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의 LGBTQ+ 아티스트- ① 제너럴 아이디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2019년은 전 세계 LGBTQ+ 커뮤니티에게 특별한 해다. 1919년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상담 및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던 독일 출신 의사이자 성과학자 마그누스 히르시펠트(Magnus Hirschfeld)가 성과학협회(Institut für Sexualwissenschaft)를 베를린에 창설한 지 100주년, 1969년 LGBTQ+ 인권신장운동에 불을 지핀 뉴욕 스톤월(Stonewall) 혁명이 발발한 지 50주년을 맞았다. | 독일,퀴어,예술,LGBTQ+,동성

 ━   LGBTQ+ Artists in Berlin   에이에이 브론슨, 라이언 브루어(Ryan Brewer), ‘Blue’, 2012, 라이트박스 내 듀라트랜스 이미지, 180x240x15cm, Image courtesy the artists and Esther Schipper, Berlin. ‘퀴어의 천국’ 베를린에는 관련 행사가 쏟아졌다. 퍼포먼스 센터 하우(HAU)는 베를린 거점 아티스트들에게 ‘Queer Future’를 주제 삼은 퍼포먼스를 공개 모집해 총 26명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우 창 & 보이차일드, 카를로스 모타, 카롤 라지예프스키 등 초청 작가의 공연 및 전시를 마련한 프로젝트 ‘The Present is not Enough’(6.20~30)를 진행했다. 6월 28일 스톤월 혁명 기념일 당일에는 탄야 레이턴(Tanya Leighton) 갤러리에서 미국 작가 섀론 헤이즈의 개인전을 개최해, 미국 소재 여자대학교 학생, 성소수자 부모를 둔 어린이 및 청소년에게 성에 관한 관념, 지식, 감정 등을 인터뷰한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이어서 7월에는 게이 박물관(Schwules Museum)에서 스톤월 혁명을 기점으로 서독, 동독, 통일독일에서 벌어진 퀴어 운동을 집중 조명한 아카이브 전시 (7.18~2020.9.30)가 열렸다. 다른 도시보다도 베를린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이 도시 자체가 역사적인, 살아 있는 ‘퀴어 허브’이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폭발적으로 융성했던 베를린의 퀴어 문화는 유럽과 북미의 관광객에게 단연 큰 볼거리였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이렇게 적었다. “베를린이란 ‘청년들’을 뜻한다. (중략) 파리는 오래도록 이성애자 여성 시장을 장악했는데, 그렇다면 베를린이 관광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변태라고 낙인찍힌 각종 페티시 축제 말고 뭐가 남았겠는가?”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미술, 음악, 문학계 아티스트들을 끌어들였고, 이 현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적어도 서구사회에서는 LGBTQ+의 인권운동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음에도 왜 퀴어 작가들은 여전히 베를린으로 모여드는 것일까?   에이에이 브론슨, ‘Artemisia for my Great Grandfather’, 2014, 퍼포먼스 장면, 제10회 광주 비엔날레.에이에이 브론슨, 리차드 존 존스(Richard John Jones), ‘Flesh of My Flesh (Curtains)’, 2014, 실크, 비스코스, 폴리에스테르 드보레, 280x260cm; 에이에이 브론슨, 라이언 브루어, ‘Red’, 2011, 라이트박스 내 듀라트랜스 이미지, 210x140x15cm, Photo by Stefan Altenburger, Image courtesy the artists. 볼프강 틸만스, 엘름그린 & 드라그셋, 클라라 리덴 등 유명한 퀴어 작가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부터 이 도시에 기틀을 잡았다. 그렇기에 북미에서부터 이미 명성을 떨친 캐나다 출신 3인 컬렉티브 제너럴 아이디어(General Idea, 이하 GI)의 멤버였던 에이에이 브론슨(AA Bronson, 본명 마이클 팀스(Michael Tims), 1946년 밴쿠버 출생)이 27년간 살았던 뉴욕을 떠나 2013년 베를린에 정착한 행보는 눈길을 끌었다. “게이 관광객으로서 베를린에 온 적은 한 번도 없다. 모두 일 때문이었다. 1983년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AdK)에서 GI의 설치작품 ‘P is for Poodle’(1982~89)을 전시하기 위해 방문한 게 처음이었다. 지금은 베를린에 있지만 1989년 쾰른에서 출발한 에스더 시퍼(Esther Schipper) 갤러리의 첫 전시도 GI의 개인전 였다.” 베를린 서쪽 샬로텐부르크 지역 부촌의 고상한 건물 최상층에 마련된 널찍한 집에서 만난 브론슨은 제1회 토론토 비엔날레 참여차 캐나다행을 하루 앞두고 시간을 쪼개 나를 만나줬다. “다드(DAAD)에서 약 일 년간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파트너 마크 얀 크라옌호프 판 데 루어(Mark Jan Krayenhoff van de Leur)와 베를린으로 이주하자고 결심했다. 뉴욕으로 돌아가 마크와 결혼식을 올리고 집을 정리한 뒤 베를린에 돌아왔다. 이전까지는 늘 크로이츠베르크나 미테 지역에 머물렀다. 하지만 나는 서베를린 시절부터 예술가들의 성지였던 샬로텐부르크가 마음에 든다.”   미술작가 에이에이 브론슨은 캐나다 출신 3인 컬렉티브 ‘제너럴 아이디어’의 멤버로 활동했으며, 1994년 다른 두 멤버가 에이즈로 별세한 뒤 개인의 작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가 뉴욕을 떠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소비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도 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시는 딜러, 컬렉터, 경매보다도 작가들을 위한 곳이다.” 1980년대 말 에이즈 위기의 시대에 GI의 다른 두 멤버가 에이즈 확진을 받고 세상을 떴을 때 브론슨은 절망했고 이후 티베트 불교, 샤머니즘 등을 통해 ‘힐러(healer)’로 거듭났다. 