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이곳에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이 도시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도시로부터 영감을 얻으면 얻을수록 더 많은 영감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즐거움과 기쁨이 가득한 이 도시의 일부가 되어 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모른다. 그야말로 이곳은 영원한 삶과 구원을 상징하는 도시이다.
11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쿰비아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푸드바이크의 녹슨 철끈에 매달려 있는 막 구운 빵 냄새가 풍기는 아바나 구시가지의 화려한 오비스포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나는 수많은 인파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넓은 마켓 거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가죽이나 수공예, 원단 그리고 다양한 기념품, 나의 고향에서는 볼 수 없을 법한 것들이 그득했다.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또 보았지만, 오래된 책들의 냄새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화폐 박물관 문 앞에 서 있는 한 노신사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1965년에 창간된 쿠바 공산당의 일간지 <그라마(Gramma)>, 폐지처럼 오래된 신문을 팔고 있었다. 나는 쿠바 혁명에 대한 글에 사로잡혀 40분간을 머물렀고, 그에게 신문 2부를 구입했다. 3유로도 되지 않는 특별판은 쿠바의 혁명가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사망 직후인 2016년 11월 27일자 일요신문이었다. 아티스트 아레스(Ares)가 그린 피델 카스트로의 얼굴 일러스트레이션 ‘쿠바는 피델이다(Cuba is Fidel)’가 첫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거리를 좀 더 걸어 내려갔다. 메르카데레스(Mercaredes) 거리 153번지 부근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머물렀던 쿠바에서의 첫 번째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Ambos Mundos Hotel)을 발견했다. 헤밍웨이는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이 호텔의 511번 룸에서 살았다고. 이곳에서 그는 <오후의 죽음>을 완성지었고,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이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집필도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이제 이번 여행 목적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해야겠다.
몇 미터 정도 더 걸으니 오래된 대포와 1백 년 된 무화과나무가 있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을 끝으로 거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스페인 카디스(Cádiz) 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의 뉴욕과 아바나에서의 여정이 스쳤다. 이곳은 뭘까? 스페인인가? 아니면 안달루시아(Andalusia)? 여기는 카디스보다 더 진한 톤의 노란색을 띠고, 세비야(Sevilla)에 적색 물감을 풀어놓은 붉은색을 닮은 듯도 하며, 물고기의 푸른빛이 더해진 초록색 같기도 하다. 아바나는 갈대밭과 마라카스 소리, 신들의 혜성 그리고 마림바가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안달루시아 사람들로부터 보았던 흑인의 리듬과 어떠한 숨김도 없는 눈빛(마치 “우리는 라틴 사람이다.”라고 외치는 듯한)으로부터 아바나는 탄생되었다. 얼마 전 아르마스 광장에서 오래된 작품들의 옛 버전이나 초판 등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전시회가 열린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은 무화과나무와 관광객들, 광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오래된 기관차가 전부였다. 최고의 민트 다이키리는 찾을 수 있었지만. 나는 산타 이사벨 호텔(Hotel Santa Isabel)의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아서 아주 오래된 테이블의 세월이 얼마나 느리게 흘러갔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칵테일 한 잔을 시킬 때,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의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2백 미터 앞에 두 남자가 오래된 책 몇 권을 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바로 바라티요(Baratillo) 거리를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세 면의 벽에 ‘책과 골동품 페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발견했다. 파라다이스였다! 늦은 밤이었지만, 도시의 불빛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다. 오래되고 눅눅한 책들과 가죽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작가들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그 점은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그랬다. 아쉽게도 몇몇 작품들은 이미 팔렸다. 그러다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건 바로 레이날도(Reinaldo)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스페인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의 초판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가격을 물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현금이 없었고, 쿠바에서 신용카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내일 같은 장소에서 기다릴게요.” 그리고는 그 책을 보관하기로 약속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은 지금이 쿠바의 겨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무렵이 되면 많은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들은 지옥 같은 더위를 느낄 거라고. 호텔에서 나와서 최근에 오픈한 이베로스타 그랜드 패커드(Iberostar Grand Packard)로 향했다. 2층에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 아바나가 있기 때문. 여기에서 쿠바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이솔리나 카리요(Isolina Carrillo)가 1945년에 썼던 곡인 ‘두 송이의 치자꽃(Dos Gardenias)’이 처음 소개되었다. 이베로스타 그랜드 패커드는 아바나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 중 하나인 프라도 거리(Paseo del Prado)에 있다. 나는 그곳을 문학작품 덕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발걸음을 축복의 도시 말레콘(El Malecón)으로 옮겼다. 전방에는 마치 카디스의 산타 카탈리나 성(Castillo de Santa Catalina)처럼 생긴 모로 요새공원이 있었다. 좌측에는 8km 길이에 이르는 위엄 있는 말레콘의 자태가 펼쳐졌다. 아빌리오 에스테베스(Abilio Estevez)는 자신의 저서
아바나를 한 번이라도 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하늘에서 내린 도시라 느낄 것이다. 그 생각은 붐비고 복잡한 베다도(Vedado) 지역에 들어선 순간 더욱 확고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나이트 클럽에서부터 알파벳(K, L, M, N, O…)과 숫자로 구성된 거리 이름까지.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아바나 리브레(Habana Libre)는 과거 힐튼 호텔이었다. 이 빌딩을 카스트로가 혁명 시절에 ‘아바나 리브레’로 세례명을 부여했다고. 나는 문득 영화 <딸기와 초콜릿(Fresa y Chocolate)>(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Tomas Gutierrez Alea) 감독과 후안 카를로스 타비오(Juan Carlos Tabio) 감독의 작품, 1993년 작)의 호르세 페루고리아(Jorge Perugorria)와 블라디미르 크루스(Vladimir Cruz)의 독백이 떠올랐다. “나는 이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어. 나는 딸기가 좋아! 음… 딸기가 바로 내가 이 나라를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야.” 피델 카스트로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쿠바를 상징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코펠리아(Coppélia)에 이르게 되었다. 코펠리아는 1966년 소련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우주선 모양의 건축물이다.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셀리아 산체스(Celia Sanchez)는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발레 코펠리아로 아이스크림 가게의 이름을 지었다고. 유리와 시멘트,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쿠바의 취약 계층은 아바나에서 소외됐다. 다이나 차비아노(Daina Chaviano)는 자신의 작품 <남자, 여자, 굶주림(Man, Woman, Hunger)>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이 작은 아바나가 어떻게 기록되나!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우아한가! 호화스러운 건물이 있고, 동쪽에는 물이 새는 판자촌이 있다. 그 옆에는 수백 그루의 삼나무와 마메이나무, 케이폭나무, 망고나무, 코코넛나무, 마호가니나무, 많은 과일 나무로 둘러싸인 베다도 산과 끝이 없이 펼쳐진 아몬드 밭이 있다….”
