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적 로맨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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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적 로맨스

지금 밀레니얼 세대에게 사회주의란 젊은 이념이고 이상적인 미래상을 그리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사회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 사회주의자와의 데이트가 더욱 섹시한 이유.

BAZAAR BY BAZAAR 2019.09.16
나는 사회주의자거든.
런던의 금요일 밤, 여느 때처럼 펍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한 친구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최악의 소개팅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가 만난 남자는 안정된 직장과 탄탄한 몸을 자랑하는, 그러나 결정적으로 신자유주의자였다. 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 양성애자 그리고 사회주의자인 그녀가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신봉자, 그것도 단순히 아마존과 스타벅스 마니아를 넘어서 영국의 새로운 총리 보리스 존슨에 대한 기대감을 슬쩍 드러내는 누군가와 잘 될 가능성이란 거의 0에 가깝다. 그날 밤 펍에 있던 다른 친구들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아마존’과 ‘스타벅스’ 부분에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보리스 존슨’이 나오자 욕을 추임새로 섞어가며 격한 공감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20~30대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이탈리아인이 모두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덧붙이며 의견을 피력해갔다. 그리고 한국인인 나는 약간 머뭇거렸다.
사회주의자라니, 이거 조금 민감한 문제 아닌가?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환경 탓이 가장 크겠지만 다른 한국 친구들의 반응 또한 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 칼럼의 취재를 위해 주변 친구들에게 ‘사회주의 하면 연상되는 단어’를 보내달라 요청했을 때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억압, 획일화, 빈곤, 빨간색 등을 떠올렸다. 반면 스웨덴인에게서는 공유, 케어, 사랑, 프랑스인에게선 사회적 정의, 공중보건, 부의 분배, 그리고 영국인으로부터는 공정성, 커뮤니티, 사회, 인도적인, 정당한 등의 긍정적인 단어들이 쏟아졌다. 이건 내 주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뉴욕 타임스> <뉴욕 매거진> <이코노미스트> <허핑턴포스트> 등 세계 유수 언론에서도 “왜 모두 갑자기 사회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나” 같은 기사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찬반은 분분하지만 공통적 팩트는 이렇다. “밀레니얼 세대는 사회주의를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이 섹시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일단 쿨하거나 멋지다는 뜻, 그리고 문자 그대로 로맨틱한 관점에서의 섹시함이다. 어쩌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비교했을 때 보다 높은 성적 만족도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러시아 및 동유럽학 교수인 크리스틴 고드시(Kristen R. Ghodsee)는 책 <왜 여성들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더욱 멋진 섹스를 경험할 수 있는가(Why Women Have Better Sex Under Socialism)>에서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실시된 동독인과 서독인에 관한 연구를 그 증거로 들었다. 이 비교사회학적 연구에서 당시 노동과 가사일이라는 이중부담을 겪어야 했던 동독의 여성들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면서 집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서독 여성들보다 두 배 이상 오르가슴을 느껴온 것으로 밝혀졌다. 고드시는 그 이유를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서 찾았다. “1990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이 노동 인구로서 활동 가능한, 그리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자원과 교육 환경이 수반되면 살아남기 위해 남자가 필요 없다. 집세를 내기 위해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남녀평등에 있어서는 사회주의가 한 걸음 빨랐다. 19세기 베벨과 엥겔스는 여성평등이라는 이념적 토대를 마련했고 레닌은 양성평등을 혁명의 의제 중 하나로 제시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미국보다 3년 앞선 1917년에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을 인정했으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낙태 합법, 이혼 간소화 등이 이어졌다. 섹스 역시 단순한 신체적 활동으로 해석되지 않았다. 체코의 마사리크(Masaryk) 대학 카테리나 리스코바(Katerina Liskova)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52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성행태학자들은 이미 여성 오르가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여성 쾌락의 핵심 요소로 남녀평등에 초점을 맞췄다. 1961년에는 오로지 이 주제에 전념하는 회의를 개최했을 정도였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이기 이전인 1989년 폴란드의 성행태학자들 역시 성적 쾌락을 위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여성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과로를 하고 미래와 재정 안정성을 걱정해야만 하는 상태라면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게 그들의 의견이었다. 경험해본 바, 100% 맞는 얘기다.