그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이와 연결지었고 GI 활동의 핵심이었던 협업 체제를 개인 작업의 동력으로 이어갔다. “베를린의 일상 문화는 여러모로 단체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날마다 문화예술 행사도 너무나 많다. 클럽 베르그하인(Berghain)만 해도 특정 그룹이 자신들만의 특색을 갖고 운영하는 게 분명히 드러나지 않나. 평소에도 해가 쨍쨍하면, 휴일이면 친구들과 공원으로, 호수로, 시외로 놀러가는 것이 아주 당연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의 소셜미디어를 보면 해외 각지에서 베를린을 방문하는 퀴어 미술인이 그의 집을 한 번씩 꼭 거쳐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2014년 제10회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했던 브론슨은 팔각정 건물 전체에 프로젝트 ‘AA Bronson’s House of Shame’(2014)을 대대적으로 선보였고, 여기서 두드러졌듯 그는 여러 주술적 재료, 도구, 방법론을 작업에 도입해왔다. “베를린도 그만의 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재력 있는 국가의 수도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숲, 공원, 호수 등 자연의 에너지가 많다. 뉴욕에 살았을 때 게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파이어 아일랜드(Fire Island)에서 사진 작업을 진행했는데, 베를린의 유명한 그루네발트(Grunewald) 숲, 토이펠스지(Teufelssee) 호수 등에서 이 사진 시리즈를 지속했다.” 그는 나이를 핑계 삼으며 힐러로서의 공식 활동은 중단했다. “기력 소모가 너무 커서 정기적으로 수행을 진행하기 어렵다. 하지만 베를린에는 치유돼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 2013년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나치스가 건물 외벽에 사람들을 세워 놓고 총살로 숙청한 총알 자국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들이 자행한 퀴어 학살을 비롯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마녀’로 간주된 퀴어를 처형한 역사도 있다. 근래 베를린에 오는 수많은 퀴어도 모두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이런저런 모임, 바, 클럽을 찾는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여러 트랜스젠더가 이곳 커뮤니티에서 큰 힘을 얻는다.” 이런 측면에서 브론슨은 전 세계 소수자 진영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행한 분열주의가 베를린에서만큼은 미미한 편이라고 봤다. “퀴어가 많이 찾는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의 바 ‘쥐드블록(Südblock)’은 한쪽에 ‘젠트리피케이션에 반대하는 무슬림 여성’의 모임을 위한 좌석을 늘 따로 마련해둘 정도로 포용적이다. 이 도시는 퀴어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도 적은 편이다. 이들도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유명한 섹스 클럽 ‘랍.오라토리(Lab.oratory)’에는 나체에 휠체어를 타고 성생활을 즐기는 고객도 있고, 회원제로 운영되는 섹스 클럽 ‘아이피나(Ajpnia)’에는 농인 직원들이 많다. 바텐더도 농인이어서 입술 움직임을 읽어 주문을 받는데 내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웃음)”   퀴어 콘텐츠도 점차 다변화하면서 게이, 레즈비언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TV 시리즈, 영화 등도 많아지고 있다. “내가 1986년 40세에 뉴욕으로 이사를 갔는데, 대부분 이런 콘텐츠들이 이 시기나 직후를 배경으로 삼는다. 보고 있으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든다. 스크린 속에서는 신비화되거나 매우 감상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아직도 그때가 지금 같다. 먼 과거 같지 않다.” 그는 본인의 작업 외에도 이 시기에 왕성히 활동했던 GI의 유산을 꾸준히 아카이브하고 전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혼자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상품으로서의 미술품을 제작하는 데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GI의 작품이 주 수입원이다.(웃음) 10월 런던 프리즈 마스터, 파리 피악, 마이애미 아트바젤 등에서 전부 GI의 작품, 특히 ‘Aids’ 시리즈를 많이 선보일 예정이다.” 로버트 인디애나의 유명한 ‘Love’ 시리즈를 차용한 GI의 ‘Aids’ 회화 및 벽지 시리즈는 다른 두 멤버가 각각 1989년, 1990년 에이즈 확진을 받기 이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1994년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회운동과 맞물린 이들의 미술작업 활동은 지속됐다. 그밖에도 GI는 메일 아트, <파일 매거진(FILE Magazine)> 발행, 아트 퍼블리싱 등 출판 작업을 왕성히 해왔고, 이는 브론슨의 개인 활동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2004년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의 디렉터를 맡았고, 2005년 뉴욕 아트북 페어를 설립한 데 이어, 2013년 L.A 아트북 페어 설립에까지 기여했다. “아트북 페어를 진행했을 때 유럽에서 가장 많은 출판사가 참여한 도시가 베를린이었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2년 동안 9개의 팬 잡지 형식 출판물을 발간했다. 우리 집 옆 건물 1층에 아주 작은 공간이 하나 비어 있는데, 언젠가 여기에 아트북 서점을 하나 내고 싶다. 건물주가 그 공간을 내놓질 않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