기고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계속 정리해나가는 게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특히 여자분들한테는 자기 자신을 작게 두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벌새>가 지연된 데는 재정적인 어려움, 시나리오 수정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제가 제 자신을 미워하느라 소비했던 시간도 많았어요. 나를 못 믿으면서 남도 못 믿고. 그러면서 일이 어그러지곤 했죠. 제 주변만 해도 남자 작가들은 자기 시나리오가 되게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 작가들은 좋은 시나리오를 써도 만족을 못해요. 물론 그게 창작자한테 필요한 태도라고는 생각해요. 너무 빨리 만족하는 것보다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괜찮은데도 나 자신을 믿지 못했던 시기가 저에게도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여자들에겐 ‘건강한 자뻑’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 이 얘기가 자기계발서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돌이켜보면 저도 제 가능성이 가장 두려웠거든요. 여자들이 자기 자신을 작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더 크고 더 밝게 빛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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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손안나
    사진/ 신선혜
    스타일리스트/ 윤지빈
    헤어/ 오종오
    메이크업/ 이아영
    어시스턴트/ 문혜준
    웹디자이너/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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