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오랜만이야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Lifestyle

김현철, 오랜만이야

말이 무색하게 김현철은 그때도 지금도 있다.

BAZAAR BY BAZAAR 2019.05.30

꽤 근사한 오디오데크가 있었던 누나의 방에서 우리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등학생 누나와 중학생인 내가 가만히 앉아 대화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왜인지 그날 우리는 음악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막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때여서일지도, 며칠 전에 듀스가 신곡을 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라디오에서 주워들은 노래에 관해 얘기를 하며 팝음악이 가요에 비해 얼마나 수준이 높은지에 대해 건방을 떨고 있었다. 누나는 주로 잠자코 듣고 있는 편이었다. 들을 만한 가요가 별로 없다는 소리까지 이어졌을 때, 누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CD인지 테이프인지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한번 들어봐, 신동이래.

2번 트랙. 스산한 신시사이저 소리가 차가운 전자 드럼과 함께 흘러나왔다. 어라. 소리 내 말하진 않았다. 신동이라는 말에 생긴 질투 어린 마음도 금세 수그러들었다.

“하늘은 문득, 하늘은 문득 주저앉았네. 학교 앞길은 학교 앞길은 비에 젖었네.”

무슨 가사가 이래, 라고 투덜거렸지만, 새 오디오데크처럼 깨끗하고 쨍한 소리에 이미 마음을 뺏긴 상태였다. 두근거렸지만 이유 모를 분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리버브가 잔뜩 걸려 멀리 퍼져나가는 목소리가 창밖으로 지던 노을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에게 김현철의 음악은 전부 그날 그 노을빛이다. 방심하고 있다 보면 어느새 조바꿈 되며 다른 파트로 넘어갔다. 능청스럽지만 세련된 멜로디의 코러스. 다시 조가 뒤바뀌고 불길한 분위기의 간주를 거치며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긴장시키더니 이내 안심하라는 듯 코러스로 돌아온다.

“그런대로 살아가고 그런대로~”

나는 방에 홀로 남아 같은 트랙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그리고 그 곡을 따라 만들어보겠다고 끙끙거리며 몇 날 밤을 보냈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중학생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김현철 2집 <32℃ 여름>에 수록된 ‘그런대로’를 들을 때마다 누나와 앉아 노래를 듣던 그 오후의 풍경과 공기의 냄새를, 음악이 주었던 그 기분 좋은 충격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 날짜 모를 그날, 나는 분명히 음악을 훨씬 더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해외 진출을 하거나 새 앨범마다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던 시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묵묵히 강원도와 서울에 대한 소소한 사랑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대부분의 음반을 국내 뮤지션, 엔지니어들과 함께 만들었지만, 당대 어떤 음반 못지않은 편곡과 소리를 담아냈던 것은 돌이켜봐도 감탄스럽다. 그의 음악을 찾아 듣던 청소년에게도 그에게도 똑같이 20년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다. 쉰이 된 한때의 신동은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지. 쉬면서 얼마나 많은 곡들을 아껴뒀을지. 여전히 브라스를 많이 사용했을지. 어떤 엔지니어와 함께 작업했을지. 긴 세월 속에서 그 빛나던 재능을 지켜냈을지. 테이프를 사자마자 속지 크레디트를 뒤져보던 중학생처럼 설레며 음반 발매를 기다리고 있다. 분명 좋은 곡들이 담겨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또 새로운 중학생이 그 곡들을 듣고 밤을 새우며 뮤지션의 꿈을 키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음악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거기엔 언제나 동경할 구석이 남아 있다.

글/ 조월 (뮤지션, 모임 별)


92년생인 회사 후배의 파티션에 붙어 있는 커트 코베인의 사진을 보고 신기해서 고조선 사람처럼 말해버린 기억이 난다. 너네도 너바나를 듣니? 듣느냐는 질문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 사진은 음악만이 아니라 스타일이나 삶까지 포함해 아이콘으로서의 그를 좋아한다는 취향의 표식 같았으니까. 요즘 그들이 태어났을 무렵의 김현철 음악을 듣고 이야기하는 90년대생들을 볼 때도 불쑥 옛날 사람의 자아가 튀어나온다. 김현철 1집이 나왔던 1989년에 나는 부산에 사는 중학생이었다. 음악과 그 음악을 들었던 시기가 강하게 결부되던 시절이었다. 한 해 한 해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경험들로 채워지고, 무엇에든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던 10대 때였다. 모바일폰과 5G 인터넷이 없던 시절, 지방도시에서 중학생이 음악을 듣는 행위는 전 지구적으로 동시 릴리스되는 스트리밍 시대의 편리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멋진 것들은 저 멀리에서 천천히 도달한 다음 소문처럼 번져나갔다.

