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칸 영화제에서 검은 하이힐을 벗어 들며 “당신이 남성들에게 드레스와 힐을 강요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고 외쳤다. 힐을 벗어던진 여자들은 노브라, 레깅스 시위 등 이른바 패션 미투 운동을 서슴지 않는다. 미투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여성적 동질감은 더욱 끈끈해졌다. 새로운 시즌 런웨이를 보면서 가장 매료된 아이템은 단연 ‘수트’다. 재킷이나 팬츠만이 아닌 한 벌로 빼입는 팬츠수트 룩 말이다. 패션의 시계를 되돌려보면 여성에게 팬츠수트는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는 아니었다. 1930년대, 양성적인 매력을 지녔던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종종 ‘할리우드에서 옷을 가장 잘 입는 남자’로 불렸다. 흑백사진 속 그녀의 수트 룩은 여전히 멋스럽게 느껴지지만, 당시 그 의상을 충격적으로 여긴 파리 경찰서장은 그녀에게 파리를 떠날 것을 명했을 정도였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1966년 남자의 전유물이었던 턱시도를 변형시킨 르스모킹을 선보였을 땐, 여성해방운동이 한창이었다. 1980년대도 마찬가지. 커다란 어깨와 오버사이즈의 파워 수트가 유행했는데 역시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된 시대였던 것. 1990년대를 풍미한 디자이너 헬무트 랭의 디자인 철학은 ‘지금’ ‘도시적’ ‘깨끗한’ 그리고 ‘모던’이었다. 그는 패션학교에 다닌 적도, 디자이너로서의 경력도 전혀 없었다. 자신이 자라나고 활동한 오스트리아에서 영감을 얻어 어린 시절 입었던 옷이나 발칸반도 이민자들이 입던 어두운 색상의 싱글 브레스트 수트를 재해석한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옷을 “진정으로 아는 자들만이 감탄하는 일종의 익명인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대를 상징하는 문화와도 같았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미니멀리스트 디자이너 질 샌더 역시 조용한 자신감이 반영된, 화려하지 않은 의상의 필요성을 감지했다. 완벽한 피트와 품질, 모더니즘을 옷을 입는 사람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여겼다. 오늘날 그녀의 의상은 아름다우면서도 기술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울트라-모던, 즉 양성적 감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고전이라는 것은 이전 시대의 정신과 대립하기에 너무 게을러서 생겨난 변명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그녀는 여성스러움의 진부함을 넘어서 남성 수트의 구조에서 발견한 세련된 점을 받아들였다. 그 이후로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수트가 몇 년 전부터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더니 이번 시즌 트렌드의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 이번 시즌 팬츠수트의 핵심은 ‘숨겨진 여성성’에 있다고 쿠튀르 수트를 디자인하는 제이백쿠튀르의 디자이너 백지훈은 설명한다.
디자이너마다 옷에 담고자 하는 시각이 분명하죠. 남성복과는 달리 여성을 바라볼 때 강조하거나 커버하고 싶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라 재단의 방식도 달라집니다. 최근에는 수트 본연의 매니시하면서도 직선적인 느낌은 유지하되 가슴 라인과 허리 라인은 은은하게 살리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의 설명처럼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발견한 팬츠수트들에는 여성성이 묻어났다. 지극히 남성적인 아이템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여성스러움 탓에 자연스럽게 이끌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 수트는 신체와 몸매를 점잖게 숨기는 반면, 여성의 경우 몸의 유려한 곡선에서 답을 찾는다. 최소한의 심지를 사용해 전체적인 실루엣을 부드럽게 하고, 가슴과 허리, 엉덩이의 곡선을 살리는 것. “토르소의 볼륨과 여체의 부분적인 곡선에 더 신경을 씁니다. 다양한 커팅으로 패턴을 좀 더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여자 수트의 매력이죠.” 런던 새빌로의 캐드 앤 더 댄디(Cad and the Dandy)에서에서 비스포크 테일러로 활동하는 김동현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남성 수트가 전체적인 라인의 균형, 라펠, 단추의 개수와 위치, 포켓 형태에 따라 좌우된다면, 여성 수트는 실루엣으로 트렌드가 결정된다고. 그야말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어깨의 구조에서 시작됩니다 그래픽적이고 조각적인 테일러링은 날카로운 세련미를 지니죠.” 생 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의 말처럼 2019 F/W 시즌 수트는 ‘어깨’에 모든 것이 달렸다. 맞춤이 아닌 기성복에서 수트를 고를 때도 가장 눈여겨봐야 할 것이 바로 어깨선. 이번 시즌에는 어깨가 높거나 넓은 재킷이 보다 트렌디하다. 아크네 스튜디오, 구찌, 발렌시아가의 컬렉션을 참고하면 자신감 넘치는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체크해야 할 것은 비율이다. 티비 컬렉션에서처럼 오버사이즈 더블 브레스트 재킷에는 롱앤린 실루엣의 팬츠가 제격이다. 가브리엘라 허스트처럼 세로 방향의 핀스트라이프 패턴의 수트 역시 날씬해 보일 수 있는 비법. 보다 여성스러운 실루엣을 원한다면 프라다, 페라가모, 드리스 반 노튼처럼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스타일이 좋겠다.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소화한 팬츠수트더라도 블랙 컬러라면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올가을, 우아하고 세련된 팬츠수트 룩은 회색빛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라이트 그레이와 멜란지 그레이의 따뜻한 느낌부터 차가운 슬레이트와 블랙과 흡사한 차콜 그레이까지 뉴 블랙이라 불리는 다채로운 회색빛!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그레이는 수트와 만나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한다. 체크나 스트라이프 같은 패턴을 더하면 보다 경쾌하고 활동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두도록.
“옷을 통해 자신을 어떻게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느냐에 관한 겁니다. 결국 우리가 패션에서 기대하는 전부죠. 우린 특별한 옷을 입을 때 스릴을 느낍니다. 바로 당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죠.” 파코 라반의 디자이너 줄리앙 도세나의 말처럼 그레이 수트야말로 올가을, 여자를 위한 가장 든든한 파트너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