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버버리의 수장이었던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마지막 쇼를 마치고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나의 마지막 컬렉션은 전 세계 LGBTQ+들에게 헌정하고자 한다. ‘우리의 힘과 창의력은 다양성에 있다’라는 말을 하기에 지금보다 더 중요한 시기는 없었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버버리의 체크 패턴은 LGBTQ+(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퀴어(Queer)를 합쳐서 부르는 LGBTQ에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플러스를 더한 것)를 상징하는 레인보 패턴과 어우러져 베일리표 버버리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크리스토퍼 베일리 역시 동성애자이며, 패션계는 LGBTQ+의 창의성 위에서 성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분야다. 그의 예언은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LGBTQ+의 존재가, 그들의 창의성이, 더불어 그들의 다양성을 포용할 줄 아는 사회의 유연성이 중요한 시기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패션계가 아닌 보수적인 정치계에서 LGBTQ+의 눈부신 존재감을 목격했다.
사실 정치는 철저히 다수가 우세하는 곳이다. 정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고, 이를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런 곳에서 소수자라 할 수 있는 LGBTQ+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건 매우 놀라운 ‘특이점’이다. 이번 11월에 치러진 미국 중간 선거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LGBTQ+ 후보가 선출됐다. 캔자스 주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샤리스 데이비즈를 비롯해 오레곤 주지사 당선자인 케이트 브라운, 콜로라도의 주지사 제러드 폴리스 등 LGBTQ+ 정치인의 탄생은 이번 선거의 이슈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은 후보는 단연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미란다, 신시아 닉슨. 올해 초 그녀는 뉴욕 주지사 민주당 후보 경선에 도전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녀는 양성애자로 현재 동성 배우자 크리스틴 마리노니와 살고 있다. 신시아 닉슨이 내놓은 공약은 포용적이며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주지사 출마 선언과 함께 ‘최초’라는 타이틀이 뉴스를 뒤덮었다. ‘최초의 여성 뉴욕 주지사, 최초의 할리우드 배우 출신 뉴욕 주지사, 그리고 최초의 LGBTQ+ 뉴욕 주지사에 도전한 신시아 닉슨!’ 하나 더 붙이자면, 여성 정치인 중 최초로 시스루 셔츠에 팬츠 수트를 입은 자! 수많은 정치 공약을 차치하고라도 그녀가 선거 기간 내에 보여준 패션만으로도 정치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녀를 제외한 수많은 LGBTQ+ 후보들은 옷 못 입는 정치인에 꼽히는 등 패션에 관해서 무관심했다.(혹은 무관심한 척했다.) 주로 짧은 커트머리에 무채색 팬츠수트를 입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신시아 닉슨은 할리우드의 스타답게 선거 유세장에서도, TV 토론회에서도 컬러풀하고 화려한 차림새로 눈길을 끌었다. 이어 그녀는 뉴욕 패션 위크의 프런트 로에도 모습을 보이며(캐리도, 사만사도 아닌 미란다가 말이다!) 패션계가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그녀가 보여준 다양한 패션은 신시아 닉슨이라는 새로운 정치가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했다.
신시아 닉슨과 함께 최근 정치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또 다른 LGBTQ+가 있다. 당당히 양성애자임을 밝힌 앨리스 바이델은 골드만 삭스 출신으로 2012년 독일의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에 합류했다. 이후 2017년 당 공동 대표로 선출되었고, 메르켈 독일 총리와 비교되며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극우 정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행보는 다양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아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극우 정당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일지도 모른다. 화려함과 소박함의 정도를 조절하고, 남성미와 여성미 그 중간을 걷는 앨리스 바이델의 옷차림은 그녀가 앞으로 어떤 정치인이 될지에 대한 힌트가 담겨 있다. LGBTQ+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변했고, 근본적으로 그들 자체도 변했다. 남성 또는 여성으로 나뉘는 이분법적인 성 인식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을 그들의 옷차림에서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최근 영국 왕족 유지니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톱 모델 카라 델레바인의 패션은 신부만큼이나 이슈가 됐다. 전통에 대해서는 지구상 제일 엄격할 것 같은 영국 왕실 결혼식에 톱 해트와 검은 턱시도 차림으로 나타난 것. 물론 패셔니스타다운 면모를 보여준 것일 수도 있지만,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패션이 얼마나 많은 말을 낳을지 그녀 역시 예상했던 일일 것이다. 한편 이날의 주인공인 신부 역시 자신의 척추 수술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지니 공주의 말처럼, 카라 델레바인 역시 또 다른 (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다.
이쯤 해서 다시 한 번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말을 떠올려보자. 우리의 힘과 창의력은 다름 아닌 다양성에서 나온다. 지금의 이 호전적인 정치계에 LGBT Q+의 존재는 반갑기 그지없다. 아울러 그들의 창의적인 패션 그리고 그들이 선보일 창의적인 정치까지도! 글/ 김민정(프리랜스 에디터) 에디터/ 이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