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XT PHILO
지난 2월 22일, 전 세계 수많은 파일로필스(Philophiles, 피비 파일로의 추종자들을 이르는 말)의 눈과 귀는 밀라노를 향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2019 F/W 밀라노 패션위크의 보테가 베네타 쇼를 향한 것이다. 작년 6월, 토마스 마이어의 바통을 이어받을 보테가 베네타의 수장으로 서른둘의 젊은 디자이너 다니엘 리가 호명되었고, 우리는 그의 프로필에서 꽤나 매력적인 이력 한 줄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2012년부터 7년간 피비 파일로의 셀린에서 근무했다는 것!(그 외 경력으론 마르지엘라, 발렌시아가, 도나 카란이 있다.) 몇 달 후 다니엘 리가 발표한 2019 프리폴 컬렉션과 캠페인은 파일로필스를 만족시킬 요소로 가득했다. 니트 소재 슬리브리스 톱과 새틴 스커트의 조합, 베이지 컬러의 오버코트, 커다란 가방과 심플한 뮬 등,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올드 셀린’ 그 자체였으니. 더불어 가죽에 대한 장인정신을 토대로 세워진 이탈리아 하우스의 DNA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저는 정말 옷을 좋아해요. 그리고 우린 우아함과 정교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죠.” 다니엘 리는 자신에게 쏟아진 걱정과 불안을 불식시키고 2019 F/W 컬렉션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패션 매체들은 앞다퉈 스타 디자이너의 탄생을 예고하며 “피비 파일로의 팬들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 덧붙였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기대 속에 베일을 벗은 다니엘 리의 첫 정규 컬렉션.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테가 베네타는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통해 보다 관능적이고 실용적인 브랜드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피비의 추종자들이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셀린의 자취를 찾기는 건 어려웠지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신예 디자이너의 실험정신(퀼팅 소재 스커트와 갑옷 같은 아우터)과 빛나는 비전(다채롭게 재해석된 인트레치아토 모티프)으로 반짝거렸다. 피날레에 등장한 다니엘 리에게 쏟아진 박수갈채. 그 소리만으로도 파일로필스건 아니건, 더욱 많은 이들이 그의 다음 컬렉션을 기다리게 될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밀라노 패션위크에 이어 시작된 파리 패션위크에도 또 한 명의 셀린 출신이 새로운 비상을 알렸다. 주인공은 황록. 2017년 한국인 최초로 LVMH 프라이즈 파이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특별상까지 거머쥔 록(Rokh)이 첫 번째 런웨이 쇼를 진행한 것이다.(무려 파리 패션위크의 오프닝 쇼!) 작년 9월, <바자> 코리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구상 단계인 첫 번째 쇼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계획이 현실로 이뤄진 셈이다. 황록은 피비 파일로가 2008년 셀린에서 팀을 꾸리기 시작했을 때 입사해 3년간 동고동락했다. “셀린에서 굉장히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았죠. 작은 것 하나까지 완벽해야 했거든요. 그렇다고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에요. 혼자 깨달아야 해요. 컬렉션 하나를 위해 팀 전체가 함께 달려가는 공동체 의식을 배웠죠.” 셀린을 비롯해 루이 비통, 클로에에서 경력을 쌓고 LVMH 상을 거머쥔, 주목받는 신예의 쇼는 데뷔 쇼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10대의 악몽’을 주제로 재기발랄한 컬렉션을 완성한 그는 쇼가 끝난 뒤 한 인터뷰를 통해 지극히 피비의 후예다운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모두가 세련된 여성들을 위해 디자인하고 있지만 세상에 그런 여성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요.”
에르메스의 나데주 바니 시뷸스키가 셀린 출신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유명인이라면, 이제 막 세상에 얼굴을 알린, 파릇파릇한 뉴 페이스들도 존재한다. 지난 <바자> 3월호 칼럼 ‘Names to Know’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신진 디자이너 피터 두와 2018 S/S 컬렉션으로 데뷔한 콰이단 에디션즈의 부부 디자이너 라 헝 & 레아 디클리는 최근 ‘넥스트 파일로(Next Philo)’로 주목을 받은 인물들. 뉴욕 FIT를 나온 피터 두는 2014년 졸업생을 위한 LVMH 상을 수상했는데, 상금과 함께 2년간 셀린에서 일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고 이를 계기로 피비 파일로 밑에서 경력을 쌓게 된 케이스다.(이후 뉴욕으로 돌아와 데렉 램에서도 일했다.) “제가 말하는 여성은 전형적인 패션 추종자가 아니에요. 셀린에서 진짜 여성을 위한 옷을 만드는 법을 배웠죠.” 뉴욕을 베이스로,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은 실루엣에 지극히 미니멀하고 모던한 디자인, 여기에 기발한 디자인의 주얼리로 구성된 피터 두의 컬렉션은 보다 차갑고 미래지향적인 셀린을 떠올리게 한다. 2018년 1월에 시작된 그의 레이블은 벌써 네타포르테, 긴자의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비롯해 런던과 뉴욕의 편집숍들, 국내에서는 레어 마켓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개인 인스타그램 팔로어도 현재 6만 명이 넘어선 상태. 한편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브랜드 콰이단 에디션즈의 이름은 1965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콰이단(怪談, 괴담)>에서 유래한 것이다. 남편인 라 헝은 미국인으로 릭 오웬스와 알렉산더 맥퀸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 아내인 레아 디클리는 프랑스인이며 셀린, 발렌시아가에서 여성복 디자이너로 일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의 컬렉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의 프로필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는 사실. 왜냐하면 피비 특유의 군더더기 없고 때로는 과장된 실루엣에 릭 오웬스, 맥퀸에서 시도할 법한 대담한 콘셉트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얼마 전 2019 F/W 런던 패션위크를 통해 첫 번째 런웨이 쇼를 성공리에 마쳤다.
2018년 프리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10년간 몸담은 셀린과 작별을 고한 피비 파일로. 그녀가 떠난 지 벌써 1년여가 흘렀다. 지금의 셀린은 에디 슬리먼의 셀린(Celine)과 피비의 올드 셀린(Old Céline)’, 이 두 가지로 나뉘어 불린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셀린은 에디 슬리먼을 영입하면서 라인을 남성복까지 확장하고 앞으로 5년 이내 매출을 두 배로 늘리는 게 목표임을 공표했다. 물론 에디는 이미 생 로랑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바 있다. 이와는 별개로 2019 F/W 패션위크 기간 4대 도시의 셀린 부티크에는 올드 셀린(아마도 마지막이 될)을 쟁취하려는 사람들로 내내 북적였다. 확연히 달라진 하우스의 분위기에 등을 돌린 파일로필스들을 영입하기 위한 경쟁은 이미 시작됐고, 패션지에도 ‘넥스트 파일로’를 예견하는 칼럼들이 등장했다. “셀린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컬렉션에서 피비의 향기가 느껴진다”는 멘트가 덧붙은 카르멘 리베라(Carmen Rivera)의 레이블, 유소니아(Usonia)의 기사에는 절로 눈길이 갔다. 슬프고도 명확한 사실은 ‘피비 파일로의 시장’은 한 사람, 하나의 브랜드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2019년 현 패션계에 존재감을 드러낸 피비의 후예들의 활약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에디터/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