김현철의 초기 음악이 다시 주목받는 건 시티팝 유행의 맥락일 것이다. 1970~80년대 경제 호황기 일본의 도회적 세련미를 담은 그 장르의 DNA가 분명 김현철의 음악 속에도 흘렀다. 반의 누군가는 신해철을, 누군가는 이승환을 좋아할 때 김현철의 팬인 아이는 없었다. 아마 퍼포먼스나 캐릭터보다는 작곡과 편곡이 김현철 음악의 매력을 만들었으며, 그의 위상 역시 무대 위 스타보다는 스튜디오의 아티스트에 가까웠기 때문일 거다. 콧소리가 많이 섞이고 어딘가 눌린 생목소리를 정교하게 컨트롤하기보다 기분껏 지르는 김현철의 노래 스타일은 ‘오랜만에’를 리메이크한 죠지의 정확하고 부드러운 보컬과 비교하면 이래도 되나 싶게 나이브하다. 하지만 겨우 스무 살에 모든 곡을 스스로 작사작곡한 데뷔 앨범의 완성도를 생각해보면 보컬쯤은 사소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그의 음악 속에 펼쳐지는 장면은 서울 아주 특정한 지역의 풍경 같았다. 비슷한 포지션에 있던 윤상의 음악이 보여주는 세계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어딘가를 향한 노스탤지어였다면, 김현철의 세계는 드라마 속 세련된 서울에 대한 동경에 가까웠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1집 B면 첫 곡 ‘동네’를 워크맨으로 플레이할 때면 전주의 리듬과 함께 가슴 벅찬 공간감이 나를 에워쌌다. ‘나의 동네에 올해 들어 처음 내린 비’를 노래할 때 그려지는 것은 오렌지족의 유흥가로서의 압구정동보다는 강남 토박이들의 아파트 단지 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곡마다 적절하게 들어가 있는 스무드 재즈적 요소, 관악 편곡 같은 것이 도회적인 쿨함의 인상을 더했던 것 같다. 시티팝이라는 장르에서 표상하는 어떤 ‘도시’처럼.

고등학교 1학년 때 김현철 2집 <32℃ 여름>이 나왔다. 1992년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때다. 환상 속의 그대에게 정신 차리라고 외치던 센세이션이 몰아쳤다. 그런데 같은 시기 김현철이 내놓은 건 ‘까만 치마를 입고’였다. 전주 코러스의 섬세한 화성, “항상 이 거릴 혼자 스쳐 지나간 것일까” 할 때의 그 미묘하고 예쁜 멜로디 진행을 들을 때 노래를 이렇게 만드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서태지의 변혁적 에너지와 대척점에 있지만, 클래식한 낭만으로 다른 방식의 충격을 줬다. 마치 유재하가 그랬던 것같이.

‘달의 몰락’ 이후로 가면서 김현철 초기 앨범의 비범한 놀라움은 사라지고 다른 가요와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새로 낸다는 앨범이 어떻든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음악은 한 시기에 이미 몫을 다 하고, 그걸로 영원히 충분하다.

글/ 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저자)


지난 2월 말, 홍대의 한 클럽에서 열린 김현철의 공연을 봤다. 진작부터 도착해 가져간 레코드에 사인을 받으려고 두리번거렸는데, 그는 공연장에서 주최자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대신 다른 공간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제시간에 맞춰 김현철이 등장했다. “연예인이다!” 공연장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농담을 했다. 너도 김현철을 좋아하냐고 묻진 않았다. ‘나만 아는 밴드’ 같은 거 말고 연예인이니까.

연예인이라는 말. ‘친근한 이웃집 아무개’ 같은 거 말고 연예인, 스타. 종종 그 말은 곧 자존심이란 말과도 비슷한 게 아닐까 늘 생각해왔다. 땅끝까지 내려올 바에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 마는. 물론 김현철의 경력 모두를 그 관점에서 바라볼 수는 없다. 분명 그는 타협하기도 했(던 것 같)고, 때로 의아한 결과물을 내놓은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그만둬버렸다. 그의 마지막 정규 음반, 9집은 2006년에 나왔다.

김현철은 천재야, 라는 익숙한 말. 김동률과 유희열을 위시한 이른바 ‘고급 가요’를 소비하던 어떤 팬덤에서도 김현철은 늘 그 꼭대기에 있었다. 적어도 첫 번째 음반은 그랬다. 시티팝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더는 낯선 말이 아닌 게 됐을 때,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그의 1집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국의 시티팝이라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지만, 그가 서울 도시 문화의 호황기에 도시의 정서를 노래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걸 동시대 일군의 뮤지션 중에 제일 잘했다.

MR이 흐르고 김현철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엔 밴드 세트가 아니라 아쉬웠지만, 이내 그 혼자 우뚝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더 김현철답다 생각했다. 그런데 김현철이 이렇게 노래를 잘했었나? 그는 떼창을 가뿐히 이겨내는 번듯한 목청의 소유자였다. 그간 칼을 갈았든, 타고난 것이든 그는 조금 나이를 먹었을 뿐 버거워하지 않았다. 십수년 만의 공연이라 했다. 별로 재미없는 농담에도 객석은 자지러졌다. 멘트를 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엔 얕은 흥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긴장에서 비롯되는 흥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보다는 낯섦이란 말이 더 어울렸다. 김현철 스스로도, 객석의 관객들도 서로가 익숙하지 않았다. 유튜브와 SNS를 달구는 다케우치 마리야나 기쿠치 모모코의 라이브 영상보다 김현철의 이 공연이 더 새롭게 들렸다.

그는 짧은 세트리스트 중 1집 수록곡인 ‘동네’ ‘춘천 가는 기차’ 그리고 ‘오랜만에’를 모두 불렀다. 그의 가장 뛰어난 노래인 동시에, 아마도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었을 그의 노래. 녹슨 히트곡의 추억이 아닌 지금의 관점에서 대할 수 있는 어떤 음반의 바로 그 노래. 분명 힘껏 쏟아낸 공연이 끝나고 그는 여흥을 즐기는 대신 곧장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뒷문 출구를 아는 친구의 도움으로 맹렬히 뛰어나가 몇 장의 레코드를 내밀었다. 뒤로 긴 줄이 늘어섰다. 곧 김현철의 새 음반이 나온다. 오랜만에.

글/ 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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