이제 식사 시간이다. 그리고 쿠바 작가 세넬 파스(Senel Paz)의 시대 이야기로 돌아올 시간이다. 그는 <늑대, 숲 그리고 새로운 인간(El lobo, El Bosque y El Hombre Nuevo)>으로 후안 룰포(Juan Rulfo) 문학상을 받았고, 그에 힘입어 <딸기와 초콜릿>을 집필했다. 이제 무대는 베다도에서 반쯤 폐허가 된 식민지 시절의 위대한 건축들이 즐비한 미라마르(Miramar)로 옮겨졌다. 헤르바시오(Gervasio)와 에스코바르(Escobar) 사이의 콘코르디아 418(Concordia 418)에 위치한 라 과리다(La Guarida)에 방문하기를 권한다. 현재는 맛집으로 유명세를 탄 라 과리다에서 <딸기와 초콜릿>의 친밀한 기억과 향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호세 마르티(Jose Marti)부터 호세 레자마 리마(Jose Lezama Lima)까지, 오순(Oshun)부터 카리다드 델 코브레(Caridad del Cobre)까지, 쿠바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확고하게 다지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코코택시를 타고 아바나 동쪽으로부터 1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San Francisco de Paula) 마을에 있는 핀카 비히아(Finca Vigia)를 방문했다. 바로 헤밍웨이가 살았던 곳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헤밍웨이의 집은 술과 마약, 성욕에 빠져 결국에 자살에 이르렀던 사람의 집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듯한 모습이었다.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집에서, 그는 집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수평선을 감상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헤밍웨이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 코히마르(Cojimar). 바다와 물고기 내음이 물씬 풍기는 어부들의 마을이다. 코히마르의 라 테라사(La Terraza), 바로 그곳에서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썼다. 라 테라사를 매일같이 찾는다는 작고 단단한 체형의 라울(Raul)이 나에게 빛의 맛이 나는 강렬한 블루 컬러의 다이키리를 권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헤밍웨이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때, 오후 6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축복받은 책을 사기 위해서 다시 아바나로 돌아와야만 했다.
<한 소설가의 세계 여행(A Novelist’s Tour of World)>의 작가 블라스코 이바녜스(Blasco Ibanez)는 책에서 아바나를 이렇게 묘사한다. “쿠바의 수도에 별명을 지어야만 한다면, 그곳을 기쁨이라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완벽하게 말이다. 아바나의 기쁨은 그곳의 사람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아바나의 구시가지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에서는 절망과 배고픔, 내일에 대한 자포자기, 상실감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배는 꼬르륵거리면서 도움을 구하고 있지만,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소금과 삶 그리고 빛이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빛이 존재했다. 마치 하늘을 비추는 빛처럼. 아마도 이 세상 어디에도 아바나보다 아름다운 석양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스 세르누다(Luis Cernuda)는 아바나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바나는 천국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하늘과도 다르고, 다른 도시를 떠돌아다니는 영혼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아바나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름다운 하늘과 공기 따위로 정의할 수는 없다. 환상은 어떨까?”
나는 바라티요 거리로 달려왔다. 쿠바 돈을 챙겨서. 하지만, 나는 두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책 가판대의 위치가 전날과 모두 달라졌다. 물론 상인들도 모두 달라졌다. 아, 이런! 그들 모두 나에게 어떤 책을 찾고 있는지 묻는다. 나는 어제 어떤 상인이 스페인어로 쓰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의 초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유감이지만, 우리는 하루 일하면 그 다음날에는 일하지 않아요. 오늘 여기서 책을 파는 사람들은 어제는 없었던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훌륭한 것들이 많아요. ‘밀레’, 파두라(Padura), 카브레라 인판테(Cabrera Infante), 발데스(Valdes)….” 다음 날은 올 수 없기 때문에 하나하나 찾을 수밖에 없었다. 4만 권이 넘는 책들 사이에서 내가 원하는 그 책을 찾으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불가능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포기하고 반쯤 부서진 문을 통해 나가려던 찰나에 누군가 나의 어깨를 쳤다. “‘Acere que bola.(쿠바에서만 사용되는 슬랭으로, ‘what’s up’의 의미.) 당신이 사람을 찾는다고 들었어요. 내 이름은 어니스트, 당신이 우상으로 여기는 작가랑 똑같죠.” 아,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