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 작가의 국제갤러리 개인전 오프닝 현장. 한국미술사 면면을 새로 쓴 걸출한 인물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이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1949년생인 민정기야말로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독창적인 산수 풍경으로(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현대미술의 지평을 확장한 중요한 작가이며, 그런 그가 수십 년 만에 갤러리 전시로 오늘날의 관객을 가까이 만나는 귀한 기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 평화의집에 걸려 남북한 정상과 함께 전 세계 전파를 탄 500호 대작 ‘북한산’(2007)은 우리에게 민정기라는 불세출의 화가가 존재함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살아 꿈틀거리는 기운찬 산세, 이를 떠받치는 단단한 지세, 곳곳에 숨은 사모바위, 삼천사 마애불 등 북한산을 구성하는 성물들의 존재는 물론 답사부터 작업까지 꼬박 일 년을 공들였다는 사실까지, 서구의 기법과 재료로 표현된 한국적인 풍경화 ‘북한산’은 민정기의 낙관 같은 작품이나 다름없다.
역설적으로 이번 개인전은 ‘북한산’이 없다는 사실 덕분에 더한 의미를 얻는다. 전시 부제를 멋대로 달아보자면 ‘내 마음의 수선전도(首善全圖)’ 정도 될 것이다. 수선전도란 서울의 지도를 일컫지만, 서울이 전부는 아니다. 양평 수입리도, 가평 묵안리 장수대도, 단양의 마을도 그렸다. 그러나 이번 전시작들은 양평으로 이주한 1987년 즈음부터 산세와 물세에 깃든 역사에 몰두하던 그가 색감과 구성의 변화를 동력 삼아 다시 도심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행보는, 예컨대 1980년 초 고가 아래 꽉 막힌 도로 풍경을 차 안에서의 시점으로 그린 전작을 연상시키며 수미상관을 이룬다. 다만 젊은 민정기의 눈에 든 서울 풍경이 자의적, 직설적인 기호의 조합이었다면, 칠순의 민정기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 이룬, 지극한 필연의 서울 풍경을 담는다.
이를테면 그는 겸재 정선이 그린 ‘청풍계’의 실제 장소인 청운동 52번지를 여러 번 답사한 후 그 시절 겸재가 보았을 산세와 지금의 유진인력개발원 건물 혹은 양옥집 등 현실과 가상이 어우러진 풍경을 그렸다(‘백세청풍’, 2019). 인왕산 아래 있던 친일인사 윤덕영의 아방궁 ‘벽수산장’은 이미 불타 없어진 지 오래지만 작가는 화가의 권한으로 복원시켰다(‘청풍계’, 2019). 인왕산, 북한산, 백악산이 한눈에 보이는,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 아래의 서울을 6개의 화폭에 펼쳐놓았는데, 천상계와 인간계가 공존하는 듯 신비롭다(‘인왕산’, 2019). 안견의 ‘몽유도원도’ 이미지 위에 현재의 부암동 풍경을 포개어놓기도 했다(‘유 몽유도원’, 2016). ‘인왕산, 보현봉, 백악산이 보이는 풍경’(2019)을 설명할 땐, 공사 덕분에 서울의 명산들을 함께 보는 행운을 만날 수 있었다며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을 차용하기도 했는데, 바가지 머리의 구보가 앉아 있는 이발소 내부 모습은 그대로이되, 창밖으로 한때 삶의 터전이었던 청계천, 천막으로 가린 청계천, 올덴버그의 스프링 작품이 우뚝 선 청계천 등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의미였던 세 개의 청계천 풍경이 나란하다.
