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 드레스, 힙색, 윈드브레이커, 네온 컬러, 어글리 스니커즈, 타이니 선글라스, 곱창밴드 그리고 실핀까지. 오늘날 패션은 1990년대의 바다에 침수된 듯 보인다. 20여 년 전의 패션이 트렌드의 중심으로 처음 돌아온 지난 2016년, <바자>는 다시 돌아온 1990년대를 이렇게 정의했다. “유치찬란하지만 분명 보석처럼 빛나는 추억이 존재하며, 젊음의 에너지와 자유분방한 공기가 팽배했던 시대.” 이 때문일까? 1990년대, 이 아름다운 호시절에 청춘을 불태운 X세대(지금 현재 가장 강력한 소비 주체)는 ‘그 시절’에 향수를 느끼며 지난 패션의 귀환을 반기고 있다. 반면 1990년대를 경험하지 못한 밀레니얼 세대는 이 복고 트렌드를 새롭게 느끼고 있다. 결론적으로 제각기 이유는 다르지만 1990년대 패션은 신구 세대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것처럼 1990년대의 수많은(너무 많아 중략했을 정도로) 요소가 부활했음에도 그동안 유일하게 돌아오지 않던 아이템이 있었다. 바로 수트 베스트! 그런데 올봄, 수트 베스트가 그 긴 공백을 깨고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물론 베스트가 지난 세월 동안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브 생 로랑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시절, 스테파노 필라티는 르 스모킹의 대체재로 베스트 수트를 제안하기도 했고, 미니멀리스트와 실용성을 추구하는 뉴욕 디자이너들도 베스트를 종종 런웨이에 올리곤 했다. 2000년대 중반, 케이트 모스, 샤를로트 갱스부르 같은 패션 아이콘과 할리우드의 가십걸들이 즐겨 입기도 했고. 하지만 우리가 곧 마주하게 될 2019년의 수트 베스트는 분명 다르며 다양한 스타일로 런웨이에서 그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1990년대를 풍미한 미드 <프렌즈>는 1994년에 시작해 시즌 10까지 방영되었다. 그렇기에 그 시절의 패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프렌즈> 속 여배우들의 스타일을 들여다보니, 미니멀부터 스트리트 무드까지 실로 다양한 베스트 룩을 입고 있었다. 1990년대 패션을 둘로 나누자면, 캘빈 클라인, 헬무트 랭, 질 샌더, 프라다가 이끈 미니멀한 디자인의 ‘업타운 시크’와 자유분방한 스트리트 감성의 ‘쿨 키즈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우리가 심취한 1990년대 패션은 후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수트 베스트는 이 두 영역에 모두 포함되는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프렌즈> 속 주인공들을 떠올려보자. 수트 베스트에 미니멀한 스커트를 매치한 레이첼 그린의 룩, 그리고 빈티지한 데님을 매치한 모니카 갤러의 룩 둘 다 1990년대식 수트 베스트 드레싱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한 가지, 1990년대엔 미니멀이라고 모든 것을 다 덜어낸 것은 아니었다. 리즈 틸버리스의 <바자> 화보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니멀 스타일도 자유롭고 내추럴하며 따스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1990년대 패션은 쿨 키즈와 자유롭고 내추럴한 미니멀리즘이 뒤섞여 있었고, 이 경향은 2019 S/S 시즌의 수트 베스트로 이어졌다.
동시대적인 수트 베스트 드레싱을 위해선 반드시 기억해야 할 키워드가 있다. 오버사이즈, 드레스다운 그리고 쿨한 애티튜드. 이 중 최소한 한 가지는 품고 있어야 한다. 이 말은 곧 베스트를 태생 그대로 포멀하게 연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번 시즌의 베스트(Best) 베스트(Vest)를 선보인 프로엔자 스쿨러는 레더 소재와 오버사이즈 베스트들을 선보였다. 오랜만에 런웨이로 돌아온 1990년대 슈퍼모델 앰버 발레타는 실버 베스트를 오버사이즈 셔츠, 트렌디한 워싱 데님과 매치한 룩을 입은 채 등장했다. 이러한 정형화되지 않은 매칭은 다른 룩에서도 이어진다. 로베르토 카발리 또한 미니멀한 베스트에 타이트한 버뮤다 팬츠, 그래픽 패턴의 앵클부츠를 매치해 스트리트 감성을 주입했다.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바 수트의 소매를 떼어낸 듯한 벨티드 베스트에 데님 카고 팬츠를 매치해 우아함과 자유분방함을 넘나드는 새로운 룩을 제안했다. 반면 플라워 드레스에 오버사이즈 베스트를 매치한 티비의 드레싱은 현실의 여성들이 쉽게 도전할 수 있을 듯. 포멀한 베스트 수트를 쿨하게 소화하고 싶다면, 네온 컬러의 탱크 톱을 매치한 오프 화이트나 스리피스 수트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오버사이즈 백을 끌어안는 무심한 애티튜드를 보여준 어웨이크의 스타일을 참고하도록. 오버사이즈 베스트를 미니 드레스로 응용하는 것 또한 근사한 방법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수트 베스트를 가장 멋지게 연출하는 방법은 이너를 생략해 톱처럼 연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네크라인 그리고 어깨에서 시작되는 직선 라인이 모던함을 극대화하기 때문.
다시 돌아온 수트 베스트를 반갑게 맞이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수트 베스트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의 ‘자유로움’을 기억하고, 그저 ‘자유롭게’ 스타일을 즐기면 된다. 물론 속절없이 드러날 팔뚝 라인을 위해 아령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무엇보다 당당한 애티튜드가 가장 패셔너블해 보일 수 있는 무기이며 이것이 원래 수트 베스트가 있었던 곳, 1990년대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