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몇 시인지 모르겠다. 온 세상이 잠들어 있고 나만이 깨어 있는 느낌이다. 무한한 힘과 무기력함이 같은 비율로 공존한다. 마치 덩그러니 넘어져 있는 숲속의 나무가 된 것 같고 끊임없이 한 손으로 손뼉을 치고 있는 기분이다. 어떻게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까?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건만, 이상하게도 침대에서 주방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며 자책을 하게 된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니코틴 때문에 심장이 약간 더 격하게 뛴다.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내어 토스트에 버터를 바른다. 매일 아침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칼을 더 차갑고 무겁게 느껴지게 만든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나이프의 느낌이다. 혼자 “나이프”라고 중얼거리면서 이 단어 자체가 그 물건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문득 알아차리게 된다.
한밤중에 주방에 앉아 혼자 냉장고에 말을 거는 내가 이상하게 보이나? 생각해보면, 잠과 밤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구석 투성이다. 왜 누군가는 쉽게 숙면에 이르고, 나를 비롯한 누군가는 잠을 자지 못할까? 아니, 수면이라는 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알고 싶은 건 의학적인 효용 같은 게 아니라 ‘잠’ 그 자체에 대한 의미다.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수면의 중요성에 대해 평생 동안 들어왔다. 충분한 수면이 신체의 재생, 호르몬과 면역 세포의 활성을 돕는다는 지루한 얘기들 말이다. 의사나 과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술가들은 잠에 대해 제법 괜찮은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신화에서도 잠은 상대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지만, 사실 분명한 건 잠은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것 하나뿐이다. 왜 우리는 실제로 죽기 전까지 하루의 반 정도를, 인생의 1/3의 시간을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보내야 하나? 때때로 매일 이 일을 본능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게 쓸모없고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다.
어쩌면 잠은 과대평가된 것일지도 모른다. 잠 들지 못하는 밤이 좋은 공범자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데, 그 대상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나는 그 상태를 ‘존재의 제로화’라고 부른다.
SNS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말은 보여진다는 말의 동의어나 다름없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판단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뜻이고, 판단할 사람이 없으면 행동에 대한 결과도 없다. 완전한 고독이고 자유다. 가장 이상한 일들과 생각들이 허용된다.
과학이 아닌 예술의 시각으로 접근해보면, 수면은 음악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순수한 형태이고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어떠한 선택권이나 해석도 없으며 단지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반면에 불면은 일종의 권태다. 이 권태를 활용하는 몇 가지 방법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눠보자면, 첫째는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다. ‘캔디 크러쉬’ 같은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고, 비틀스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멤버의 음악을 찾아 듣고, 냉장고를 뒤져 남은 음식을 먹는 것 따위의 일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이 경우엔 불면의 이유가 앞서 말한 행동에 대한 욕망이나 중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엔 행동과 사고와 감각을 동반하는 수만 가지 방법이 있다. 불면은 평소에 무감하게 여겼던 것들을 예민하게 다가오게끔 만든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코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냄새를 맡거나 숨을 쉬는 기능을 넘어서 코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 같은 아주 기묘한 일들을 말한다. 내 경우엔 이불을 코 근처로 끌어당기는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때로는 이 행위가 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이불에 맞닿는 코의 감촉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코는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 그건 카펫이나 방 안의 온도, 아니면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 어쩌면 박테리아로 대체될 수도 있다. 요지는 내가 살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만드는 미세한 감각이 살아난다는 거다. 그리고 이 이상한 여정은 흔히 이렇게 불린다. ‘생각하기’. 그리고 결국엔 그 상상이 얼마나 세심하고 미세한 갈래로 뻗어나갔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기에 이른다. 집중에 대한 의지나 자각도 없이 자연스럽게 생각이 깊어진다.
그리고 시각은 보다 명료해진다.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방 한구석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 순간 진정한 ‘색’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혹은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세상의 팔레트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어둠은 마냥 검은색이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에서처럼 푸르지도 않다. 그것은 정의할 수 없는 그 자체의, 아주 사적인 색을 띤다. 내게는 마치 공기만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 빛이 반사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밤보다는 오히려 아침이 파랑에 가깝다. 아니, 파란색들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낫겠다. 아침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밤의 검정만큼이나 많은 푸른색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다. 그저 그 색을 빤히 보고 있을 뿐이다. 고양이가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깨어있는 나를 발견하고 따뜻한 몸을 내게 기댄다. 고양이에게는 어둠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진다. 고양이는 블랙 실크 드레스처럼 다양한 검은색을 띠고 있는 어둠을 모른 채 살아간다.
이건 분명히 다른 차원의 경험이지만, 사실 자신을 한없이 지치게 만들 수 있는 경험을 위해 억지로 깨어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불면은 괴로운 것이다. 잠이 도피처로 작용하는 순간에는 더욱 더, 불면이란 순수하고 단순한 고문과도 같다. 어떤 날은 소음을 탓하면서, 또 다른 밤엔 옆에 있는 누군가를 이유로 잠들지 못한다. 두 사람이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을 경우 수면은 일종의 경쟁이 된다. 보통 패배하는 건 내 쪽이다. 그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더욱더 잠이 오지 않는다. 잠드는 방법을 모르는, 수면이라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점점 불안해지고 결국에는 우울증에 다다른다. 새로울 것도 없고, 마치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한 번이라도 불면증을 경험해봤다면, 이 묘사가 과장이 아님을 알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약물이나 명상, 어떤 치료를 하든지 간에 인체의 법칙에 따라 언젠가는 잠들게 된다. 그리고 더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평화롭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저 고양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