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론 디노네의 물고기, 기동, 텅빈시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금빛 태양과 부유하는 물고기, 기둥 형상으로 선 땅과 텅 빈 시계.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가 삼청동에 창조한 ‘earthing’이라는 제목의 시적 세상, 21세기인들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가 선사하는 감동의 원천을 찾아서. | 전시,미술,자연,예술,우고론 디노네

물고기와 기둥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것 이외의 모든 걸 자연이라 상정할 때, ‘가장 거대한 자연’인 태양의 맞은편 전시장에서는 ‘가장 사소한 자연’인 물고기 52마리를 만날 수 있다. 론디노네는 태곳적 창조물인 새, 말, 물고기를 원시적 재료인 흙(점토)으로 빚고 캐스팅해 연작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공기, 흙, 물을 상징하는 각각에게 ‘Primitive’ ‘Primal’ ‘Primordial’, 즉 공통적으로 ‘원시적’이라는 뉘앙스의 제목을 붙였다. 그중 물고기 연작 ‘Primordial’은 새나 말, 아니 공룡보다도 훨씬 이전인 고생대에 출현한 거의 최초의 생명체라 원시성이 배가된다. 바쁜 현대인들은 지구만큼 오래되고, 공기처럼 당연한 존재에 마음을 쓰지 않지만, 어쨌든 론디노네는 일군의 물고기에게 포스트모던한 도시 서울과 등을 맞댄 이 공간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시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방금 전까지 태양을 관망하던 거시적 관점은 물고기를 관찰하는 미시적 관점으로 순식간에 전환된다. 이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되는 건 각각의 물고기들이 생김새가 다르기도 하거니와 독립적인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the boulder(바위)’ ‘the cave(동굴)’ ‘the marsh(습지)’ ‘the dune(모래언덕)’ ‘the lagoon(석호)’ ‘the fossil(화석)’ ‘the drift(해류)’ ‘the ultraviolet(자외선)’ ‘the drift(해류)’ ‘the gravity(중력)’ ‘the wildlife(야생동물)’ ‘the tide(조수)’ ‘the maelstrom(물 소용돌이)’ ‘the crater(분화구)’ ‘the terrain(지층)’ ‘the blizzard(눈보라)’ ‘the brook(개울)’ ‘the comet(혜성)’…. 작가는 낙인과도 같은 자기 지문이 잔뜩 묻은 52마리의 물고기들을 지구과학적 현상을 총망라한 단어들로 일일이 호명함으로써, 시적 중의성과 전시의 명분을 공히 획득한다.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할 자연 요소들을 예술로 선보이는 건 그가 현대미술을 통해 단순히 동시대적인 것 이상의 무한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물고기들이 상징하는 원시성은 흙으로 뒤덮인 기둥 작품 ‘two standing landscapes’를 통해 더 드라마틱해진다. 이 풍경을 통해 론디노네는 이번 전시가 전제한 ‘다른 차원의 세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게 무엇이든 그게 맞다”고 종용한다. 단단하고 굳건한 땅이 아니라 만지면 부스러질 듯 연약한 땅으로 의도된 기둥은, 물고기 사이를 다닐 때보다 관객의 행동을 더 조심스럽게 만들고 이로써 존재론적 경계를 더욱 명확히 인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사실이 월터 드 마리아 같은, 자연 속에 본인의 작품이 동화되기를 바랐던 대지미술가들과 론디노네가 다른 점이다.열심히 물고기들 사진을 찍다 보면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왜 52마리일까? 작가가 명확히 설명한 바 없지만 이런 추측은 가능하다. 그는 창문 시리즈를 52개로 만들고는 일 년이 52개의 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파리 튈트리 공원에 놓여 있었던 공공미술작품, 마스크 시리즈 중 하나인 ‘Moonrise’는 12가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 년이 열두 달이라는 개념으로 조직화한 작업이라 했다. 물론 전시장 내부를 떠다니는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실제 세어보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론디노네는 시간을 잊은 적 없다는 사실이다.뉴욕에서 활동 중인 우고 론디노네는 스위스 브루넨 출신이다. 18세 때 예술가가 되고자 한 그는 어느 예술가의 일을 도우려 취리히로 옮겼고, 빈의 미술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80년대 후반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작업’을 묻는 질문에 늘 올리브나무를 언급했다. 그의 부모는 스위스로 이주하기 전, 그 조상이 수천 년 동굴생활을 한 이탈리아 고도시 마테라에서 나고 자랐다. 론디노네는 이 땅에서 1천~2천 년 동안 서식한 올리브나무를 주형으로 제작, 작품으로 만들었다. 나무들은 각기 다른 땅으로 옮겨져(국제갤러리 정원 같은) 그의 시간, 부모의 시간, 조상의 시간, 그리고 생면부지 사람들의 시간까지 응축한다. 대를 잇는 무의식 같은 기억을 품은 올리브나무는 작가에게 자기 존재의 원형이며,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시간성과 원시성의 원천이다. 텅 빈 시계원시성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태양 주변을 하릴없이 서성이듯, 물고기 사이를 느리게 걷는 것뿐이다.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속 ‘느림’은 시간(속도)뿐 아니라 감정과도 관계 있다. 이 공간에 있다 보면 이상한 무력감이 엄습한다. 활동성을 최고의 미덕 삼아 달리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시간 개념이 아니라, 익숙지 않은 천천한 리듬으로 나만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데서 오는 당혹스러움 같은 거다. 거의 모든 미술 전시가 대체적으로 곤혹스러운 건 단순히 작업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우고 론디노네는 이 낯선 느낌을 극대화한다. 스스로의 시간을 통제해보라는 격려를, 한낱 물고기의 존재를 통해 전한다. “그냥 있어 봐요. 