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3.0
마냥 희망차게만 들렸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란 단어에서 이전 같은 설렘이 묻어나지 않는다. 문화의 분야와 장르의 간극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새로운 자극에 대한 열망은 비대해져만 간다. 그래서 그럴싸한 ‘손’이 감지되면 일단 서로 붙들고 보는 풍속도 같은 게 생겨버린 건 아닐까. 혀를 감치고 드는 조미료에 감각 신경이 무뎌지듯, 무엇을 어떻게 합치느냐보다 그 조화가 얼마나 기상천외한지, 그 결과가 얼마나 예측불가한지가 컬래버레이션의 본질을 덮는 지표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해 봄, 패션 브랜드 게스코리아는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와 협업을 감행한다. 새로움인지 기묘함인지 헛갈리는 그때에 오뚜기 진라면은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의 작품과 협업한 30주년 패키지를 선보인다.
지금 컬래버레이션 혹은 협업이 가지는 오롯한 힘에 그 무게중심이 존재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한 단계 진화한 K-팝이다. 그간 미국의 팝스타들과 한국 뮤지션들 간에 간헐적인 협업이 존재해왔다. 지난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래퍼 박재범이 원곡 ‘Nothing On You’를 B.o.B 와 함께 ‘믿어줄래’로 리메이크한다. 같은 해, JYJ는 칸예 웨스트와 함께한 ‘Ayy Girl’ 로 화제를 모은다. 이윽고 2012년엔 원더걸스가 미국의 프로듀서 에이콘과 함께 ‘Like Money’를, 그 이듬해에는 여성 래퍼 미시 앨리엇과 지드래곤이 손잡고 국악적 터치가 인상적인 ‘닐리리야’를 부른다. ‘강남스타일’의 여세를 몰아 2014년 싸이는 래퍼 스눕독과 함께 만든 ‘행오버’ 뮤직비디오로 또 한번 화제의 중심에 서는 한편, 씨엘은 디플로, 윌아이엠 등의 걸출한 프로듀서 겸 DJ들과 작업을 거듭한다. 2016년 브루노 마스는 샤이니의 태민에게 ‘Press Your Number’라는 곡을 선물한다. 그리고 2017년 방탄소년단(BTS)의 활약으로 K-팝 컬래버레이션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체인스모커스가 피처링한 BTS의 ‘Best of Me’를 기점으로 미국 팝 신과 K-팝의 협업 양상에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작년 한 해 동안만 블랙핑크와 두아 리파의 ‘Kiss & Make Up’, 레드벨벳 웬디와 존 레전드의 ‘Written in the Stars’, 씨엘과 블랙아이드피스의 ‘Dopeness’가 세간을 놀라게 했고, BTS에게 다다른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러브콜은 말할 것도 없다. 랩 여신 니키 미나즈는 ‘Idol’을,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DJ 스티브 아오키는 ‘Waste It On Me’를 탄생시켰다. 런던의 일렉트로니카 듀오 혼네가 쓰고 RM이 노래한 ‘서울’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정서, 언어, 두 뮤지션만의 독보적인 감성이 샐러드처럼 버무려진 곡이다. 서울 시내의 다양한 정취와 풍광을 담아낸 RM의 ‘서울’ 영상 아래, 5천 개 가까이 ‘좋아요’를 받은 어느 해외 유저의 댓글이다. “Before I die, I have to go to Seoul.”
1990년대, 여러 기획사가 기획력과 연출력을 다지며 차근차근 스타 콘텐츠 비즈니스의 기본기를 쌓아가던 그 시절을 K-팝 1.0이라 한다면, 경제력과 기술력, 한국인 특유의 흥과 끈기를 밑천으로 키워낸 아티스트를 세계 무대에 세우고, K-팝만의 톤과 매너, 스타일을 공고히 하던 시기를 K-팝 2.0이라 할 수 있을까. K-팝을 팝의 아류가 아닌 하나의 코드, 미감, 태도로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세계의 아티스트들과 어깨 나란히 공유하고 새로움을 도모하는 것, 그리하여 한국을 세계로 보냄을 넘어 세계를 한국으로 들이는 이 시기를 K-팝 3.0이라 감히 부를 수 있을까. 대형 기획사에 기회가 쏠리고, 전 세계가 아닌 미국 팝과의 협업에 치우쳐 있다는 한계점도 있다. 그럼에도 문화의 헤게모니가 머무르는 영미권 팝과 K-팝이 서로를 부지런히 재해석하는 세태는 퍽 희망적이다. 바야흐로 K-팝 3.0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