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 영화제에 <기생충>만 있었던 건 아니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단편 <령희>가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된 일 또한 괄목할 사건이다. <령희>는 연제광 감독이 읽은 기사 한 줄에서 시작됐다. “불법체류자가 단속을 피하려다 사망한 사건이 있었고 그게 자살로 처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외갓집이 있는 충북 괴산인데 한 번씩 갈 때마다 외국인 노동자가 점점 늘어나는 게 보이더라. 한국의 어느 시골에 사는 외국인 노동자의 이미지와 그 기사가 합쳐져서 <령희>가 나오게 됐다.”
영화의 제목이자 극중 불법체류자 캐릭터의 이름인 령희는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다. 영화는 령희의 룸메이트인 홍매(한지원)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단속반에 쫓기다 사망한 령희를 두고 회사는 추모는커녕 뒷수습 하느라 정신이 없다. 결국 홍매는 령희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회사가 숨긴 령희의 시신을 찾는다. 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종일관 절제되어 있다. 홍매를 연기한 한지원의 연기가 특히 그렇다. “처음엔 배우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오늘 아침까지 같이 밥 먹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집에 돌아와서 엉엉 울수 있을까? 오히려 멍하고 실감나지 않을 것 같았다. 칸에서 같은 부문에 초청받은 단편들을 봤다. 다들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더라. 스타일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걸 좋아하잖아. 오열하고, 소리 지르고, 때려부수고. 개인적으로 그런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중에 장편상업영화를 하더라도 이 스타일을 지키고 싶다. 폭발하더라도 이유 있는 폭발을 그리고 싶다.”
사회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이를테면 이 영화엔 핸드 헬드나 클로즈업 대신 롱테이크 풀샷이 주로 쓰였다. “카메라가 계속 움직이면서 프레이밍하는 것보단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게 그나마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했다. 령희가 떨어지는 장면이나 피 흘리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불법체류자와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전면에 다룬 이 단편을 보고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 <약속>이 떠오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지난 단편 <표류> 때부터 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자란 내게 다르덴 영화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이었던 것 같다. 똑같이 따라가기보다는 나도 다르덴처럼 나만의 스타일을 잘 구현하고 싶다. 앞으로도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만 찍겠단 건 아니다. 하지만 ‘관객이 얼마만큼 드는 영화를 만들겠습니다’ 이런 걸 목표로 삼진 않을 거다. 그러면 내가 망가질 것 같다. 교수님이 ‘칸 병’ 조심하라고 하시더라. 잘못 걸리면 10년은 휙 간다고.(웃음)”
칸 영화제 초청은 그 자체로 젊은 감독에게 자극이 되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마지막 날 칸의 수석 프로그래머가 나를 안아주면서 그러더라고. 다음 영화는 준비하고 있느냐고. 나중에 장편으로 다시 칸에서 만나자고. 아, 이렇게 키우는구나 싶더라.”
지금 그는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20대 청년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처음 도전하는 장편영화이고, 좀 더 자신의 내밀한 경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