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지까지 퍼진 K-POP 열풍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열린 글로벌 K-팝 경연대회 예선전에 다녀왔다. ‘일상적이지 않은’ 도시에서의 K-팝, 국가발 문화 프로모션, 팬덤 문화는 어디까지 울려 퍼질 수 있을까. | 성지순례,열풍,팔레스타인 K-팝 팀,Pal-K,팬덤

온니(Unnie), 안녕하세요.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히잡을 쓴 10대 소녀 무리가 능숙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토끼 귀가 팔랑거리는 셀카앱이 켜진 휴대폰 액정을 들이댔다. 해외 K-팝 관련 행사에서 예상 못할 만남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 7월 천진난만한 소녀들을 만난 곳은 분명 남달랐다.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임시 행정 수도로 불리는 라말라(Ramallah). ‘설마 여기까지’라고 여겼던 도시에서 2개 층 강당을 빼곡히 메운 K-팝 경연대회가 열릴 줄은,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세상 당당한 제스처와 거만한 표정으로 ‘으르렁으르렁 대’는 무대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행사의 이름은 ‘2019 창원 K-팝 월드 페스티벌.’ 최종 경연대회가 열리는 경남 창원시의 이름을 딴 이 행사는 2011년 개최 이래 해외 K-팝 팬들이 가장 선망하는 행사로 통한다. 예선 참가자를 모집하는 공고가 뜨는 3월이면 각국 도시별 K-팝 커뮤니티가 들썩인다. 최종 결선에 진출하는 참가자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실제 K-팝 아티스트들과 합동 공연을 할 기회도 얻는다. 지난해엔 총 75개국에서 참가해 결선에 진출한 12팀이 그해 10월 창원에서 생중계로 최종 무대를 선보였다. 역대 우승자들의 국적은 필리핀, 카자흐스탄, 체코, 인도네시아, 미국, 우즈베키스탄, 아일랜드,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 그야말로 ‘글로벌’하다. K-팝이 아무리 ‘글로벌’해도 팔레스타인에서 이 행사의 예선전이 열렸다는 건 눈여겨볼 만하다. 팔레스타인은 흔히 이스라엘과의 ‘분쟁’ 지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에 영토와 주권을 빼앗긴 채 군사 지배를 받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대부분의 땅을 빼앗겼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라말라가 속한 요르단강 서안의 ‘서안지구’와 지중해에 면한 ‘가자지구’, 동예루살렘만이 팔레스타인 영토로 남았지만, 동예루살렘은 1980년 불법 병합을 당했다. 그마저도 서안지구 곳곳에는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불법으로 정착촌 마을을 세워 생활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자국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장을 하고 주요 길목에 상주하며 삼엄한 공기를 드리운다.   세계적인 성지 순례 관광도시 예루살렘과 고작 15km 떨어져 있는 라말라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은 꽤나 험난하다. 1930년대만 해도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 아래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공항이던 칼란디야 국제공항, 이제는 서안지구 최대 규모의 검문소가 되어버린 그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의 지휘 아래 모든 차량과 행인은 이곳을 통과할 ‘허가증’이 있는지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버스에서 내려 보안검색대에 짐을 스캔하고 촘촘한 쇠창살로 된 회전문을 걸어서 통과한 뒤 다시 라말라행 택시나 승합차로 갈아타야 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인 여행객 신분으로도 이 절차를 거치고 나면 진이 빠진다. 팔레스타인 국적의 소녀들이라면 그 과정이 얼마나 더 까다로울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이번 행사를 지원한 자발적 팬덤 조직 ‘팔레스타인 K-팝 팀(이하 Pal-K 팀)’의 리더 라완(Rawan) 역시 지역별로 버스를 대절하는 일에 가장 힘을 쏟았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팬들이 옵니다. 아시다시피 통행이 자유롭지 않은 탓에 행사를 보러 라말라까지 여행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에요. 대부분이 어린 여학생들인 탓에 부모님들의 걱정도 크고요.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헤브론, 나블루스, 제닌, 베들레헴, 툴카렘 등 지역마다 자원봉사자들이 한 명씩 나서서 미리 희망 참여자들을 모아 버스 한 대를 대절해 움직입니다. 팬들 중에는 이스라엘 내 하이파와 나사렛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진행하는 예선전도 있지만 이들은 그곳에 참여하는 대신 라말라에 숙소를 구해가면서까지 이곳으로 왔죠.(8월 10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대학교 강당에서도 같은 행사의 이스라엘 예선전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올 수 없는 팬들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다만 (출입이 봉쇄된) 가자지구에 사는 K-팬들만은 행사에 올 수가 없어요.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미어집니다.” 행사가 끝난 뒤, 정신없이 서로 기념사진을 찍는 행사장 한쪽에서, 한 무리의 팬들에게 조심스레 “군사 점령 하에 K-팝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 소녀들, 역시나 당당하고 지체 없이 한마디씩 외쳤다. “군사 점령 아래 K-팝이란 우리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는 창문 같은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을 맘껏 즐기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많은 이들과 연결된다는 느낌은 그 어떤 것보다도 제게 굉장한 행복과 힘을 줘요.” “K-팝은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이들은 팬덤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나의 권리가 무엇인지 인지하며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일. 이건 어쩌면 이 땅을 둘러싼 이스라엘의 불의에 열정적으로 저항하기 위한 기본기 중의 기본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