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브리스 톱, 팬츠, 재킷은 모두 Moon Choi.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워 바디>를 첫 번째 원 톱 주연 영화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오랜 무명 시절 뒤에 <박열>로 주목받았잖아요. 차기작은 블록버스터 장르일 줄 알았어요. <박열>이 개봉하고 한 달쯤 지났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여기저기서 오퍼를 받으면서 얼떨떨한 시기였죠. 그런데 저는 사실 독립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로망이 있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이제훈 씨의 <파수꾼>이나 이정현 선배님이 연기하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도 독립영화였는데 참 좋죠. 큰 사건사고 없이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고, 어차피 이런 이야기는 상업영화에서 연기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 당시까진 동시대 평범한 여성을 연기한 적이 없기도 했고요. <박열>도 시대극이었고, <오늘만 같아라>에선 필리핀 여성으로 나왔죠. 제 나이 또래 한국 여성을 연기해보고 싶었어요.
영화 속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서 인생이 변하는 인물이에요. 운동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표정이 밝아지고 자세가 곧아지더라고요. 드라마틱한 변신이 아니고 미세한 변화라서 표현하기 더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정말 어려웠어요. 후줄근하게 다니던 옆집 여자를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쳤는데 기운 자체가 밝아져 있는 느낌 정도인 거죠. 그래서 초반 설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자영은 고시 공부하는 8년 동안 동창회도 안 나갔을 거예요. 명절엔 친척들도 피했겠죠. 그런 설정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어요.
연기 때문에 시작하긴 했지만 확실히 달리기 시작하면서 본인의 몸도 변화하는 게 느껴지던가요?
모델 한혜진 씨도 그런 얘기를 했다던데, 정말 사람의 몸만큼 잘 변하고 정직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작품에 들어가기 한 달 반 전부터 하루에 세 시간씩 운동했거든요. 원래도 운동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집중한 건 처음이었죠. 30분 뛴 것과 45분 뛴 게 다르더라고요. 고구마를 50g 먹었을 때랑 100g 먹었을 때가 다르고요. 사실 식단이 힘들었어요. 복근이 나오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 탄수화물을 다 끊고 물을 5리터씩 마셨어요. 수분을 배출해야 가죽이 바짝 마르거든요.
딱 한 신 아니었나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어요?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해요.(웃음) 그런데 만약에 원하는 만큼 그 장면이 안 나왔다면 조명 탓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실 제 탓을 할 거거든요. 조금 덜 먹을걸, 조금 더 운동할걸. 그러느니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만들어놓는 게 나아요. 그럼 못 나와도 후회는 없잖아요. 트레이너한테도 우리 영화는 CG 할 돈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고 했죠.
조금요. 엄마가 그래요.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웃음) 그런데 막상 시작을 하면 중도 포기가 안 되거든요.
터틀넥은 Recto. 베스트는 Leuni. 반지는 Marsbom.
초반엔 자영에게 공감했는데, 뒤로 갈수록 굉장히 기이한 인물이라고 느꼈어요.
무언가를 그만두는 것도 용기잖아요. 8년 동안 못 놓고 있던 고시 공부를 그만두고 시험도 보러 안 간다는 게, 우연히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시작한 달리기에 빠져서 그걸 계속 해나간다는 게 자영이가 가진 평범함 속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삶의 기로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저는 자영이의 방식이 솔직했다고 봐요. 그야말로 욕망에 충실해지잖아요. 엊그제 친한 언니와 <아워 바디>를 다시 봤어요. 뒤늦게 치과의사가 된, 공부의 시간을 오래 버텨온 사람이에요. 옆에서 다른 친구가 “그래서 쟤가 부장이랑 왜 잔 건데?” 하니까 그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8년 동안 하고 싶지 않은 걸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잖아”. 물론 그 언니가 자영이 같은 행동을 하진 않겠지만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거죠.
오직 하고 싶은 연기를 위해서 쭉 달려온 본인과는 정반대 인물 아닌가요?
저는 하고 싶은 걸 일찍이 알고 어떻게 보면 막무가내로 해온 스타일이라 자영이와는 정반대의 20대를 보냈죠. 물론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항상 거절당하고 서른까지 인지도도 전혀 없었지만, 그래서 누군가는 비슷한 실패의 맛을 봤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성질이 다른 것 같아요. 제가 그 시기에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어쨌든 난 이거 할 건데?’ 하는 욕심이었어요. 한가람 감독한테도 “내가 자영이랑 많이 다른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는데 오히려 감독님은 아니라고,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모르겠어요. 본질적으로 결국 하고 싶은 걸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점 아닐까요.
운동을 통해서 건강한 삶을 찾은 여자의 얘기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꽤 당황했어요. 운동영화라면 건전해야 할 것 같은데 <아워 바디>는 그런 선입견을 보란 듯이 비껴가는 영화였고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자영이가 러닝을 통해 현주를 만나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중반부까지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일 거예요. 그런데 현주가 떠나고 그 충격을 받아들이는 이후의 행동들은 좀 일반적이지 않죠. 어떤 평론가는 호러영화 같다고도 하더라고요.
점프수트는 Jain Song. 귀고리는 Tatiana.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고요. 원래 참고했던 영화도 <퍼스널 쇼퍼>였어요. 아시죠?
그 영화, 완전 호러잖아요. 차갑고, 어둡고. 그런데 주인공의 눈은 번뜩이고요.