국가사회주의와 민주자본주의 모두를 경험한 불가리아인 안나 두르체바는 고드시와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건전한 애정 관계를 방해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1940년대 태어난 자신의 삶을 1970년대 후반 출생인 딸과 비교해보면 성적으로 훨씬 로맨틱했다는 것이다. “내 딸의 삶은 일이 전부인 것처럼 보여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남편과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피곤하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남편도 이미 그녀만큼 피곤하니까. 그들이 하는 거라고는 TV 앞에 좀비처럼 앉아 있는 것뿐이죠.” 이건 지구 반대편 불가리아 커플만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다. 야근 후 대중교통에 몸을 실어 겨우 집에 도착했는데 섹스라니, 내일도 출근 지옥철과 야근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웬 사치스러운 소린가?
밀레니얼 세대가 섹스에 소극적이라는 건 통계로 증명됐다. 미국의 심리학 저널 <성적인 행동 아카이브(Archives of Sexual Behavior)>에 게재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24세 응답자 중 15%는 성인이 된 후 성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1990년대 초 같은 연구에서 그 수치는 고작 6%였다. 밀레니얼 세대는 성관계 파트너 숫자도 앞선 세대에 비해 적었다. 베이비붐 세대가 20대에 평균 11명, X세대가 10명의 섹스 파트너를 가졌던 데 반해 밀레니얼 세대의 파트너 숫자 평균은 8명에 그쳤다. 진짜 섹스 대신 우리는 틴더에서 미친 듯이 왼쪽 오른쪽으로 스와이프를 하는 걸 택했다. 각종 사기들, 그러니까 지금 매칭된 이 사람의 프로필 사진이 98% 포토샵의 결과물은 아닐지 혹은 뜬금없이 통장 번호를 물어올까 봐 걱정하면서 말이다.
지금 사회주의가 섹시한 체제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섹스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떨어지는 주식, 월세와 카드 값을 걱정해야 하는 팍팍한 현실 말이다. 하지만 “밀레니얼에게 자본주의란 책임지지 않고 세상을 파괴한 부자를 뜻하고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는 <허핑턴 포스트> US의 해석처럼 밀레니얼 세대가 말하는 사회주의는 이전의 국가사회주의와는 그 출발과 맥락, 의미가 모두 다르다. 현재 소셜리즘 슈퍼스타들의 이론만 들어봐도 밀레니얼 세대가 외치는 건 민주사회주의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국가사회주의가 경제 제도에 중점을 뒀다면 민주사회주의는 ‘최고 형태로 발전했을 때의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라 일컫는다. 국가사회주의와는 달리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계획경제 실시로 사회를 단번에 개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인 노력으로 인종과 젠더 평등, 복지, 이민자 문제, 직업 윤리 등을 포함한 미래의 사회상을 그리는 일에 가깝다. 그러니까, 밀레니얼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무시무시한 회색 체제가 아니다. 우리의 자원을 공공의 이익에 사용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공공 의료서비스를 포함한 교사, 경찰, 소방관, 학교, 도로, 도서관 등의 공공 서비스 제도를 지지하고 기후 문제를 더욱 신경 써야 한다거나 구글과 아마존 같은 거대 기업이 더욱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지금의 사회주의자다. 아마 당신과 내가 그렇듯이 말이다.
지금도 사회주의자들을 위한 데이트 플랫폼 ‘레드 옌타’의 인스타그램 계정 ‘@Redyenta’에는 뉴욕, 런던, 워털루, 파리 등 세계 각지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프로필을 업데이트 중이다. ‘마르크스와 테니스, 이탤리언 요리를 좋아하는 34세 헤테로 섹슈얼 남성’과 ‘라디오 듣는 것과 고양이를 좋아하는 21세 범성애자(Pansexual) 여성’, ‘세계산업노동자동맹과 DSA 회원이지만 아직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자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멍청이에 헤테로 플레서블 그리고 폴리아모리인 남성’ 등 각양각색의 사회주의자들이 또 다른 사회주의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데이팅 원칙은 하나다.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이론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말했던 대로 사랑은 경제적 여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어쩌면 거기엔 통장 잔고 걱정 없는 진짜 섹시한 로맨스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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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권민지(프리랜스 에디터)
    에디터/ 박의령
    사진/ Alison J Carr
    웹디자이너/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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