민정기의 작품이 ‘비가시적 자연이 인간적으로 가시화된 문화적 영역’인 풍경화의 전형을 넘어 고유할 수 있는 이유는 보이는 것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보고, 거닐고, 인식하고, 경험하고, 사유하는 방식으로 그린다. 어떤 풍경이든 일일이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 까닭도 경관에서 느낀 이미지, 생각, 상상 등을 종합해 꼼꼼하게 작업하기 위해서다. 민정기의 풍경이 ‘인문학적’ ‘인류학적’이라 평가받는 건 그가 사료와 자료를 탐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자연과 사람, 풍경과 풍속, 사회와 생활, 역사와 지리 등을 콜라주하고 풍성한 시선으로 껴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은 그림 안에만 머물지 않고, 서울 전체로, 이 땅으로, 그리하여 보는 이의 일상으로 뻗어 나가 공명한다. 이는 산수 풍경을 대하는 흥미로운 현대적 방식이라 할 만하다.
예술적 공명의 진원지, 민정기 작가의 작업실은 경기도 양평에 위치해 있다. 이 곳으로 이사 온 지는 채 2년도 되지 않았다. 족히 5미터는 되어 보이는 천장, 동서남북으로 난 창을 통한 은은한 자연광이 인상적이다. 덕분에 그는 자연의 순리대로 사는 농부인 양, 해가 뜨면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지면 마무리한다. 이젤, 의자, 물감 선반, 테이블, 책장 등 작업실 안에 있는 모든 기구에 바퀴를 단 것도 화가의 연륜과 경험을 반영한 장치다. 물감이 잔뜩 묻은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나가는 버릇 때문에 새로 마련했다는 길고 넉넉한 앞치마는 실로 ‘멋쟁이 작업복’이다. 현재 진행 중인 작업들이 조심스레 놓인 작업실을 서성이다 보니, 오랜 세월 민정기의 작품과 인생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평한 미술평론가 고(故) 최민 선생의 글이 떠올랐다.
“보는 것과 그리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한데 어울려 하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때는 보는 것이 우선이고 어떤 때는 생각이 앞선다. 어떤 때는 그리는 게 전부다. 이제 보여주는 일이 추가된다. 화가의 삶에 있어 진정한 우여곡절은 바로 이 네 가지 일이 서로 얽히고 벌어지고 부딪치는 데서 비롯한다.” 보통의 풍경화가 담지 못하는 걸 담느라 평생 예술적 우여곡절을 겪은 노화가는 많이 외로웠을 텐데도 여전히 맑은 얼굴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런 거죠.” 한다. “모든 건 화가 마음”이라는 말 끝에 웃기도 한다. 그러나 본인이 인정했듯, 화가라는 인류의 욕망은 늘 상상을 뛰어넘는다. 놀라울 정도로 순진무구한 욕망, 아니 순정은 작업실 한편에 낙서처럼 쓰인, 반듯하고 모던한 서체의 메모에서도 드러난다.
‘Realism과 시각적 장치, 자료는 시공간을 극복한다/ 컵에 든 먹물 그리기/ 실제 보이는 경치를 필히 그릴 필요는 없다. –홍제동 옛길에서/ 투명한 먹과 cobalt violet/ 색채가 공간을 만든다/ 사진을 보고 그릴 수 있는 것들의 밀도를 높여 놓다/ 어떤 사진을 선택할지./ <사랑>/ 집 : (에서) 옥천암을 보다/ 산경문(주: 산과 나무를 형상화한 장식)/ 색채로 주제를 확장, 시도할 수 있을까./ 인왕산/ 한계, 상상/ 색채를 자유롭게 쓰려면 어떤 方法?/ 그리고 보라’
이 단어 혹은 문장들은 민정기의 사유와 질문의 정수다. 그의 현재적 상태에 대한 단서들은 어쩐지 젊은 작가들의 그것보다 더 치열하게 느껴졌다. 나서는 길에 악수를 청했다. 그는 크지 않은 보드라운 두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았다. 한 가지 일에 일생 몰두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온기와 물성이 전해졌다. 자신이 그리는 풍경이 풍경화에 덧씌워진 정치성을 탈피하거나 얽매이는 ‘불온한 풍경화’가 되기를 의도하지도, 인식하지도 않은 채, 그저 그는 젊디젊을 뿐이다. 며칠 후 나의 지인은 내게 이런 문자를 보냈다. “민정기 선생님 그림에는 언제나 봄의 힘이 가득 차 있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