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가오면 그리워지는 것들이 있다. 추운 날 헤어진 옛 연인, 포근한 캐시미어 코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호빵 그리고 터틀넥. 바야흐로 터틀넥의 계절이 돌아왔다. 14년이 넘는 시간을 패션 에디터로 일하다 보니 수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유행 속에 늘 내던져진 기분이다. 다양한 화보에 스타일링을 하느라, 매달 새롭고 다채로운 옷들을 접하면서 든 생각. 가장 심플하고 베이식한 것이 가장 세련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캐릭터에서, 매너에서, 스타일에서, 모든 면에서 가장 탁월한 것은 언제나 단순함이다.”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의 말처럼.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기본 아이템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옷장 속에 있는데도 매 시즌 사야 할 것만 같은, 언제나 쇼핑 카트에 담겨 있는 위시 리스트. 내가 우울하거나 심란할 때 조용히 위로해주고, 기분 좋은 날에는 자신감과 행복을 심어주는 존재, 바로 터틀넥이다.
목부터 팔, 허리까지 빈틈없이 상체를 모두 감싸는 터틀넥은 가장 적게 드러내면서 많은 것을 보여준다. 가릴수록 섹시하다는 명제가 통하는 아이템인 것이다. 게다가 유행에 상관없이 아무 고민하지 않고 꺼내서 기분 좋게 입을 수 있는 아이템 아닌가. 겨울이면 한번쯤 다시 보게 되는 영화 <러브스토리> 속 알리 맥그로의 윈터 룩은 여전히 세련되게 느껴진다. 목까지 올라오는 크림색 터틀넥 풀오퍼에 플란넬 팬츠의 클래식한 매칭이란 1970년대나 지금이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또 프렌치 시크의 대명사 진 세버그도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터틀넥의 정석을 보여준다. 커트머리에 굵게 짜인 터틀넥 스웨터와 시가렛 팬츠, 로퍼를 신은 중성적인 모습은 여자가 봐도 매력적이니까. 모델 장윤주는 다양한 컬러의 터틀넥을 모은다고 말한다. “이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고 든든하게 겨울을 날 수 있어요. 컬러풀한 ‘목폴라’를 입으면 굳이 다른 액세서리를 하지 않아도 확고히 자신만의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거든요.” 이번 달 커버 주인공인 배우 고소영 역시 촬영장에 블랙 진에 블랙 터틀넥 차림으로 등장했다. 군더더기 없는 보디라인을 아름답게 살려주어 그녀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음은 물론. 1990년대 활약했던 수퍼모델 린다 에반젤리스타가 블랙 터틀넥을 입고 있는 흑백 사진에서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또 클래식의 아이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오드리 헵번이 즐겨 입은 블랙 터틀넥은 우아함의 상징이며, 스티브 잡스가 입었던 블랙 터틀넥(이세이 미야케가 그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해준)은 지적인 남자들의 로망으로 등극하지 않았나.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터틀넥은 사실 중세시대 기사들을 위한 옷이었다. 쇠사슬로 엮은 갑옷에 피부가 쓸리거나 상처를 방지하기 위해 입었던 목 부분이 길게 올라오는 얇은 윗옷에서 기인한 것. 목을 감싸주는 것만으로 체온을 3℃ 이상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19세기부터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나 해군의 유니폼으로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소매부터 목 끝까지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리브 조직의 터틀넥,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청키한 오버사이즈 터틀넥, 빈티지한 패턴의 복고풍 터틀넥 등. 늘 옷장 한구석을 차지하던 클래식 아이템이 이번 시즌, 다양한 레이어드 룩으로 트렌드를 등에 엎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디어 넘치는 디자이너들의 스타일링은 참고할 만하다. 먼저 터틀넥 안에 레이어드한 셔츠의 소매를 길게 늘어트린 로에베, 터틀넥 안에 또다른 터틀넥을 덧입은 스포트막스, 슬립 드레스 안에 패턴이 유니크한 터틀넥을 매치한 3.1 필립 림 등이 대표적. 또 비교적 클래식한 더블 브레스트 재킷에 네온 컬러 터틀넥으로 얼굴에 조명 효과를 준 로샤스나 언더커버의 스타일링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루한 윈터 룩에 활기를 더할 수 있는 아이디어! 지방시나 라코스테는 오버사이즈 터틀넥이 아우터로도 손색없음을 보여주고, 핫한 데님 브랜드 R13가 마구 찢어진 청바지와 그래픽 티셔츠에 터틀넥을 머플러처럼 연출한 것도 참신하다.
“터틀넥은 얼굴을 강조해주고 전체 실루엣을 우아하게 해주는 가장 편안한 옷으로, 삶을 쉽게 만들어준다.”라고 디자이너 할스톤은 말했다. 최종적이고 완전무결한 패션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타일을 튼튼하게 세워주는 기본 뼈대이자 시금석은 분명 있다. 평생지기 같은 터틀넥처럼 말이다. 에디터/ 황인애