이곳에서는 수동적이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우고 론디노네가 스튜디오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빚어내는 그 순간을 상상해본다. 작금의 현대미술계에서는 작가가 자기 작품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자체가 실로 ‘수동적’인 행태다. 그러나 그에게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철학적인 일이며, 그런 면에서 그의 인상적인 말은 이번에도 통용된다. “내가 하는 예술이라는 건 논리적이거나 생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내 작업의 논리는 수동성, 즉 당신이 이행할 필요가 없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고립, 평온 혹은 꿈 같은 것. 그래서 나는 늘 당신이 예술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왔다. 그냥 음악을 듣듯이 느끼면 되는 거다. 작가가 작업에 어떤 가치를 설정해버리면 그 작업은 활력을 잃은 채 성장을 멈춰버릴 것이다.”지난가을, 코펜하겐 아르켄 미술관에 갔다가 우연히 우고 론디노네의 전시를 본 적 있다. 라는 제목의 전시에서는 예의 올리브나무, 45명의 광대 조각, 만달라를 연상시키는 무지개 작품 등 그의 ‘메가 히트작’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전시장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광대 조각들은 그가 구사해온 ‘고독의 어휘’의 중심에서 핵심 개념인 수동성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분을 잊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광대들이 슬프거나 지쳐 보인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론디노네에게 수동성이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빈 공간이다. 그의 광대들은 수동성을 통해 실존주의적으로 성찰하며, 관객들은 이들을 통해 인간 본성과 현 사회를 통찰한다. 기억해보면,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상법도 광대들 사이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한참 동안 앉아 있는 것이었다.이번 전시는 태양(‘the sun’)으로 시작해 물(’Pridomordial’)과 땅(‘two standing landscape’)을 지나 시계(‘yellow white green clock’)로 마무리된다.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 태양, 물, 땅은 한쪽 벽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 시계로 인해 시간의 끈으로 묶여 유기적으로 완결된다. 이 시계에는 시침도, 분침도 없다. 벽 뒤에서 진입하는 태양빛에 따라 변화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명암과 채도로 시간을 짐작할 뿐. 사라진 시침과 분침은 세상의 시계에 자신의 시간을 위탁하지 말라는 작가의 메시지에 다름 아니다. 시간을 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수동적으로 다루는 시계는 역설적으로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을 영원히 각인시킨다. 좋은 예술은 보는 이를 멈추게 하는 힘을 갖고 있고, 어떤 작품과 만난 전과 후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세상 한가운데 스스로 있던 이 경험을 잊지 말라고, 어떤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누군가로서 스스로 가치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는 적극적인 존재가 되라고 독려한다. 론디노네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내면과 인간성을 탐구하는 방식이며, 인간성이라 함은 다름 아닌 ‘나의 상태’다.그러므로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은 어디에 있든 ‘순수의 시대’로 진입하는 관문이 된다. ‘럭셔리 패션 스페이스’인 방돔 광장에 거대한 올리브나무가 들어섰을 때, 태곳적부터 뿌리를 내린 듯한 나무를 통해 시간성을 새삼 인식했다. 최첨단 자본지대인 록펠러 센터 앞에 세운 인간 모양의 석상(‘human nature’)은 “당신 세상의 기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라스베이거스 남쪽, 네바다 사막에는 약 10미터 높이의 형광색 돌탑(‘seven magic mountains’)이 현대를 위무하기 위한 토템처럼 세워졌다. 황색 사막 한가운데의, 플라스틱인지, 스티로폼인지, 돌인지 구분이 안 가는 탑은 카지노와 스트립 쇼 일색이던 일대의 지형적, 문화적 색을 ‘마법처럼’ 바꾸며 약 1천6백만 명이 찾은 명소로 거듭났다. 애초 2년이었던 작품 설치 기간은 20년으로 연장되었고, 예술의 일시성이 영원성으로 치환된 좋은 예로 꼽히고 있다.모르긴 해도, 우고 론디노네는 자기 작업이 자유의 여신상 혹은 브뤼셀의 오줌싸개 소년상처럼 인식되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야심만만하되 선하고, 꿈꾸되 욕망하지 않는다. 비합리성으로 합리성에 대항한 낭만주의자들처럼, 독특한 시간의 가치를 통해 세상의 속도에 반대한다. 나는 그의 작품 앞에 설 때마다 부박한 세상의 해방구에 온 듯 초월의 감동을 선사받는다. 이 공간에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일깨우는 그의 작품들은 온갖 담론으로 무장한 현대미술 현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유로 나를 이끈다. 제 존재를 성찰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라는 믿음과 정신은 미술계를 매료시켰고, 21세기인들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로 회귀하게 한 그는 이로써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할렘의 오래된 교회를 개조한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튜디오’에서 두문불출 꿈꾸어온 ‘예술작품의 영적이고도 마법 같은 힘’은 보는 이들의 감정적 경험과 지적인 활동의 이중주로 비로소 완성된다. 서울이든, 뉴욕이든, 그 어디든 우고 론디노네라는 이름의 세계에서 무한한 순수의 시대가 펼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