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LY
BUT
SURELY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다. 사진 촬영을 즐기는 편인가?
아니 사실 사진이 가장 불편하다. 그동안 꽤 많은 화보를 촬영했는데도 기억에 남는 화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이제 ‘인생 화보’ 같은 거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이번 화보가 그렇게 됐음 좋겠다.
평소에 촬영해보고 싶었던 콘셉트 같은 게 있나?
오늘 촬영한 흑백사진 같은 것.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찍어보고 싶었다.
드라마 <리갈하이>의 첫 방영이 내일이다.(제작 발표회가 막 끝난 참이었다.) 방영을 하루 앞둔 배우의 기분은 어떤가?
예전에는 첫 방송 시청률이 굉장히 신경 쓰였던 게 사실이다. 이왕 고생하는 거 잘 나오면 좋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부담감을 많이 내려놨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해서 내 인생이 본질적으로 더 행복해지는 게 아니더라. 이젠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이 캐릭터를 만나서 쌓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사실 현장에서도 전작
그 메시지가 무엇인가?
쉽게, 마냥 웃을 수 있는 법정 드라마.
이순재 선생님, 김병옥, 정상훈 배우 등 개성 강한 배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
선배님들이 많다 보니 내가 어리거나 경험이 적었으면 경직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예전엔 선배님들과 함께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겁나서 가끔은 피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선배님들이 있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에 웃고, 하물며 뭘 먹을지도 같이 고민한다. 점심 메뉴같이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걸 매일 함께 정하다 보니까 금세 가족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모두 여유가 있고 서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배려심이 몸에 배어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가능했던 것 같다.
<리갈하이>에서 맡은 ‘민주경’은 B&G 로펌의 브레인 변호사로 반전을 갖춘 미스터리한 인물이라고 소개돼 있다.
법정에 서는 변호사라기보다는 일을 로펌으로 가지고 오는, 세일즈를 하는 변호사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머리가 좋은 친구인데, 젊었을 때는 한 마디로 ‘조폭’이었다. 아마 조폭이었던 시절 사고를 쳐서 법정에 갔고 그때 누군가가 이 친구의 재능을 발견해서 결국 변호사가 된,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코미디 장르이다 보니까 판타지적 요소가 있다. ‘츤데레’적인 매력도 있고 인간적으로도 참 괜찮고 내공도 만만치 않은,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이 존재할까 싶지만 정말 꼭 있었으면 하는, 멋있는 여자다.
이번 ‘민주경’을 비롯해 이제껏 맡은 역할에 대부분 ‘차도녀’나 ‘여신급 미모’ 같은 수식어가 붙었다. 때문에 예쁘지 않아도 되는 역할에 대한 갈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분명한 이미지가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히 <커피 프린스> 때까지의 영광들, 일명 ‘리즈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으면 정말 감사한데, 어느 날부터 그런 예쁜 캐릭터에 더 이상 설레지가 않더라. 고정된 이미지에 갇혀 있는 스스로가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좀 더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 보다 현실적인 인물에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전작 드라마 <슈츠>에서도 스마트하고 센스 있는 로펌의 비서 역할을 맡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에게 “너 오늘 미용실 안 다녀왔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문가들의 손길을 많이 배제했다. 이번엔 사람들을 만나고 영업을 해야만 하는 변호사 역할이니까 어느 정도는 꾸미지만 역시 화려한 액세서리는 덜어냈고 말이다. 1차원적이지만 시각적인 것에서부터 유연함을 기르고 싶었다.
인터뷰 내내 ‘힘을 뺀’ ‘일상적인’ 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직업관뿐만이 아니라 삶의 가치관에 있어서도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꿈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이 참 곤란했다. 꼭 거창한 인생의 꿈이 있어야 되나, 그저 오늘 하루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것 먹고, 오늘처럼 새로운 스태프들을 만나서 마음에 드는 작업을 하는 게 하루의 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심각하게 꿈에 관해 토론할 때마다 내가 좀 이상한 아이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들처럼 조급하게 성공이나 인기, 부를 좇지 않았던 게 차라리 다행인 것 같다. 일단 스스로가 편하다. 대단한 야망은 없었지만 삶의 방향 같은 건 있어서 나름 그걸 따라왔다. 그냥 그 기준만 확고하다면 천천히 가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정도 살아보니까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게 때로는 잠깐의 쾌감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 말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배우에게는 조금 더 민감한 문제일 수 있다.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사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좋은 선배님들의 영향을 받아서 다행히 TV나 사진에 주름이 나오는 게 두렵지는 않다. 예전엔 괜히 쿨한 척, 센 척 했는데 지금은 정말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진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육체적으로는 좋은 습관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나에게 집중하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워낙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까 지나치게 배려하고 오지랖 넓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는데, 정말 서로 존중할 수 있는 사람들만 남기고 심플하게 관계를 정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예전엔 남들을 의식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는데 이젠 내가 더 이상 즐겁지 않으면 과감히 자를 수 있는 결단력도 생겼다.
20대보다는 30대가, 30대보다는 40대가 더 좋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너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되는 것. 그리고 이젠 믿을 수 있는 감이라는 게 생긴 것. 나에게 좋은 기운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고 해야 하나? 예전처럼 좀 불편해도 무작정 감내하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가 있는 사람들을 선별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게 됐다. 전반적으로 좀 더 편해진 것 같다.
인스타그램(@chae_jimgan) 계정이나 방송에서의 모습을 보면 한없이 긍정적이고, 천진하고, 농담을 즐기는 쪽인 것 같다. 예능 프로그램 <인생술집>에 출연한 당신에게 MC 신동엽 역시 “알고 보면 제일 돌아이”라고 하지 않았나.
작품, 일상, 스타일링 모두에서 재미있는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진지하고 심각한 분위기, 이를테면 기자 간담회 같은 곳에서 실없는 소리 하는 것도 좋아하고. 예능에 가끔씩 출연하는 이유 중 하나도 사실 나는 대중에게 각인된 ‘차도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조금씩 보여주기 위해서다. 옆집 사는 그 여자, 그 친구가 바로 진짜 내 모습과 가깝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 당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게 있다면?
맛없는 것 먹을 때?(웃음) 맛집이라고 갔는데 음식이 실망스러우면 화나지 않나?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실 내가 시간 약속에 강박이 있는 편이다.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하면서 현장에 지각해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고 촬영이 없는 날에도 스케줄을 3~4개씩 만들어서 분 단위로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스스로 외롭고 우울할 틈을 주지 않았는데 이젠 그것도 내려놓는 중이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약속에 보다 관대해지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여유 없이 살았던 건 외로움을 피하려고 만든 장치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채정안에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여유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욕심 덜 부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것. 늦은 감은 좀 있지만 차근차근 훈련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