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세월이 흘린 이야기들을 고인 물처럼 내버려두는 건 인간의 천성이 아니다. 그래서 패션은 무한한 루프 위를 선회하고, 물질은 업사이클의 배에 오른다. 그리고 공장은 새로 태어난다. 방치된 2차산업 시대의 잔재를 오늘에 걸맞게 매만져 소생시키는 시도들이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발한 진행형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산업혁명 당시의 화력발전소가 세계 현대미술의 동맥으로 변모한 런던의 테이트모던이 있다. 작년 초 브뤼셀에는 자동차공장을 멋들어지게 재해석한 퐁피두 미술관 분관이 오픈했고,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선 생산 중단된 설탕공장을 축 삼아 근사한 공원이 조성되는 등 해외의 사례를 꼽자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그 흐름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엔 담배공장을 재생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마침내 공개됐다. 청주시의 옛 연초제조창을 탈바꿈시킨 개방형 미술품 수장고다.
한편 40년 동안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산화티타늄을 생산하던 인천 가좌동의 코스모 화학공장 단지는 지난 10월 ‘COSMO40’이라는 문화 공간으로 변신했다. 2016년 공장이 울산으로 이전을 결정하면서 2만 평이 넘는 대단지에 자리하던 공장 건물들은 삽시간에 철거됐다. 정제 플랜트 마흔 개 동도 함께 철거될 위기였으나, 일부만이라도 보존해 공간의 맥락을 지키며 지역에 다른 방식의 활기를 불어넣길 바랐던 사람들에 의해 살아남았다. 부산물들을 쌓아놓던 창고 자리엔 공원도 조성됐다.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라운지, 레스토랑, 전시 공간, 거대한 다목적 홀 등이 운영된다. COSMO40을 기획하고 구현해낸 빈브라더스 에이블커피그룹의 성훈식 디렉터에게 물었다.
어떻게 COSMO40이라는 공간을 떠올리게 됐나?
빈브라더스는 커피회사이지만, 이 커다란 공간을 카페로만 활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커피 자체를 파고드는 미식으로서의 커피보다 커피의 맥락을 파고드는 매개로서의 커피에 주목했다. 커피를 통해 친구, 가족, 연인 같은 사람들과 연결되거나 책, 음악, 전시 같은 다양한 콘텐츠와 연결되는 것. 사람들이 교류하고 신선한 콘텐츠가 자유롭게 표류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한국을 벗어나 보면 지역성을 고려해 이런 폐산업시설을 잘 활용하는 경우가 참 많은데,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욕심을 낸 것도 있다. 서울을 벗어나면 문화 콘텐츠의 공급이 현저히 부족하다. 인천의 문화 수요는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고, 양질의 콘텐츠를 꾸준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인천은 우리 삶의 영역이다. 가좌동 코스모 화학공장 부지 근처에 빈브라더스의 카페와 로스터리가 운영되고 있다. 오며가며 늘 마주하던 공장 단지였는데, 산업도시로서 인천의 고유한 매력을 이 공장이 참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철거 소식을 접한 후 우연히 들어가 마주한 공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없애지 않고 잘 매만져 보존한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값진 경험과 감동을 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화학공장이라는 폐산업시설을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있었다면?
똑같은 공간을 만들어도 신축보다 더 많은 자본이 소요된다. 그리고 건물이 오래될수록 재생할 때 건축법상의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주 까다롭다.
반대로 공장을 재발견하는 기쁨이 있다면?
특유의 고유성이다. 커다란 설비를 운영하던 공장일수록 대공간 형태가 많다. 애초부터 문화 공간을 의도하고 설계했다면 절대 나오지 못했을 형태와 구조들이 있다. 결국 그 의외성이 고유성을 지니고, 창작자들에게 장소 특정적인 영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지니는 고유성도 있다. 어쨌거나 어떤 공간에 누적된 시간이 빚어내는 가치는 복제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부산 수영구 망미동엔 고려제강(Kiswire)의 와이어공장이 초록과 어우러져 오묘한 재생 공간으로 거듭난 ‘F1963’이 있다. 온실과 정원, 원예점과 작은 숲이 에워싼 공장 건물들 안엔 세미나 등 모임 행사가 가능한 스퀘어, 파인 다이닝과 펍, 전시장과 도서관 등 다채로운 문화 공간이 들어차 있다. 지난 2016년, 이 공간의 건축과 설계를 지휘한 조병수 건축가에게 물었다. 그는 보스턴, 몬트리올, 스위스 루가노 등지의 도시 재생, 성북동 스튜디오 주택, 온그라운드 갤러리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재생 건축에 부단한 관심을 쏟고 있다.
‘F1963’은 어떤 프로젝트였나?
고려제강 본사의 트레이닝 센터 설계를 마치고 옆의 빈 공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마침 수영 공장이 2016년 부산 비엔날레의 전시 공간으로 채택되면서 공장 공간을 일부 고쳐 쓰도록 한 것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었다.
과거 반세기 가까이 운영된 공장을 새롭게 바꾸면서 고수했던 원칙이 있다면?
기존 건물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시공 과정에서 발생되는 쓰레기를 내보내지 않고 모든 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것. 시공 과정에서 잘라낸 1×1m 크기의 슬라브를 F1963의 대나무밭에 콘크리트 발판으로 사용했다. 목재 트러스의 일부는 잘라서 벤치로, 철재는 내부의 바 테이블로 응용했다.
공장 등 폐산업시설을 재생하는 행위의 가치를 말해달라.
재생 건축은 재활용의 건축을 넘어 새로움의 건축이어야 한다. 도시 재생은 역사를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읽고, 서로의 생각과 기억을 더듬어 ‘새롭게 한 발 더 나아가는’ 것, 서로 다른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기존의 것과 새것이 ‘창의적 방식’으로 공존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은 재생 건축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건축 자체의 의미를 넘어 사회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재생건축의 비전을 짚어준다면?
우리는 그간 너무나 많은 건물들을 쉽게 허물어버렸다. 이제나마 재생 건축이 가지는 물리적, 환경적 가치를 깨닫고 활용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재생 건축을 통해 새 건물과 낡은 건물, 고급 건물과 값싼 건물의 차별감과 소외감을 좁히고, 각각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는 도시와 사회를 만들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