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여행자처럼 살아보기
여행을 가면 귀국 티켓을 바꿔서라도 한 달을 꼬박 채우고야 마는 버릇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단 한 번도 돌아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 모든 낯선 곳들은, 왜 언제나 거부할 수 없이 아름다운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행 중에는 귀국 후의 할 일이 끊임없이 떠오르는 걸까. 돌아가기 싫다는 응석에 반하게도 나는 이미 여행 이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행일기로 마련한 노트의 반쯤은 한국에서의 어떤 미래들로 북적였다. 곧이어 나는 수능 이후의 버킷리스트를 적는 학생의 심정이 된다. 여행에 속한 채로 떠올리는 서울은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돌아가면 새롭게 요가 클래스를 끊어야 할 것 같고,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들이 솟구친다. 여행 직후는 계획의 무덤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명랑하고 완벽하기만 한 계획들의 무덤. 투명하고 순박한 확신들의 집합. 그것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과정도 여행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다. 홀로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그 무너짐이 생략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인천공항에 떨어졌다. 지문 인식으로 간편히 게이트를 통과하고 한국어로 된 용지의 빈칸을 채우고,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 속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린다. 집 밖을 나서서 하늘부터 바라보고, 햇살 하나에 감탄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긴장된 모습은 더 이상 없다. 이곳엔 편안함, 나쁜 말로 하면 권태뿐이다.
자, 이제 억지로라도 새로워져볼까. 그 많던 계획을 잊고, 여행자처럼 살아보기. 순수한 아이가 되어 모든 경험이 처음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또한 내 여행의 연장선상이다. 특히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 이틀간의 스케줄이 몹시 중요하다. 이를테면 친구와 약속을 잡고 새로운 장소로 향한다. 새로운 음료를 주문하고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영화를 본다. 희미하던 서울은 내가 적극적으로 구는 만큼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좋은 건 책을 흡입하듯 해치우는 일이다. 긴 여행에서 단 한 가지 그리워했던 일은 고추장도, 집에 있는 고양이도 아닌 모국어로 된 책이었다. 어딘가에 켜져 있는 TV 소리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아도 알아듣는 것처럼 학습이 아닌 생활로서 다가오는 나의 언어. 두껍고 빳빳한 새 책들의 춤과 반갑게 재회한다. 얌전히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은 사실, 얼굴을 종이 속에 파묻고 있는 격정적 밀회의 표지이다. 애무하듯 그렇게 책을 만나다 보면 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의 권태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다음 행선지가 찍힌 티켓이겠지만, 오늘도 나는 아른거리는 이국의 얼굴을 잠시 묻고, 읽어 내려간다. 베를린만큼이나 생소한, 뉴욕만큼이나 흥미진진한 글자들, 그리고 여행만큼이나 야심 찬 나의 하루들을.
글과 사진/ 유지혜(여행작가, <조용한 흥분> 저자)
떠나지 않을 용기
출근길 버스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오던 날 마음먹었다. 떠나야겠다. 내게도 직장인병이라 불리는 번아웃이 온 거였다. 갑작스레 휴가를 내고 현실에서 도망쳤다. 애초에 계획도, 루트도 없는 여행이었다. 그저 쉴 곳이 필요했다. 심심할 정도로 작은 섬을 찾다가 고른 곳이 오키나와의 자마미 섬이었다. 서울 생활과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에 한동안 머물면서 직장인으로 살면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 다니며 살고 싶었던 꿈.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며 호기 부리던 시절. 내 안에 그 꿈들이 미련처럼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퇴사를 결심했다. 그렇게 주말이면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이력서를 썼다. 두세 달이 흘러 마침내 여행 업계로의 이직에 성공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몇 달째 쓰레기장처럼 방치된 집을 보며 일상이 파괴되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곤 한다. 잦은 여행으로 애인과 헤어진 적도 있다. 지인의 경조사조차 참석하지 못할 땐 여행이고 뭐고 이제 정말 나도 일상을 챙겨야겠다 다짐한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여행이 일이 된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직장인처럼 ‘여라밸’이 고민이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이 직업이 된 지금도 여전히 여행 후유증을 앓는다. 다만 하도 자주 겪는 일이다 보니 이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어렴풋이 깨우쳤을 뿐이다.
여행을 여행으로 잊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한때는 당장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하루 종일 최저가 항공권을 서핑하면서 시간을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 방법을 추천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떠나온 곳이 그리울 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정하거나 영상을 만든다. 그러면 다시 그 시간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이제야 알았다. 떠날 용기만큼이나 중요한 건 떠나지 않을 용기다.
글과 사진/ 양주연(여행에미치다 PD)
달라진 건 없으니까
보도부에서 촬영기자로 일하다가 5년 차에 사표를 던졌다. 그 길로 세계여행을 떠났다. 일 년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뭘 봐도 감흥이 없어지는 시기가 온다. 여행도 계속 하다 보면 일상이 된다. 배낭여행자들이 흔히 말하는 여행 권태기다. 이럴 바에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 그렇게 일 년간 36개국을 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 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느낀 감흥은 와이파이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 느린 호흡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한국의 최신 인프라는 너무나 훌륭하고 놀라웠다. 문득 기대감이 차올랐다. 나는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그전과는 다를까?
하지만 그 기대는 익숙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깨져버렸다. 일 년 만에 내 집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왜 아무 느낌이 없지? 일 년 만인데? 이게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웠다. 우리 동네도 그대로, 내 방도 그대로.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오랜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행이 내 삶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애초에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도, 이제부턴 내가 끌리는 일을 하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도 모두 여행 이전의 ‘나’다.
나는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카페를 열었다. 카페엔 내가 찍은 여행 사진들을 걸어두었다. 장기 여행을 계획 중인 분들이 때로 카페에 찾아와 내게 조언을 구한다. 여행으로 무얼 깨달았냐고, 다녀와서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냐고 묻는다. 그럼 나는 그들의 환상을 무참히 깰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가 모두 여행이다. 긴 여행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떠남이 결국 돌아옴이니까.
글과 사진/ 이상혁(카페 허쉬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