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나답게 살면 된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2019년의 서울은 여전히 플러스 사이즈 여성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도시다. 새해에는 ‘뚱뚱함’에 대한 고리타분한 잣대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건강,헬스,다이어트,플러스사이즈,비만

SIZE MATTERS대충 묶은 머리에 늘어진 티셔츠 차림을 한 여성이 구부정하게 앉아 큼직한 양푼 가득 밥과 반찬을 비빈다. 양 볼이 미어져라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민망한 듯 머쓱한 표정으로 한마디. “에이,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할 거예요.” 다이어트 보조제의 광고다. 머리부터 발끝, 입가에 붙은 밥풀까지 과체중 여성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한편으론 남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진 않은 후줄근한 모습. 광고주는 그 후줄근함을 영상에 담아 만천하에 전시하며 협박한다. 당신도 이렇게 되긴 싫죠? 그렇다면 우리 제품을 먹고 얼른 살을 빼라고요. 뭐, 좋다. 해당 광고야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파는 게 목적일 테니 그러려니 치자. 하지만 광고에서만 그런가? 드라마든 영화든 온 미디어가 똘똘 뭉쳐 과체중 인간, 그중에서도 과체중 여성을 콕 집어 후줄근하고 게으른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는 편안한 실내복에 대한 모독이며 맛있고 푸짐한 비빔밥에 대한 모독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서 44년째 과체중 여성으로 살고 있는 나로선 오른손을 우아하게 쳐들며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저기요, 돈 받고 일하는 거면 이제 다른 표현 방법 좀 찾아보지 그래요. 정말로 게으른 건 당신들 아닌가요. 맛있는 것이 좋다. 정성 들여 만든 좋은 음식을 근사하고 아름다운 장소에서 먹는 것이 좋다. 달콤 쌉쌀하고 새콤 짭조름한 풍미를, 부드럽게 쫀득하고 아삭바삭한 식감을 즐긴다. 똑 떨어지는 스시 오마카세도 좋고 기름 잘잘 흐르는 과메기를 물미역에 싸서 초장에 푹 찍어 먹는 것도 좋다. 코스 요리를 맛보며 다음엔 뭐가 나올까 기대하는 것이 즐겁고, 비닐을 씌운 녹색 플라스틱 접시에 떡볶이(저는 쌀떡파입니다)와 순대가 담겨 나오면 세상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아 들어 영접한다. 혼자서든 여럿이서든, 맛있는 것을 먹는 건 언제나 행복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통실통실 포동포동 살도 꽤 올랐다. 먹기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서 얼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자신에게 적당히 만족하며 살고 있는 과체중의 나와, 나 같은 사람을 기어코 불행한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미디어. 둘 중 누가 정말 문제인가. 한때 나 역시 다이어트에 열중했다. 덴마크엔 가보지도 못했지만, 덴마크 다이어트는 수차례 시도했다. 침을 맞고 한약을 마셨으며, 주사를 맞고 양약을 삼켰다. 보름간 단식원에 들어가 물과 이온 음료만 마신 적도 있다. 어떤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어떤 시도에선 꽤 괜찮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2kg이 빠지든 20kg이 빠지든 내 마음이 소리 없이 야금야금 병들어간다는 건 몰랐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어느 날은 먹은 게 체했는지 속이 몹시 불편했고, 결국 억지로 힘을 주어 토했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시뻘게진 얼굴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생각했다. ‘야, 이건 살로 안 가겠구나!’ 끔찍한 소리지만, 그 순간엔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뿐인가, 장염에 걸려 고생하는 친구 소식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아무것도 못 먹고 계속 토하고 설사한다니 살이 쪽 빠지겠네, 부러워라.’ 이건 정상이 아니다.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오늘의 나는 좀 달라졌다. 마흔네 살, 그동안 내 몸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 수많은 여행을 무사히 다녀온 것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한 것도, 즐거운 대화와 맛있는 음식을 나눈 것도 모두 내 몸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과연 내 몸에 충분히 고마워했는지, 아끼고 사랑했는지 생각해볼 차례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정말 어렵다. 처음엔 무조건 당당해지자고 생각했다. 허리를 펴고 가슴을 내밀며, “나는 멋져, 나는 최고야.”라는 주문을 외웠다. 모든 사이즈는 다 멋지고 아름다운 거야.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다. 애초에 모두 멋지고 아름다울 필요가 있나? 어느 날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어느 날은 꽤 괜찮다. 이런 날도 있으면 저런 날도 있다. 나는 그저, 내 속도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체중계와 옷 사이즈가 말해주는 숫자는 여전히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정말로 신경 써서 읽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할 숫자는 따로 있다. 혈압과 혈당, 근육량, 콜레스테롤 수치 같은 것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건강, 내 행복과 밀접하게 관련된 숫자들이다. 내가 나에게 집중하면, 숫자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달라진다. 맛있는 것 잘 먹고, 신나게 몸을 움직이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