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산다는 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Lifestyle

대충 산다는 건

어느 날부터인가 고양이처럼 살기로 했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른한 삶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그건 삶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BAZAAR BY BAZAAR 2019.06.01

ABOUT

NOTHING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쇼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에 관한 것이다. 괜한 과장이 아니다. 1989년에 만들어진 미국 시트콤 <사인필드>는 특별히 어떤 것에 관한 게 아니라는 개념으로 제작된 TV 쇼였다. 감독 래리 데이비드가 각본을 쓰는 데 있어서 지켰던 규칙은 단 하나다. “배우지 말고 껴안지 말자(No Learning, No Hugging).” 그 쇼에서 인물들은 삶의 대부분을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보낸다. 9년이라는 긴 방영 기간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그 누구도 성장하지 않으며, 어떤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이 쇼는 9년 전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면서 끝난 것으로도 유명한데, 마지막 신은 한 인물의 셔츠에 달린 쓸모없는 단추에 대한 쓸데없는 대화였다. 이제는 <사인필드>를 모르고 자란 세대와 함께 맥주를 마시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쇼라서, 나는 <사인필드>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그 세대들에게 쇼를 요약해주는 입장이 되었다. 그때마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설명이라는 건 알고 있다. 말하는 나조차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할 정도니까 말이다.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특히 사회적으로는 납득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주말에 뭐 했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외롭거나 할 일 없어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어왔을 때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사실은 멍 때리고 있었는데 고민 있는 것처럼 오해받기 십상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부재한다는 것에 대한, 부족하다는 것에 대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대충 산다는 것에 대한, 내버려둔다는 데 것에 대한, 시간과 공간에 빚을 진다는 것에 대한 공포.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살아간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에겐 개인의 목적이나 길을 가질 선택권이 없었다. 우주가 신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신의 뜻이고 신의 탓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고? 오 신이시여. 사다리에서 떨어졌다고? 오 신이시여. 그리고 헤겔과 하이데거, 그에 영향을 받은 사르트르가 등장해 무신론적 실존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개념에 의해서도 사전에 규정될 수 없는 실존하는 존재가 있으며,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유이고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믿었던 그 철학자들에게 2019년 지금의 상황을 말해준다면 뭐라고 할까? 그 거창한 철학 위에서 우리가 선택한(혹은 선택하고 싶은) 자유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익숙해지는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말이다.

그로부터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여전히 새롭다. 그리고 다른 모든 새로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하려고 애쓰는 척이라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겐 크리스마스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친구가 모여 있는 왓츠앱 단체 메시지 창이 있다. 3월이 되자 우리는 한번쯤은 모여야 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몇몇 친구들이 굉장히 바빴다. 3월은 시간을 맞추기가 영 쉽지 않았다. 3월 한 달 내내, 7백44시간 중 단 한순간도 불가능했다. 결국 우리는 4월 말의 어느 날쯤 보기로 했는데, 글쎄, 그때쯤이면 우리 대부분은 다른 계획을 세웠을 테고, 약속을 잊어버릴 거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만나려고 했다면 이미 만났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당장 만날 정도로 충분히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그냥 귀찮았을 수도, 정말 7백44시간 내내 스케줄이 안 맞았을 수도, 몇몇 친구들의 재정 상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한 우리는 만나려는 노력 비슷한 걸 했고 그 누구도 민망하지 않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런 게 원래 그룹 메시지의 쓰임새다.

현재 명상이 뜨겁게 유행하고 있는 것만 봐도 우리가 ‘무(無)’의 상태를 얼마나 열망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명상의 궁극적인 요점이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거나 물건을 없애려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솔직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덜어내고 싶어한다. 생각과 부담. 끝없이 계속되는 뉴스. 일어나고 있거나, 이미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 샀거나, 했거나, 소유했던 것.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의 무게, 그 무언가의 횡포. 누군가에게는 효과가 있었을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내가 진정 아무것도 아닌 상태의 진정한 미덕을 깨닫는 순간은 명상을 할 때가 아니라 가만히 고양이를 지켜보고 있을 때다.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 요상한 생명체를 부러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는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다. 고양이는 살갑지 않지만, 그 사실이 그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질투하는 것은 게으름 그 자체가 아니다. 고양이의 삶이 가진 단순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렇다. ‘대충’과 ‘그냥’ 사이 어느 지점의 나른한 태도는 삶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고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일들에 “젠장, 알 게 뭐야(Fuck It)”라고 대응하기로 했다. 아니,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아버지가 영국 신문 <선데이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 1위인 <모든 것에 신경 쓰지 않는 교묘한 기술(The Subtle Art of Not Giving a Fuck)> 책 표지를 왓츠앱으로 보내왔다.(이 자체로 이미 대단한 성취다. 아버지에게는 인간을 달에 보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잔뜩 화가 있었는데, 이유인즉, 자신의 유일한 좌우명이 어떤 기회주의적인 영국 사기꾼에 의해 표절되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젠장, 알 게 뭐야(Fuck It)”라는 그 구절은, 우리의 오랜 가훈이었다. 나는 지독하게 감성적이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혹은 ‘나의 유일한 한계는 별들뿐이었다’ 같은 계몽적이고 아름다운 주제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종류의 고민에 대해서는 단박에 내 식대로 의견을 제시해줄 수 있다. 그 차를 살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면? 알 게 뭐냐, 어떻게든 여유가 생길 거다. 이 사람과 데이트를 해야만 할까? 알 게 뭐야, 일단 하고 보자. 나도 잘 알고 있다, “젠장, 알게 뭐야”라니, 전혀 우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꽤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 금붙이는 아니지만 그게 우리 가족의 유산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갖고,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가 되는 것이 유일하게 받아들일 만한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알 게 뭐냐” 혹은 “될 대로 되라”는 우리 세대가 용기 내서 말할 수 있는 반항적인 신조다. 그리고 이 비관적인 말은 역설적으로, 현재 우리의 상태를 수긍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 개선될 여지가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더 이상 억지로 노력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일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지 않다…. 결국 “될 대로 되라”는 내가 절대 갖지 않을 아이들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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