“<아워 바디>가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의 영화였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면 재미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보고 나서 궁금증이 남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거니까…. 그런 영화도 가치가 있잖아요.
“여성영화로만 봐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에서 첨언하고 싶은 점이 있나요?
그건 제가 말을 더 잘했어야 했어요. 여성영화라는 게, 여성감독이 여성이 대다수인 스태프와 여성 주연과 함께 만든 영화라고 분류할 수 있잖아요. 저는 이게 혹시 여성주의 영화라고만 읽힐까봐,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영화에 프레임이 씌워질까봐 두려웠어요. 여성주의 영화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거지, 여성영화는 맞죠.
지난주에 셀프 웨딩을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솔직히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연애 기간이 너무 길어서 이미 가족 같았거든요. 프러포즈는 4년 전에 받았고. 그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너 지금 일하고 싶은 거 알아. 지금 당장 결혼 안 해도 되고. 그냥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다고 얘기해두는 거야.” 저도 “그래.” 했죠. 남편이 그 시간을 4년 동안 기다려줬어요. 올해 정도를 생각하긴 했는데 연말에 미국 영화를 찍게 되면서 좀 앞당겨졌죠. 지금은 남자주인공 캐스팅 때문에 기다리는 상황이고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제작자가 만드는 영화라죠?
그런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처럼 달달하고 로맨틱한 영화는 아니고 무겁고 현실적인데 약간 아린 연애 이야기예요. 오히려 <러스트 앤 본>과 비슷한 분위기랄까요?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디션 준비하면서도 인물에 애착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미국에서 다시 신인으로 돌아가는 거잖아요. 길었던 무명 시절을 떠올리면 오디션이 지긋지긋하지 않아요?
일 년 반 전부터였나. 에이전트에서 오디션을 대여섯 개 소개해줬고 그중에서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골라서 오디션을 봤죠. 미국 진출을 계획해서라기보다 오디션 보는 걸 워낙 좋아해요. 스시 셰프 연기도 해봤고요. 레즈비언 스토리에서 사랑이 싹트는 신도 연기해봤어요. <분노의 질주> 오디션도 봤네요. 최종적으로 그 역할을 안 하게 될 수도 있지만 매력적인 역할을 연기해보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요.
많은 배우들이 작품마다 선택받는 입장에 처하는 현실을 힘들어하잖아요. 희서 씨는 그걸 즐기네요.
오디션의 기회 자체가 안 오는 건 괴로운 일이에요. 아예 그 풀 안에 제가 없다는 건 힘 빠지는 일이죠. 아까 오디션이 지겹지 않느냐고 물으셨는데, 지겨움을 느낄 만큼 많이 본 것 같진 않아요. 제가 큰 기획사의 연습생이나 연영과 출신이 아니니까 오디션을 볼 기회 자체가 적었어요. 오디션 한 번 보기 위해 프로필을 돌리고 다녀야 했던 케이스라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점점 적어지긴 했지만, 저는 앞으로도 오디션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더 온대요. 에이전트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너무 신이 나요.
흔히들 배우가 기다리는 직업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찾아가는 직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제가 프로필을 들고 영화아카데미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아워 바디>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가람 감독은 <박열>을 보고 저를 캐스팅한 게 아니래요. 제 프로필 사진을 보고 웃는 게 마음에 들었대요.(웃음) 사실 오디션 꼭 안 봐도 되죠.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나 이거 해볼래, 재미있겠다’는 마음으로 찾아다녀야 하는 거죠. 솔직히 저는 편하게 연기한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항상 도전의 연속이었다 보니까 편하게 연기한다는 감각 자체가 없어요.
터틀넥은 Recto. 팬츠는 Leuni. 레더 코트는 Low Classic. 반지는 Marsbom.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금은 황정민, 이정재 배우와 함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촬영 중이죠? 그 와중에 브런치를 통해 틈틈이 에세이도 올리고요.
결혼을 준비하면서 제가 느낀 의아한 지점들이 있거든요. 왜 사람들은 결혼을 이렇게 바라보지? 싶은 것들. 특히 여자 배우의 결혼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시선이 많고요. 그런 부분에 대한 나의 의문들을 공유하고 싶었어요. 일이 바빠서 요샌 열흘에 한 번 정도 써요. 아, 오늘도 한 편 써야 하는데….(웃음)
개인적으로 가장 잘 쓴 글은 솔직한 글이라고 생각해요. 일기조차 100% 솔직해지기란 쉽지 않죠. 맞아요.
브런치를 쓰면서도 솔직하게 쓰기 참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뭔가를 포장하고 꾸미면 반드시 티가 나는 것 같아요. 많이 배우고 있어요.
출판 계획도 이미 끝났잖아요. 생각해놓은 책 제목이 있나요?
원래는 ‘희서의 서(書)’였거든요. 좀 모호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지금 쓰고 있는 첫 번째 원고의 소제목은 ‘꿈, 사람, 계절’이에요.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된 건데, 제가 계절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나무가 쓰러진 것에 대해 쓰고, 비가 오면 비가 온 것에 대해, 꽃이 피면 꽃 핀 것에 대해 쓰더라고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다는 건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거겠죠?
일단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만 글이 써지던데요.(웃음) 이래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가 봐요.
가을요.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한 가을날에 노을 지 지는 순간요. 딱 이맘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