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한 부자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부나 권력, 때로는 전부를 쥐고도부나 권력, 때로는 전부를 쥐고도 한없이 겸손한 이들이 있다. | BAZAAR,바자

나이를 먹을수록 질박한 게 좋다. “겉모양이나 품질, 옷차림이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서 제격에 어울리는 품이 어지간하기”야말로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수수하다’는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개성 없음이나 무미함을 에두르는 줄만 알았던 단어가 언제부턴가 다르게 다가온다. 좋은 것만 골라 가졌지만 어딘지 어설픈 쪽. 평범한 것들이지만 나라는 캐릭터와 모자람 없이 어우러지는 쪽. 멋지지 않은가. 주저 없이 후자에 한 표를 던지며 혼자 머리를 주억인다. 꾸밈과 안 꾸밈의 미묘한 경계를 넘나드는 미감을 숭배하는 것, 진과 터틀넥, 미디스커트와 면 티처럼 평이한 아이템들을 믹스하고 변주해 나만의 룩을 완성하는 ‘놈코어(Normcore)’가 시대의 조류를 타는 것 또한 수수함을 동경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비단 옷차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수수함’은 귀의하고자 하는 인간상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돈 많은 사람’ ‘유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심드렁했다. 재력을 앞세워 진귀한 물건들을 곁에 쌓아두거나 화려한 이목구비로 탈바꿈하면 그건 아름다움일까, 권력을 내세워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업신여기면 만족이고 행복일까, 명예를 업고 허울 좋은 체면치레에 집착하면 그것은 명예일까, 싶은 허무함에서였다. 그런데 부나 권력, 때로는 전부를 쥐고도 한없이 겸손한 이들을 보며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여태껏 93년형 볼보를 몰며 비행기 좌석은 이코노미만 고집한다는 이케아 회장 잉바르 캄프라드의 괴벽(?)이나 시가 3천만원 남짓의 50년 된 집에 사는 워렌 버핏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거대 유통체인 월마트의 상속녀 크리스티 월튼이 물려받은 재산은 40조원에 달한다. 재력가 부모 밑에서 아들이 특권의식을 지니길 원치 않았던 그녀는 오래된 주택에서 여느 부모들처럼 아들을 교육하며 뒷바라지 했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남편과 사별 후에는 그 집을 지역 재단에 기부한다. 일생의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얼굴에 중책을 져야 한다나. 그녀의 철학과 미소가 머무른 자리에 주름진 세월의 잔흔이 보톡스와 리프팅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편안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애플의 CEO 팀 쿡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난다. 한 시간 동안 이메일을 체크한 뒤 운동을 하고 일하러 간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늘 상기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선 모든 주변 환경을 평범하고 검소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죠. 돈은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아닙니다.” 남편과 함께 2천억원 자산가인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틴 벨은 시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제니퍼 로렌스와 함께 그녀는 쇼핑할 때 살뜰하게 쿠폰을 모으는 걸로 유명하다. 역설적이게도 의 사라 제시카 파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검소한 여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사라는 어려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먹을 것과 입을 것, 지낼 곳 모두 복지재단의 손길에 의지해야 했다. 지금 1조원 자산가가 된 그녀는 자녀들에게 되도록 새 옷을 사 입히지 않는다고. “내 몫이 있으면 남의 몫도 있다.” 글로벌 패션 기업 휠라를 인수한 윤윤수 휠라 회장의 경영 철학이다. 그는 맨몸으로 다국적 패션 기업을 종용해 한국 지사를 세우고 사장이 됐다. 그리고 급기야는 경영 위기에 내몰린 휠라 본사를 인수해버렸다. 돈에 대한 그의 원칙은 단순했다. “사업으로 번 돈의 40~50%는 세금으로 내고, 25%는 남을 위해, 25%는 나를 위해 씁니다. 나 혼자 이 모든 걸 일궜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입니다. 내 수입 중 남의 몫을 인정해야 사업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10조원 누적 실적의 부동산 개발사 엠디엠 및 한국자산신탁 문주현 회장은 어느 독지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나마도 검정고시를 통과해 스물일곱에 늦깎이로 입학한 학교였다. 창업 3년 만에 그는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그때까지 번 5억원을 재단에 내놨다. 지금까지 2천1백명에게 총 36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했고 현재 재단 자본금은 3백억원이다. “세상 재물은 빌려 쓰는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수수한 자산가들의 이야기가 울림이 되는 것은 그들의 선택 때문이 아닐까. ‘제격에 어울리는 품’을 위해 최고의 것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형 포르쉐 대신 낡은 볼보를, 널찍한 퍼스트 클래스 대신 이코노미 클래스를, 수백억 맨션 대신 네브라스카의 작은 집을, VIP의 갑질 대신 차곡차곡 모은 쿠폰을, 방탕한 밤 대신 고요한 새벽을, 그리고 나 대신 타인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 선택을 무던히도 체화해냈고, 수많은 이들의 희망과 영감이 되었다. 요즘 빠져 있는 JTBC 드라마 이 떠오른다. 극중 우주 엄마(이태란 분)는 경제력과 수수함을 겸비한 여자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예서 엄마(염정아 분)는 외제차를 타고 명품을 지닌다. 의사 남편을 승진시키기 위해, 딸을 서울 의대에 보내기 위해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다. 반면 같은 스카이 캐슬 입주민인 우주 엄마는 그야말로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연식이 오래된 국산 SUV를 타며 아들의 자율성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소위 ‘지잡대’ 출신 의사 남편은 아내의 등쌀 없이 도리어 예서 아빠를 제치고 척추병원장을 맡는다. 치맛바람 한번 맞지 않은 우주는 예서와 공동 수석으로 명문고에 진학한다. 정작 우주 엄마는 관심조차 없지만, 특급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김서형 분)은 우주를 견제하며 예서 엄마에게 조언한다. “일단 우주 어머니 핸드폰 번호 쏴드릴게요. 친하게 지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수수함은 이렇게나 우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